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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195번째 생일(1821.8.21)
솔뫼성지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기념성당 및 기념관 / 승효상&이로재(?)+길건축(2005)
도시설계가 Archur
2016.08.19

 

'최고'의 지위는 바뀔 수 있지만 '첫 번째', 'The First'의 지위는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떤 위치에서의 첫 번째이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 지위를 차지하는 과정은 외롭고 힘들다. 선례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신념의 문제 앞에서 최초는 의지할 대상이 오직 본인이라는 이유로 더 고되다. '내가 왜 이런 힘든 길을 가야 하나?'라는 신념의 흔들림 앞에 그 선구자는 오직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신념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그 선구자는 알 수 없다. 

 

천주교는 조선 500년의 생각과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 조선은 네 번의 큰 박해를 통해 천주교에게 '양립할 수 없음'을 공식화 했다. 하지만 핍박이 크면 클수록 신념은 더 강해지는 법. 천주교인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고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자신들과 같은 처지의 사제가 나타나길 원했다. 1821년 8월 21일 그 기원을 한 몸에 받은 김대건 신부가 태어났다. 올해는 그의 195번째 생일이다. 김대건 신부에게 천주교는 기성(旣成)이었다.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증조할아버지, 큰 할아버지, 할아버지, 작은 할아버지가 모두 천주교에 입교했고 1814년에는 증조할아버지 김진후가 해미에서 순교했다. 그가 태어나서도 아버지 김제준이 그의 나이 18세였던 1839년 기해박해때 순교했다.


포르투갈 선교사의 영향 아래 있던 북경교구는 1801년 주문모 신부의 순교 이후 30여 년 동안 조선으로 한 명의 선교사도 파견하지 않았다. 교황청은 한국교회를 북경교구에서 독립시키고 1831년 조선대목구를 설정했다. 김대건 신부의 할아버지 김택현 선종 1년 후의 일이다. 조선 선교의 책임도 파리외방전교회에게 맡겼다. 파리외방전교회는 1653년 로마 교황청이 창설했다. 본거지는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는 충청도 지방 사목 활동을 위해 이 지역을 중서부와 동북부로 나눴다. 이 중 중서부 지역에 현재 충청남도에 해당되는데 주요 도시로 당진, 예산, 서산, 목천, 공주, 진천, 청주였다. 당시 이 지역을 내포지방이라 불렀다. 내포평야가 있었기 때문이다.


평야였으니 곡식이 풍성해서 생활이 풍요로웠을 것 같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않은 지역보다 더 빈곤했다. 산에 기대 숨을 곳도 없고 화전(火田)을 일굴 만한 곳도 없어서 농민들에게는 부수입(?)을 기대할 수 없는 곳이 평야지대이기 때문이다. 또한 평야가 펼쳐져 있으니 할 일은 더 많았다. 현세의 삶이 힘들면 내세의 나은 삶을 기대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종교에 집착하게 된다. 내포지방에서 '내포의 사도'로 불렸던 이존창이 천주교를 전래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가 태어난 것도 우연은 아니다. 김대건의 고향은 충남 당진이다. 하지만 그의 할아버지 김택현은 1563년부터 자신의 조상들이 살아왔던 그곳을 1827년 가족과 함께 뜬다. 이후 서울 청파동과 용인 한덕골로 옮겨 살았다.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곳에 소나무 산이 있었던지 현재는 '솔뫼'성지라 불린다. 지금도 솔뫼성지에는 소나무 군락이 있다. 비록 7세때 그곳을 떠났다 하더라도 솔뫼성지는 조선인 최초의 사제가 태어난 곳이니 성스러운 장소다. 천주교에서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김대건 신부 순교 60년이었던 1906년에 솔뫼성지 성역화 작업을 시작됐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당시 성역화 작업은 합덕본당(지금의 합덕성당)의 주임이었던 H.Krempff 신부가 맡았다. H.Krempff신부는 우선 솔뫼성지 일대의 토지를 매입했다. 하지만 시기가 시기였던지라 진행은 더뎠다.


광복된 해인 1945년 백 빌리버(白文弼, Perrin Rev) 신부가 김대건 신부 복자비(福者碑)를 건립했다. 솔뫼성지 성역화 작업에 대한 그들의 소망은 꾸준했다. '碑'는 기념비를 의미하니 제쳐두고 그럼 '복자'는 어떤 사람을 의미할까? 영어로 하면 조금 간단해 진다. 'Blessed'. 천주교에서 복자는 '공식적으로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되는 사람', '공경할 만한 성도에게 붙이는 존칭'이다. 예비성인 쯤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실제 김대건 신부가 성인의 반열에 오른 건 1984년.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2세가 한국에 왔을때다.

1973년 솔뫼성지 성역화 사업이 계획적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1977년 국가의 지원으로 김대건 신부 생가터 구입이 완료됐다(현대 대지면적 44,743㎡). 정치적인 어지러움 속에서도 1982년 현재 솔뫼성지 남쪽 끝에 一자 평면의 솔뫼 피정의 집(설계 : 이재성&C&U건축)이 건립됐다. 1977년에 김대건 신부 생가터 구입이 완료됐지만 생가가 복원된 시점은 2004년이었다. 27년이나 걸린 셈이다. 자기 마을의 특색이라면 없는 것도 찾아내서 만들어내야 하는 요즘 솔뫼성지 성역화 사업은 당진시 뿐만 아니라 충청남도의 놓칠 수 없는 아이템이다.

2007년 당진군은 솔뫼성지 성역화 사업 추진을 발표한다(관련기사: '충남 당진군 솔뫼성지 성역화 추진', 머니투데이, 2007.10.22). 계획면적은 기존 대지면적에 122,577㎡를 더해 총 167,320㎡로, 2020년까지 860억원을 투입한다는 내용이었다. 개발내용은 ① 김대건 신부 생가지내 사랑채와 행랑채, 신부 동산 이전, 피정의 집 철거, 담장 정비 등 보존정비공간(4만4740㎡), ②농산물판매장, 주차장 등 편의시설공간(2만8260㎡), ③신부의 행로 유적건물 미니어쳐, ④회유임천식 전통 수공간, 정자, 쉼터 등 교양문화시설(6만2820㎡), ⑤조경시설공간(3만1500㎡) 이다. 개발내용에서도 짐작했듯이 이때 발표됐던 조감도(위 이미지)를 보면 성지가 아니라 테마파크다. 부지 남동쪽에는 대한민국 주변에 물을 채워 연못을 만든 김대건 신부 유적지 축소복원시설도 있다. 물론 산업시대 건설된 것 같은 피정의 집은 쓸어낸다. 2010년 솔뫼 피정의 집은 철거됐다. 2007년은 김대건 신부 순교 160주년이 되는 해였고 H.Krempff 신부에 의한 솔뫼성지 성역화 작업이 시작된지 100년이 되는 해이니 얼마나 기념하기 좋은 시점이었을까? 당진군 입장에서는 그 시점을 놓치기 싫었을 것 같다.


김대건 신부 생가 앞, 정문에서 시작되는 길을 따라 동쪽으로 훅 들어오면 갈색 코르텐으로 마감된 원형 평면의 건물이 보인다. 2006년 준공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 기념성당 및 기념관(이하 솔뫼성당)이다. 코르텐이라는 철 부재의 무게감 때문인지 아니면 진한 갈색 때문인지 성지 전체에서 무게중심이 솔뫼성당으로 쏠려 있다. 여기에 더해 원형은 커녕 곡선조차 없는 솔뫼성지에서 타원형 평면은 배치도에서도 강한 방점이다. 하나의 건물에 이토록 강한 흡입력이 과연 이 땅에 설득력이 있는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건물의 설계자가 승효상이라는 썰이 있다. 그래서 더 이해가 안됐다.


사실 승효상&이로재 홈페이지 어디를 뒤져봐도 이 건물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오히려 건축물대장에서 설계자는 이길환 (주)길 건축사사무소다. 이 건물의 설계자로 승효상&이로재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이트는 이용재의 블로그(http://blog.naver.com/leecorb/120062190648) 뿐이다. 분명 외관에서 풍기는 분위기나 나름의 대지해석에서는 승효상의 건축언어가 느껴진다. 하지만 너무 밋밋한 건축물 내부는 전혀 그 답지 않았다. 무엇보다 솔뫼성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돌마루 공소(1994)와, 그의 종교건축 수작으로 꼽히는 중곡동 성당(2002)을 솔뫼성당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솔뫼성당을 차분히 뜯어보면 그런 의문은 더 커진다.


솔뫼성당의 타원형 매스 한가운데에는 동서로 관통하는 통로가 있다. 이 통로를 통해 평면적으로는 구심점 있는 타원형이지만 주변과의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 솔뫼성지 입구에서 동쪽으로 들어오는 길의 연장선 보다 위쪽에 배치돼 있는 솔뫼성당은 건물을 관통하는 통로의 서쪽 입구를 더 넓게 처리했다. 그래서 서쪽 영역에 있는 무언가를 모아 동쪽 영역에 어딘가로 보낸다는 의도가 읽힌다. 서쪽으로 벌어진 각도는 지금은 철거됐지만 성당 남서쪽에 있는 솔뫼 피정의 집 포치의 방향과 일치한다.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솔뫼성당과 피정의 집이 어떤 관계를 이루고자 했다고 읽힐 수도 있는 부분이다. 물론 현장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통로에 서서 통로 동쪽 끝을 보면 직사각형 프레임(Frame)이 눈에 들어온다(위 사진). 어차피 통로의 끝부분이 사각 프레임을 설정해주는데 굳이 7m 떨어진 곳에 이러한 프레임을 둔 이유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프레임 동쪽은 신부들이 직접 가꾸는 밭이다. 프레임 안에 밭의 풍경을 담아내고자 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그렇다고 프레임의 각도가 해가 뜨는 남동방향이 아닌 정동쪽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쳤다는 점을 생각하면 의도된 방향도 중요한 요소는 아닌것 같다.

그렇다면 2007년 발표된 성역화 사업의 마스터플랜(위 이미지)에서는 이 프레임이 무엇을 담을 수 있을까? 배치도를 보면 동쪽 개구부의 연장지점에는 야외공연장 및 미사마당이 원형 평면으로 배치돼 있다. 그리고 그 동쪽에 있는 청소년 수련시설은 아에 등을 돌리고 있다. 배치도에서 솔뫼성당은 여타 다른 원형 평면의 공간(성모경당, 다목적 공연장) 중 하나일 뿐 다른 그 무엇과의 연계는 없다.
통로를 중심으로 북쪽에는 예배당이, 남쪽에는 전시기능과 기타 주거기능이 배치돼 있다. 건물 북쪽으로는 일직선으로 쭉 뻗은 '십자가의 길'이 있다. 이 길 끝까지 걸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위성사진상으로 확인해 보면 길은 솔뫼성지 영역 끝까지 뻗다가 그 지점에서 ㄱ자로 꺾여 김대건 신부 동상이 있는 언저리에서 스리슬적 사라진다. 성역화 사업 마스터플랜을 보면 이 길은 곧게 뻗어 성지의 북쪽 출입구와 연결된다. 상징적인 면에서 보자면 이렇게 만들어진 북쪽의 입구는 솔뫼성지의 주 출입구가 돼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마스터플랜 상에서 주차장은 확장부지 서쪽에 마련돼 있다. 그럼 도대체 곧게 뻗은 길의 시작은 무엇일까? 만약 그 시작이 모호하다면 십자가의 길은 걸어갔다 다시 걸어와야 하는 길이 된다.

 

길의 다른쪽 끝부분인 길과 건물이 만나는 부분도 모호하다. 길을 따라 남쪽으로 걸어오면서 보이는 건물은 회색의 노출콘크리트 벽체가 전부다(위 사진). 내부에서 이 벽체의 뒷편에 성당 재단(아래사진)이 있지만 둘의 관계는 조용한 벽체에 의해 막혀 있다. 이용재가 블로그에서 밝힌 설계주제 '침묵의 벽'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인가? 게다가 이쪽으로 관찰자를 이끄는 길은 직선이어서 접근시각에 따른 풍경은 고정된 벽일 뿐이다. 원이 아닌 남북으로 더 긴 타원형 평면은 1845년 김대건신부가 상하이에서 타고 오다 제주도에 잠시 안착했던 라파엘 호의 추상적 표현이라고 한다. 이런 추상적 표현을 좀더 구상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였을까? 건물 주변은 얕은 물로 둘러싸여질 수 있도록 지면보다 낮게 처리돼 있다. 어떤 사이트에서는 솔뫼성지 마스터플랜을 승효상&이로재에서 작성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테마파크처럼 보이는 이 그림을 그가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지금까지 그가 추구해온 생각과 전혀 맞지 않는다. 어쩌면 솔뫼성당의 설계자를 누군가는 승효상이라 하고 건축물대장에서는 길건축이라 하며, 또 언론에 발표된 마스터플랜은 승효상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는 각각의 단편적인 사실들이 현재 솔뫼성지와 성당이 가지고 있는 성지스럽지 않음을 설명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2007년에 발표된 마스터플랜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후 솔뫼 피정의 집을 철거한 자리에 1,200명이 앉을 수 있는 솔뫼 아레나만 새롭게 건립됐다. 그러나 앞서 얘기했듯이 한국의 베들레헴이라 불리는 솔뫼성지는 지역특성화를 위한 더 없이 좋은 아이템이다. 또한, 지금 솔뫼성지의 모습이 그 위상에 걸맞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어떤 모습으로 바뀌든 난 솔뫼성지를 찾은 방문객들이 운명처럼 만들어져 있던 천주교를 어린 김대건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를 공감하고 상상할 수 있는 장소가 됐으면 좋겠다. 내가 종교의 힘을 강하게 믿지 않아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딸보다 어렸던 당시 김대건이 그 운명을 담담하게 평면적으로 받아냈을거라 생각지는 않는다. 오히려 솔뫼성지에서의 김대건은 세례를 받지도 않았다. 그는 1836년 4월 용인 은이 공소에서 모방(Maubant)신부에게 영세를 받았다. 솔뫼성지의 김대건은 천주교가 뭔지도, 자신이 조선인 최초의 사제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성부, 성자, 성령을 읊조리며 순교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을지 모른다.


 

도시설계가 Archur

Archur가 해석하는 도시, 건축.
저서. <닮은 도시 다른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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