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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일(1950.9.15)
인천상륙작전기념관 / 김수근&공간건축(1984)
도시설계가 Archur
2019.09.12

 


7월 27일 개봉한 영화 '인천상륙작전(Operation Chromite)'의 관객수가 700만명을 넘었다고 한다(2016.9.8 영화진흥위원회 제공 자료 기준). 워낙 평가가 엇갈리고 무엇보다 내가 안 본 영화여서 뭐라 말할 수 없기에 이 정도선에서 넘어가고. '1950년 공산세력의 불법 침략으로 위기에 놓인 대한민국을 UN의 깃발아래 목숨을 바쳐 자유 민주주의를 지켜낸 우방국가 젊은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영원히 기리고 그 뜻을 소중히 하기 위하여 6. 25전쟁 당시 전세의 역전에 결정적 계기가 된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던 이곳에 1984년 온 시민의 정성으로 건립'된 곳이 있다. 바로 인천 연수구 청량산 서쪽에 지금은 송도신도시가 된 인천 앞바다를 내려다 보는 자리에 세워진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이다. '1950년~'에서 시작해 '~건립되었다'로 끝나는 저 긴 호흡의 문장은 인천상륙작전기념관 홈페이지에 나온 건립목적이다.



엄밀하게 얘기하면 기념관이 들어선 땅은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됐던 자리는 아니다. 인천상륙작전은 동구 만석동, 현재 대한제분 입구가 있는 곳, 월미도 선착장, 그리고 남구 용현5동 해안도로 입구 이렇게 세 군데에서 이루어 졌다. 하지만 작전이 이루어진 인천 앞바다를 그것도 청량산을 등지고 바라보는 대지는 '특별한 기능을 위한 공간이라기 보다는 기념관 자체가 기념물적인 성격을 가지고자 했던(-제1회~10회 한국건축가협회 수상작품집-)' 건축물의 건립입지로는 최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이곳은 내가 학교를 들어가기 전 부모님과 자주 찾던 유일한 전시시설이었다. 당시에는 갈 만한 박물관, 미술관이 없었다. 이곳에 갔던 기억 중 명확하게 남아있는건 첫 번째 개관 직후의 방문과 두 번째 1987년의 방문이다. 두 번째 방문을 정확한 연도까지 기억하는 이유는 그 해에 김만철씨 일가 11명이 탈북을 하는 사건이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는데 그때 그들의 탈북경로와 물품들을 보여주는 전시회가 이곳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당연히 전시회는 초만원이었다. 당시 북한사람을 아프리카 부시맨 정도로 봤으니 얼마나 큰 볼거리였겠는가? 이후 이곳을 갔던 기억은 없다. 더이상 초등학교 때의 강도로 반공교육을 받지 않은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이 일대에 올 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을 가면 전시실에 6.25전쟁과 관련된 모형 및 설명이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얘기하면 이곳은 6.25전쟁 자체를 기념하는 건물은 아니다. 무엇보다 '전쟁을 기념한다'는 말 자체가 너무 웃기다. 만약 그런 목적이라면 이곳은 6.25전쟁 기념관이 돼야 맞지만 이런 역할은 이곳이 아닌 용산전쟁기념관이 하고 있다. 그보다 이 기념관은 6.25전쟁 중 일어난, 전황을 뒤집을 만한 사건이었던 '인천상륙작전'이라는 행위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 그래서 시설명과 정확히 일치하는 전시내용을 설치하기란 어렵다. 이런 이유로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은 '기념관'이라는 단어를 시설명으로 갖는 다른 '기념관'들 보다 건물 자체가 기념비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기념관은 '어떤 것을 기념하는 공간'이기에 그 공간을 찾는 사람들에게 '기념'하기를 요구한다. 그런데 기념공간을 만든 주체는 그런 요구가 권유의 강도를 훨씬 넘어서기를 원한다(많은 예산이 투입됐으니까). 그래서 약간은 반(半)강제적인 권위를 그 공간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기념관'이라는 명칭이 붙은 시설이 서양 고전주의든, 우리네 한옥의 뻥튀기든, 지금까지 집단이 공유한 시간, 즉 역사성이 강조된 공간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결되게 한다. 건물이 역사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권위'를 갖기 위한 기념비가 되기 위해서는 엄정한 대칭성이 강조된 모습을 띄게 된다. 정확히 얘기하면 단순하게 생각했을때 그렇게 돼야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얘기가 도는 것 같은데 '엄정한 대칭성'은 고전주의 건축의 기본 어휘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도 강한 강도로 어떤 행위를 기념하라고 권유하는 공간이기에 건축물에서는 '권위'가 느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설계자는 강한 대칭성으로 건물에 기념비적 성격을 부여했다. 그리고 건물 외장재도 가벼움 보다 묵직함으로 마치 하나의 비석이나 오벨리스크(Obelisk)처럼 대지를 진중하게 누르는 인상을 주는 화강석이 사용됐다. 설계자가 기념관의 좌우대칭을 강조하기 위해 설정한 축은 기념관 대지에서 남서쪽 서해바다로 향한다(위 사진). 그리고 그 방향성을 강조하기 위해 기념관 전면 T자 교차로에서 '인권로'가 시작된다. 길 이름이 '인권로'다. 6.25전쟁과 그 중요한 한 장면을 기념하는 인천상륙작전기념관, 그 기념관 건설을 위해 건립비용 43억원 중 28억원을 댄 당시 정권(전두환 정권) 그리고 그 앞을 뻗어나가는 '인권로'라는 길 이름은 역사의 역설을 말해준다. 歷史는 逆史인 것 같다. 기념관 홈페이지에는 28억원의 출처를 인천시비로 밝히고 있지만 지방자치제가 실행되지 않았던 당시 시비의 집행과 국비의 집행이 얼마나 다른 과정을 가지고 있었겠는가? 참고로 나머지 15억원은 시민성금이라고 한다.



어릴적 기억에 나름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이 건축물을 한국 근대건축의 대가 김수근이 설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몇 년 안됐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해준 그의 작품집('김수근 건축론', 정인하)에서는 어떠한 해석도 없다. 그러다 전진삼이 인천신문에 연재하는 글(건축탐정AQ)에서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인천상륙작전기념관을 그리다'). 전진삼의 글에서 김수근의 초기 스케치(아래 왼쪽 이미지)를 볼 수 있었는데 그는 '산중턱에 조심스레 놓은 목반(木盤)'이미지를 그렸다. 좌우대칭을 강조하는 기념비 보다는 산 위에 올려진, 눈에 잘 띄는 입지(Site Positioning)를 활용한 시각적 오브제를 목적으로 했다. 물론 이후 목반이미지는 바뀌었다(아래 오른쪽 이미지).


  


김수근은 이 공간이 조성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건축물의 프로그램에서 멀티프로젝션(Multi-Projection)을 이용한 당시 최고의 전시기법을 동원한 영상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건축물 자체 보다는 전시 컨텐츠(Contents)로 승부를 보자는 얘기였다. 이런 생각은 건축공사비를 큰폭으로 증가시키는 원인이 됐다. 하지만 애초 설계자 선정이 현상설계가 아닌 수의계약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설계자 요구에 대한 발주처의 대응은 호의적이었다. 게다가 1980년대 김수근은 1960~1970년대 김수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정부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설계자의 의도가 이와 같았다면 아마도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기념관의 형태보다는 처음 스케치했던 '목반'에 더 가까웠을 지도 모른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건축물과 공간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어릴적 한계단 오르기도 힘들었던 가파른 계단과 그 위에 올려진 탱크와 비행기다. 기념관 최정점에 있는 자유수호의 탑까지 오르는 과정은 고난(?)이었다. 계단의 기울기를 보면 이곳으로 오르지 말라고 하는 듯 하다. 기념관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산자락에 점진적으로 후퇴하며 좌우대칭으로 설계된 전체적인 실루엣(Silhouette)이 인상적이다(위 사진). 마치 청량산으로 하강하는 독수리가 쫙 핀 날개를 아래로 살짝 떨어뜨리는 듯하다. 그리고 자유수호의 탑으로 오르는 계단을 중심으로 양쪽에 펼쳐진 매스는 기념관 뒤에 있는 청량산의 산자락처럼 가운데로 상승한다. 이런 모습을 보고 내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김수근의 다른 작업은 광명시청 서쪽 입면이었다(아래사진). 지금은 가운데 부분이 증축돼서 상층부로 갈수록 상승하는 느낌 밖에 없지만 증축전 광명시청 서쪽 입면의 모습은 마치 날개를 쫙 핀 독수리 같다. 시기적으로 보면 두 건축물은 모두 1984년에 완공됐기 때문에 같은 디자인 언어를 공유했다 봐도 무리가 없다.


 


사실 이런 전체적인 윤곽보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의 이미지를 지배하는 건 건물 전체를 덮고 있는 수평 줄눈이다. 이 줄눈은 김수근 후기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수평띠와 같은 건축언어를 공유하고 있다. 수평띠는 건물 전체를 휘감는다. 대표적으로 역삼동의 르네상스 호텔(1984), 양평군의 코바코(KOBACO)연수원(1983)을 들 수 있다. 다만 두 건물 외장재는 인천상륙작전기념관과는 다른 알루미늄이나 유리패널 등 이다. 기념관 전면을 지나는 청량로와 그 안쪽의 분위기를 달리하고 청량로에서 보이는 기념관 전면의 표정을 단순하게 하기 위해 서쪽 경계를 따라 두터운 담이 놓여 있다(위 사진에서 오른쪽 벽체). 청량로에서 기념관으로 들어가려면 폭이 넓은 아치(Arch)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렇게 진입하면 그 시각 끝점에 자유수호의 탑이 놓여있다(아래사진). 어릴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오를 엄두는 나지 않는다. 아치 아래에서 한 단을 오르면 야외전시장에 탱크와 전투기 그리고 미사일 등이 전시돼 있다. 이 야외전시장을 앞마당으로 뒤쪽에 4개 매스가 두개씩 대칭을 이루며 단단 배치돼 있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산 위에 올려진 기념비'다. 기념관의 입지(Site Positioning)와 그 건물이 담고 있는 프로그램, 건립목적을 고려해 보면 역시 김수근이 설계한 남산의 자유센터가 떠오른다. 그런데 자유센터는 김수근의 1964년 作이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에 비하면 20년 전의 작업인 셈이다. 20년간 김수근의 작품 스타일은 당연히 변했다. 1970년대 적벽돌 건축을 지나 김수근은 1980년대 또 다른 작품 경향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가 현대건축의 제3세대에 속했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했든 1970년대 추구했던 조적을 통해서는 이후 맡게 되는 규모가 큰 건축을 처리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했든 어찌됐든 1980년대 들어 그의 건축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선후를 따지기는 힘들지만 이후 국립진주박물관(1984)과 국립청주박물관(1987) 설계를 맡게 된다. 이 중 내가 직접 본 국립청주박물관과 비교해 보면, 국립청주박물관도 우암산을 등지고 있다. 그리고 두 건축물 모두 매스에는 수평줄눈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국립청주박물관은 '기념관'이 아닌 '박물관'이기에 건축물 자체가 갖는 기념비성은 없다. 그래서 국립청주박물관은 우암산의 산세를 따라 얌전히 앉혀 있다(아래사진).



국립청주박물관 보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는 당시 김수근의 작업은 기념관이 완공된 1984년에 작업한 예술의 전당 현상설계 제안(위 이미지)이다. 김석철이 최종 설계자로 선정된 예술의 전당은 우면산을 등지고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기념관과 같이 T자 교차로에서 반포대로가 북쪽으로 뻗어나간다. 방향만 달랐지 예술의 전당이 갖는 입지조건은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이 앉혀진 입지조건과 거의 같다. 김수근은 예술의 전당 설계안(아래 이미지)에서도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에서 처럼 여러개의 매스를 나누고 건축물의 배경이 되는 우면산 산자락에 맞춰 매스의 지붕 끝선을 잡았다. 다만 예술의 전당에서 요구하는 연면적이 훨씬 컸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기념관보다 더 많은 총 5개의 매스가 북쪽에 3개, 남쪽에 2개씩 가운데 중심축을 사이에 두고 배치했다.



예술의 전당 건물 입면에도 수평 줄눈이 전체적으로 새겨져 있다(위 입면도 참고). 그런데 예술의 전당 매스는 인천상륙작전기념관 매스의 입면 줄눈에서 한단계 더 나아가 매스 자체가 수평 띠처럼 분절돼 있다. 이렇게 분절된 매스는 평면적으로 뿐만 아니라 입체적으로도 나뉘어져서 서서히 올라가는 우면산의 지형에 맞춰 더 다이나믹(Dynamic)하게 느껴진다. 요약해 보면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입면에서 수평줄눈을 통해 매스를 층지도록 나눠 산능선에 올려진 매스에 대한 실험을 예술의 전당에서는 평면과 입면 매스 자체를 분절시키는 방향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발전은 김수근의 1980년대 건축언어에서 부터 시작된 건 아니다. 그는 1960년대부터 '나눔'이라는 건축언어를 생각했고 발전시켜 왔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은 대지면적 24,347㎡에 연면적은 1,793㎡로 시설규모가 큰 편은 아니다. 하지만 청량산을 등지고 송도 앞바다를 내려다 보이는 입지(Site Positioning) 때문에 더불어 완전 대칭인 건축 형태 때문에 꽤 큰 규모의 시설처럼 인지된다. 이에 반해 반공교육 뿐만 아니라 6.25에 대한 역사적 사실 그리고 통일에 대한 생각도 최근 우리에게는 그렇게 강조되고 있지 않다. 게다가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이 있는 송도 일대는 모텔과 음식점 그리고 이제는 폐쇄된 송도유원지만 남아 있어서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한 동네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기념관이 바라보는 곳이 바다에서 간척지로 그리고 다시 인천경제자유구역 송도지구가 되면서 다시 주목받을 기회가 생겼다. 마치 천안함과 연평도 포격 사건 그리고 며칠 전 핵실험 등으로 반공교육, 북한과 통일에 대한 인식이 다시 바뀌듯이. 이런 여러가지 변화 속에서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은 어떻게 자리잡을 수 있을까? 기념관이 완공될 당시 반공과 6.25 그리고 통일에 대한 생각이 30여년이 지난 지금 상당히 바뀌었듯이 기념관도 변화된 주변 환경 속에서 변화되어야 할 것 같다. 아마도 그런 변화가 영화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평가도 극과 극으로 나누는 것이라 생각된다. 어찌됐든 어떤 변화를 받아들이기에는 청량산을 등지고 펼쳐진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의 좌우대칭이 너무 경직돼 보인다.


 

도시설계가 Archur

Archur가 해석하는 도시, 건축.
저서. <닮은 도시 다른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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