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공간 속에서 살아간다. 살면서 각자의 필요에 따라 많은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래서일까? 공간이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종종 잊힌다.
건축가는 공간을 다루는 일을 한다. 쉽게 얘기하면 좋은 공간을 계획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난 공간에 관심이 많다. 일종의 직업병이랄까. 그 공간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한다.
건축가가 공간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하니, 연상하는 글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지면을 빌어 하고자하는 이야기는 바로 ‘비어 있는 사이’ 즉, 공간(空間)에 관한 이야기다. 때로는 건축가라는 직업에 따른 공간일 수 있고, 비어 있는 시간에 혼자 보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비어 있는 사이’에는 물리적 공간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쉽게 얘기해서 건축가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이야기 정도라 할 수 있겠다.
멋진 신세계, 휴거?
1932년에 출간된 ‘멋진 신세계’는 영국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의 대표적인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멋진 신세계’의 사람들은 런던 중앙 인공부화국에서 부화된다. 한꺼번에 태아 수천이 병 속에서 부화되며,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 병에서 나와 보모들에 의해 양육된다. 이들은 알파ㆍ베타ㆍ감마ㆍ델타ㆍ입실론의 다섯 계층으로 나뉘는데, 알파는 두뇌가 우수한 계층으로 지배계층인 엘리트 계층, 베타는 행정업무를 맡는 중간 계층, 감마는 그 외의 허드렛일을 하는 하류층, 입실론은 유전자 조작에 의해 단순노동만 할 수 있는 계층이다.
이들은 날 때부터 자신의 신분에 맞는 행동을 하게 태아 때부터 조건반사ㆍ수면암시 교육을 받는다. 일종의 세뇌인 셈이다. 결혼으로 정해진 파트너와만 성관계를 갖는 것과 이로 인한 자연스러운 임신과 출산은 추잡한 개념이 돼있는 사회다. 태아 때부터 그 사람의 삶이 결정되는, 이른바 요즘 회자되는 ‘수저론’의 끝판 왕다운 사회인 셈이다.
모든 쾌락과 정보를 누릴 수 있지만, 오히려 넘쳐나는 정보와 유혹에 둘러싸여 올바른 것을 선택하지 못하는, 그래서 역으로 통제당하는 사회인 ‘멋진 신세계’는 빅브라더의 완벽한 통제와 공포정치를 보여주는 조지 오웰의 ‘1984’와는 다른 의미의 디스토피아다.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넘어와 보자. 금수저ㆍ흙수저 얘기는 이제 모두 다 아는 얘기가 됐지만, 새로운 계급사회를 풍자한 말들은 계속해서 발명(?)되고 있다.
요즘 초등학생들이 많이 쓰는 말 중에 ‘휴거’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흔히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종교와 관련한 ‘휴거’일 테지만, 요즘 초등학생들의 ‘휴거’는 전혀 다른 말이다. ‘휴거’는 한국토지주택공사의 임대아파트 브랜드인 ‘휴먼시아’와 ‘거지’라는 말의 합성어로 ‘임대아파트에 사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일정 규모 이상의 아파트를 지을 경우, 전체 세대의 몇 퍼센트를 임대아파트로 조성하게끔 돼있다.
1978년에 40% 이상 공급하게 규정한 것을 시작으로 1980년대엔 주택경기 활성화 정책의 일환으로 폐지됐다가 1990년에 다시 시행하면서 지역에 따라 차등적용하게 됐고, 1990년대 후반 IMF를 겪으면서 다시 폐지됐다가 2000년대 초반에 다시 부활됐다. 그리고 2014년 2월 다시 폐지에 준하는 법 개정(의무비율을 0~15%에서 지방자치단체장이 정함)으로 인천이 처음으로 임대아파트 공급비율 0%를 시행했다.
서울의 어떤 아파트단지는 임대아파트로 조성된 동을 울타리 쳐 다른 동들과 분리했고, 출입구(사람과 차 모두 해당)와 심지어 주소조차도 분리했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적응하기 힘든 속도로 ‘멋진 신세계’로 변하는 것 같아 씁쓸할 따름이다.
공간으로서 나
위의 두 사회에서 인간은 계급적 존재다. 힘과 부(富)를 가진 정도에 따라 줄을 세운다는 얘기다.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은 무리 안에서 자신이 가진 힘의 정도에 따라 할 수 있는 행동 범위와 순서가 결정된다. 이는 먹이가 같은 종끼리 무리를 지어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본능이다. ‘본능적이다’라는 말을 ‘동물적이다’라는 말로 치환할 수 있다면, 계급이 점점 더 공고해지는 인간사회도 역시 동물적일 수밖에 없다.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계급이 중요하지 않았던 적이 과연 있었는가? 단 한 번도 없다.
그렇다하더라도 ‘계급에 따라 서열을 매기는 것이 본능이라면, 삼국시대나 조선시대에도 금수저니 흙수저니 휴거니 하는 말이 있었을 것 아닌가. 요즘 유별난 것도 아닌데 그리 비틀어 생각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조선시대까지는 씨족 사회였다. 즉, 한 마을이 한 집안이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마을을 공간으로 봤을 때, 가장 바깥쪽에는 소작농ㆍ일꾼 등이 살았고, 안쪽으로 갈수록 그 마을에서 위치가 높은 사람이 살고, 가장 깊숙한 곳에 그 마을의 가장 어른이자 유지가 사는 구조였다. 그런 사회에서는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계급은 명확하다. 일부러 드러내지 않아도 되던 때다.
하지만 공동체가 무너지고 개개인으로 파편화된 요즘 계급적으로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것들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의 값어치가 됐고, 그 중에서도 내가 혹은 우리 가족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 바로 집이 그런 것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주는 도구가 됐다. 특히, 요즘 우리나라에서 중산층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공간적 기준은 바로 아파트인데, 아파트에 사는지 빌라에 사는지는 생활수준을 유추하는 데 굉장히 유용한 도구가 된 지 오래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랑 같은 계급으로 비쳐질 수 있는 같은 아파트단지 내 임대아파트를 참지 못하는 것이다.
집이라는 공간이 나를 잘 드러낼 수 있다면, 나와 닮은 공간이라면, 단순히 주거형태만으로 줄을 세우고 계급을 결정하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과연 ‘무슨 아파트 몇 평’이라는 공간으로 나를 남과 구분할 수 있을까? 자이아파트 30평과 래미안아파트 60평은 크기 이외에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간적 특색을 갖고 있는가? 이런 물음을 던져야하지 않을까?
내 정체성을 나타내는 공간이라는 것이 단순히 방이 몇 개 있다는 것에 달려있지는 않다. 내가 담겨 있는 공간이라는 것은 방의 개수나 크기가 아니라,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내 삶의 어떤 부분을 담아내는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것이 내 집의 방과 윗집이나 아랫집의 방이 다른 공간인 이유다.
[출 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