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종교가 중심인 도시가 아니다. 서울에 조선의 수도를 결정한 태조 이성계도, 그리고 그가 건국한 나라 조선도 모두 종교를 국가의 근간으로 삼지 않았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이라 했지만 조선이 숭상한 유교는 유학을 종교적인 관점에서 이르는 것임에도 그 전까지 숭배해왔던 불교와는 달랐다. 근본적으로 "불교는 천국의 철학이고 유학은 인간의 철학"이었다《이중톈, 사람을 말하다, 이중톈, 중앙북스》. 한양의 기본공간구조의 원칙이 되었던 주례고공기에 나온 "전조후시 좌묘우사前朝後市 左廟右社"에서도 도시를 대표하는 종교시설에 대한 언급은 없다. 묘廟와 사社가 왕의 조상과 지신地神을 위한 시설이기는 하지만 종교의 수준은 아니었다. 인왕산의 국사당이나 지금은 흔적도 없는 도성내 사찰을 언급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중세유럽의 도시처럼 랜드마크Landmark의 개념으로서의 종교시설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종교시설은 물리적이 됐든 비물리적이 됐든 비중있는 역할을 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1800년대 후반까지는 그랬다.
종교시설이 비중있는 역할을 하지 않았던 서울에 그 동안 물리적, 비물리적으로 중심의 역할을 해왔던 종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종교들은 자신들이 해왔던 방식대로 서울에 각 종교를 대표하는 건축물을 지었다. 포문은 천주교가 열었다. 1891년 서소문 밖 당시 수렛골이라 불렸던 언덕에 약현성당(Eugene Coste, 1891, 위 사진)을 세웠다. 그리고 7년이 지난 1898년에 대한민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아이콘Icon 명동성당이 건립됐다. 같은해 신교新敎에 해당되는, 미국에서 넘어온 감리회에서 정동제일교회(吉澤友太郞+심의석, 1898, 아래사진)를 지었다. 장로회의 첫 번째 교회는 1887년 설립된 새문안교회다. 하지만 현재 새문안교회 건물은 1972년에 지은 것이다. 정동제일교회는 규모면에서 명동성당의 비교대상이 안 된다. 그래서 현재 서울을 대표하는 서양식 종교시설은 명동성당이다.
그런데 명동성당이 서울에서 이런 역할을 떠맡게 된 이유는 설립 이후 우리사회에서 천주교의 활동이 더 큰 역할을 했겠지만 그 외에도 시각적으로 쉽게 인지되는 땅에 지어졌다는 이유도 있었다. 서울에서 명동성당이 시각적으로 잘 드러나 있었다는 얘기다. 실제 명동성당 건립 30년 후인 1921년에 천도교 중앙대교당(위 사진)이, 그리고 다시 5년 후인 1926년에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이하 서울대성당)이 지어졌다. 하지만 이 두 종교시설은 존재 자체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인지성이 떨어졌었다. 그러다 2015년 5월 11일, 서울시는 <세종대로 일대 역사문화 특화공간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남대문 별관과 대한성공회 신관을 철거하고 광장을 조성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남대문 별관도 1937년에 준공된 근대건축물이지만 광장을 조성하는 것이 이 일대 "역사성을 회복하고 근대 서울의 풍경을 복원하는 방안"이라고 봤다. 그렇게 서울대성당은 명동성당 보다 더 눈에 띄는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올(2017년) 5월 2일은 서울대성당이 헌당된 지 91년이 되는 해다.
성공회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곳은 강화도였다. 초기 성공회는 강화도를 갑곶이를 중심으로 한 북부와 온수리를 중심으로 한 남부로 나눠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1900년에 준공된 강화성당(Mark N.Trollope+Charles J.Corfe)과 1906년에 준공된 온수리성당(Mark N.Trollope)은 그 흔적이다. 성공회의 한양 입성은 1892년 선교사들이 현재 터(정동 3번지)를 매입하면서 시작됐다. 한국 성공회 초대주교였던 Charles J.Corfe는 당시 대지에 있던 한옥에 십자가를 매달아 '장림성당'이라 명하고 예배를 시작했다. 1911년 부터 제3대 주교인 Mark N.Trollope주교는 성공회의 입지를 더 견고히 하고자 성공회 서울대성당의 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착공은 그보다 11년이나 지난 1922년에 이루어졌다. 그나마도 일제의 물자동원령 등으로 인해 자재조달이 힘들어서 1926년에 미완성 상태로 준공됐다. 구체적으로 원래 계획했던 라틴 크로스Latin Cross평면에서 트랜셉트Transept와 꼬리부분을 떼어낸 짧은 一자 평면으로 마무리됐다(아래사진). 규모도 원래 계획은 990㎡였으나 532㎡만 지어야 했다. 1926년 5월 2일, 헌당식때 성당의 이름은 'St. Mary and Nicholas'였다.
설계자는 Arther Dixon은 비록 미완성으로 부분 준공을 했지만 설계는 최종 완성본을 염두해 두고 했다. 전체적으로는 로마네스크 양식이었지만 조선의 전통건축 양식을 수용하려는 노력이 있었다는게 전반적인 평가다. 물론 이 노력에 대한 논란은 아래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성공회 서울대성당 건립 이전에 지어진 성공회 성당 -강화성당(1900), 온수리성당(1906), 진천성당(George Hewlett, 1923)-과 이후에 지어진 성당 -청주성당(Cecil Cooper, 1935)- 이 모두 한옥성당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수용하려는 노력과 의지는 분명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성공회 서울대성당을 두고 서양의 로마네스크 양식이 우리나라의 전통건축 양식과 가장 잘 혼합된 근대건축이라는 평을 내린다. 성공회 서울대성당이 지어졌던 시기에 건설된 서양 양식의 건축물들은 대개 자국의 양식을 가능한 따르려 했다. 양식의 변형은 시공상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함이었지 우리나라의 전통건축 양식과의 혼합을 위한 시도는 아니었다. 종교시설로 범주를 한정해도 구교로 일컬어지는 천주교 건물은 고딕양식Gothic Style이 주류였다. 서울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지어진 천주교 성당은 마카오Macau의 파리외방전교회 주도로 지어졌다. 그래서 당시에 지어졌던 "천주교 성당은 양식 사조에 대해 높은 집중도를 보여주며 프랑스 특유의 형식주의 품격을 보여준다. 구석구석 잔손을 많이 가해 어디 한 군데 서툴게 놔둔 곳이 없다."《사회미학으로 읽는 개화기-일제강점기 서울건축, 임석재,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이런 상황에서 천주교와는 다른 성공회가 자신들의 본부가 될 서울대성당을 건립하려고 했을때 고딕은 건축양식으로 택할 수 있는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여기에 앞서 언급한 것 처럼 성공회가 서울대성당 건립 이전과 이후에 지었던 다른 성당들에서 전통건축의 요소가 발견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성당이 로마네스크 양식을 기반으로 전통건축 양식을 적절하게 섞은 것으로 보는 견해는 타당해 보인다.
몇몇 사람들이 성공회 서울대성당을 해석한 내용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우선 성공회 서울대성당은 '종합절충형 로마네스크 리바이벌Revival 양식'이다. '종합절충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로마네스크 양식만 따져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양식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임석재의 글 《사회미학으로 읽는 개화기-일제강점기 서울건축, 임석재,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을 보면 우선 프랑스 로마네스크의 특징은 "라틴 크로스 평면, 화강석 재료, 트랜셉트와 동쪽 외진 성직자 영역에 반원형 채플Chapel 등"이다. 독일 로마네스크의 특징은 "크고 작은 육면체 덩어리를 덧붙여 기하학적 구성을 한 점, 붉은 벽돌을 섞어서 장식 효과를 낸 점"이다.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양식은 "캄파닐레Campanile로 볼 수 있는 첨탑을 붙인 점"이다. 실내에서는 "다발 기둥 없이 단일 기둥 열을 세운 점, 석조 볼트Vault가 아닌 목조 트러스Truss로 천장 구조를 짠 점, 네이브 월Nave wall의 창 구성을 삼분법이 아닌 이분법으로 한 점" 등으로 볼 때 독일 로마네스크 양식이 지배적이다.
여기에 전통건축의 요소들이 융합돼 있다는 해석을 하는 이유는 처마 장식, 창살 문양, 스테인드 글라스 색Stained Glass Color, 지붕 기와에서 전통건축의 특징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처마의 경우, 길이는 로마네스크 양식을 따랐지만 처마와 만나는 몸통부분에 처마를 받치는 지지부재를 장식요소로 활용해서 붙인 점 등은 정통 로마네스크 수법이 아니라 전통건축의 공포 구조에서 빌려온 모티브Motive라는게 임석재의 해석이다(위 사진). 창살의 분할도 한옥 창살 형태를 따랐고 스테인드 글라스의 색은 음양오행설에 따라 다섯 방향을 나타내는 노랑, 파랑, 하양, 빨강, 까망의 다섯가지 한국 전통색인 오방색을 적용한 것으로 간주한다(아래사진).
구본준은 조금 더 자세하게 서울대성당의 지붕과 기와에 동서양이 공존한다고 썼다. 구체적으로 "성공회 성당의 지붕을 보면 윗부분은 서양식 빨강 기와들이다. 그러나 아래쪽에서 올려다볼때 먼저 눈에 들어오는 낮은 지붕들은 한국 전통 기와를 얹었다. 그리고 중간 벽에 반쪽만 나온 지붕들은 정자 건물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임지붕이다. 한 건물에 동서양 지붕과 기와가 공존하는 것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바로 옆 한옥들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위 옛날사진 참고). 지붕 뿐 만이 아니다. 자세히 보면 지붕 아래 돌 장식들도 모두 한국식 처마 디자인이다. 이 성당이 서양 로마네스크식 건물이면서도 이질감 없이 서울의 풍경 속으로 녹아든 이유는 이렇게 구석구석 한식과 로마네스크식을 섞은 융합 디자인을 적용한 데에 있다."고 썼다. 하지만 구본준은 이 건물이 진정 아름다운 이유는 형태와 디자인에만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다른 건물에는 없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깃들어 있기에 더 아름답다. 한국 건축사에 길이 남을 그 이야기는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비로소 만날 수 있다. (성공회 서울 대성당의 내부는) 결코 화려하지 않다. 대신 단아하다. 하얀 벽과 갈색 나무 구조가 단순하다. ...(중략)... 이렇게 차분하게 사람을 배려하는 건축, 튀기보다 함께 어울리려는 건축은 실로 드물다."고 평했다《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 서해문집》.
종교건축에서는 상당한 권위를 지닌 김정신도 성공회 서울대성당의 건축양식을 두고 "전형적인 앵글로 노르만 양식Anglo-Norman Style의 건물이지만 매스의 위계적인 조합과 처마의 서까래 장식, 전통 격자 창살문양, 한식 기와지붕, 스테인드 글라스의 오방색 등 한국 전통 건축 요소를 섞어 씀으로써 한국적 스테일과 풍토에 잘 어울리는 훌륭한 건축물이다."《역사, 전례, 양식으로 본 한국의 교회건축, 김정신, 미세움》라고 평했을 만큼 본 건물은 서양양식과 전통양식이 잘 혼합돼 있다는 것이 한국 건축계의 전체적인 평가다. 하지만 성공회 서울대성당의 건축양식을 다르게 해석하는 논문도 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낭만주의 건축운동과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이정구, 월간 건축인 Poar2001.05>이다. 이 논문을 쓴 이정구는 한신대 대학원에서 교회사를 전공하고 영국 버밍엄 대학교에서 <건축학적으로 본 성공회Architectural Anglicanism>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현재 성공회 사제다. 그의 논문을 정리하면 이렇다.
애초 성당 건축을 주도한 Trollope가 옥스퍼드대학 출신으로 '옥스퍼드 운동The Oxford Movement'의 계승자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가 서울대성당의 건축 양식으로 원했던 건 로마네스크가 아닌 네오-고딕Neo-Gothic이었을 확률이 더 높다. 옥스퍼드 운동은 "1833년 당시의 신 과학과 리버럴리즘Liberalism이 교회의 신앙을 파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들에 대항하고자 옥스퍼드 학부 학생들과 신학자들이 모여 논문을 통해 과거 중세기 로만 카톨릭과 성공회의 전통성과 연속성을 강조하던 운동이다. 이들은 'Tracts for the Times'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트랙타리안Tractarians'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특히 예전과 교회건축에 관심이 깊어 전통적인 성공회 공도문《Book of Common Prayer of the Anglican Church》을 고집하고 예전에서 설교보다는 성사Sacrament에 더욱 관심을 지녔던 그룹"이다. 그런데 자신도 트랙타리안으로 불린 Trollope가 성공회 서울대성당의 건축 양식을 네오-고딕이 아닌 로마네스크로 선택한데에는 건축물을 설계한 Dixon의 설득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실제 Trollope는 자신이 다녔던 랜싱 칼리지Lancing College의 예배당이 서울대성당의 건축적 모델이 되기를 원했지만 "돌로 건축한다는 것은 경비가 너무 많이 들고 무엇보다 낮고 긴 건물을 밖에서 볼 때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Dixon의 조언을 따랐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Dixon은 Trollope에게 "로마네스크 양식이 고딕보다는 덕수궁 터의 스카이라인에 어울리고, 경비가 적게들며, 한국의 성공회 선교 초기를 상징하듯이 서양 초대교회의 순수하고 단순함을 담은 이 양식이 적합하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로마네스크도 고딕 양식 만큼이나 중세 유럽을 대표하는 건축 양식이다.
그렇다면 로마네스크 양식을 추천한 Arther Dixon은 어떤 건축가였을까? 1856년 버밍엄의 에지바스턴Edgbaston에서 태어난 Dixon은 하원의원과 버밍엄 시장을 엮임한 George Dixon의 장남이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1929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때까지 영국 왕립건축가협회The Royal Institute of British Architects의 회원이었다. Dixon은 버밍엄의 한 보험회사 'The Eagle Insurance Company(1900)'를 건축했던 William Richard Lethaby(1857~1931)의 영향을 받고 그가 이끌었던 비잔틴 리서치 그룹Byzantine Research Group에 참여하기도 했다. William Richard Lethaby는 John Ruskin의 이념에 동조한 건축가로 미술공예운동The Arts and Crafts Movement의 추종자로 분류된다. 즉, Dixon도 수공예작업을 중시했던 미술공예운동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실제 그의 주요작품은 St.Andrew's Church(1910, Barnt Green), St.Basil's Church(1911, Deritend Birmingham), Chapel of the Grey Ladies(1913, Coventry), Bishop's Chapel at Bishopscrobt(1924, Harborne) 등인데, 이 중 수공예 작품으로 비잔틴 재단 모자이크Byzantine Altar Mosaic가 있다. 본 작품은 Dixon의 추천으로 미국인 George Jack이 시칠리아 체팔루Sicilia Cefalu성당 모자이크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George Jack은 영국으로 이주하여 Philip Webb의 런던 공방에서 건축을 공부를 하고, William Morris의 공방에서 가구 디자인을 하다 후에 William Richard Lethaby와 함께 London Central School of Arts and Crafts에서 교수로 일을 했던 사람이다. 이 George Jack이 1938년 성공회 서울대성당 재단의 모자이크(위 사진) 작업을 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Dixon이 Trollope가 한국 주교로 부임하기 전까지 사목이었던 버밍엄의 세인트 올번스의 교회위원을 역임했을때 시작됐다. Dixon은 성공회 서울대성당의 설계를 맡고 두 차례나 조선을 방문했었다. 조선 방문때 Dixon은 《조선과 건축(1927)》이라는 잡지와의 인터뷰를 했는데, 당시 "옛 건축은 그것이 건축된 시대에 진정한 생명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사멸되어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현대건축은 옛 건축을 복사하여 보여주는 것 같다. 사회적 조건의 변화와 사회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건축은 무의식적으로 자리하게 된다. 건축가는 자신의 노력을 바탕으로 옛 것 중에 하나 혹은 두 개를 선택하여 참고하게 된다. 그런데 Trollope 주교는 로마네스크 건축을 선택하였다. 이 양식은 초기 기독교시대부터 12세기 초엽까지 유럽에 널리 퍼져 있던 양식인데 특히 동방 오리엔탈 양식이 부가된 로마네스크와 비잔틴 건축과의 관계는 꼭 형제와 같은 것이다"고 했다 <조선성공회 건축에 관하여, 조선과 건축(1927)>. 여기서 새로운 건축 -서울대성당을 의미- 으로 자리하게 만드는 '사회적 조건의 변화와 사회의 요구'는 결국 자신의 조언을 들은 Trollope의 선택이다. 이에 대하여 이정구는 "주교가 선택한 로마네스크는 중세 유럽의 양식으로서 한국 사회의 요구에 대한 표현이 아닌 영국사회 혹은 영국인 주교와 수공예운동가의 개인적인 한국에 대한 문명화, 서구화에로의 요청이었다"라고 해석한다. 즉, 성공회 서울대성당 설계시 의뢰를 한 Trollope와 설계자 Dixon은 한국 건축가들이 흔히 해석하듯 서구 로마네스크 양식에 한국 전통건축 양식을 적절하게 섞고자 하는 생각이 크지 않았거나 없었다는 걸 의미한다.
건설비 뿐만 아니라 성당내 성물들은 영국으로부터 봉헌을 받아 Dixon의 검열을 통해 성당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이정구는 "서울대성당은 고故교회에 적합한 영국의 미술공예 제품이 수장되어 있는 한국의 유일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장의 근거는 제단 모자이크와 지하성당Crypt에 안치된 Trollope의 동판 브라스Brass, 십자가와 촛대, 종으로 이는 모두 영국 미술공예운동에 의한 대표적인 산물들이다. 이정구는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은 산업화의 흐름에 반하여 손으로 직접 만든 물건에 대해 예술적 가치를 부여했다는데 의미가 있는데, 그 물건에 한국의 건축과 수공예품은 제외됐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산업화의 흐름에 반한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이 정작 한국에서는 산업화, 서구화, 기독교화라는 소위 유럽인들이 주창하는 문명화의 일환으로 안치됐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정구가 주장하는 더 큰 문제는 "미술공예 건축물과 성물들을 통해 영국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과시했고 예배공간마저 통제하고 지배했던 것"이다. 그 결과 "한국 성공회는 토착화의 기회를 상당기간 놓치게 되었고 현재 새로 건축되는 교회건축양식, 성물, 예전에 이르기까지 영국의 옥스퍼드운동과 미술공예운동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고 평했다. 초기 한옥으로 지어진 성공회 성당을 두고 성공회의 '토착화 정신'이라 보는 건축계의 견해와는 상반된다.
2015년 10월, 서울시는 광장 조성을 위한 당선작으로 터미널 7아키텍트Terminal 7Architects의 '서울 연대기Seoul Chronicle'를 선정했다. 설계자는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은 지상의 다양한 높이가 있을 뿐 아니라 지하에도 유적, 지하구조물, 기반시설이 존재하는 깊이가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건축적 장치로 파편화된 역사적 사건들을 순서대로 나열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도시의 파편화된 기억은 도시 이야기가 되어 '서울 연대기'로 쓰여질 것"이라고 설계 개념을 설명했다. 그런데 광장을 1개층 높이로 올린 당선작에 대해 "바로 옆 인도를 지나는 시민들이 성당을 바라보는 시야를 막는다"는 비판이 제기됐다<'성공회성당-서울시 '도시미학 협력'흔들', 한겨레, 2015.12.15>. 역사적 건축물 주변에 삽입되는 새로운 조직 -신축 건물을 포함한 설치물 일체- 에 대해서는 언제나 말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정작 중요한 역사적 건축물에 대한 이야기는 점차 논의의 초점에서 흐려진다. 새로운 조직을 삽입하는지 그 처음의 목적, '역사문화 특화공간'이란 무엇인지를 조금씩 망각하고 새로운 조직 그 자체에 대해서만 논쟁을 벌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