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실린 시들은 아마도 시험 준비를 위해 외워야 했기에 한두 구절 정도는 읇조릴 수 있다. 그런 시 중에는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도 있다. 대개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와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가 가장 머릿 속에 남아 있는 문구라 생각된다. 국어시험은 "밑줄 그은 부분에 해당되는 사자성어를 고르시오", 혹은 "마지막 문장에 해당되는 한자어를 고르시오"정도 였다.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에서 태어났다. 당연히 홍성에 가면 그의 생가라고 하는 초가집 한 채가 세워져 있다(결성면 만해로318번길 83). 한용운은 1905년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출가했다. 그의 나이 26세 때의 일이다.
한국 불교의 개혁을 주장했고 《불교대전(1914)》, 불교잡지 《유심(1918)》을 발간하기도 했던 한용운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1919년 삼일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다. 이 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고 1921년 12월 21일 석방됐다. 스님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한용운은 근대적 시인이자 저항시인으로도 평가 받는다. 이런 평가의 가장 큰 근거는 1926년 5월 20일 출간한 《님의 침묵》이다. 시집에는 한용운의 또 다른 대표작인 <알 수 없어요>, <복종> 등을 포함해 총 88편의 시가 수록돼 있다. 55세가 되던 1933년 부터 1944년 6월 29일 까지 그는 심우장에 머물렀다. 한용운은 자신의 첫 시집인 《님의 침묵》을 백담사에서 썼다. 백담사는 우리나라의 전 대통령 중 누군가가 머물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한용운과 더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2003년 백담사 인근에 문화, 숙박, 수련시설이 복합된 만해마을이 개관했다. 완공 당시 만해마을의 대지면적은 17,450㎡이었고 연면적은 6,858㎡였다. 후에 대지 북동쪽 끝에 설악관과 금강관(舊 만해 청소년관, 연면적 3,123㎡)이 추가돼 현재는 7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지는 백담사에서 북서서쪽으로 4.3km 가량 떨어져 있다. 그래서 한용운과과 만해마을 땅은 직접적이지 않은 언저리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대지 선정 당시 설계자 김개천은 건축주와 논의하여 백담사 초입에 세 군데 후보지 중 이곳을 선정했다. 대지 동쪽으로는 만해로가 S자로 지나가고 반대편 서쪽으로는 북천이 흐르고 있다. 만해로와 북천이 양쪽으로 좁혀 들어오는 대지의 동서길이는 100m가 채 안되지만 남북길이는 380m 정도다. 이런 상황 보다 방문자가 대지에 섰을때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땅을 둘러싼 산山이다.
설악산 서쪽에 위치한 대지는 매봉산-마산-응봉-안산-명당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로 인해 대지 남쪽으로 나 있는 '경절문(준공 당시 명칭은 '대이문')'에서 북서쪽으로 쭉 뻗은 길(가운데 길, 위 위성사진 참고)이 있고 그 양쪽으로 시설들이 툭툭 배치돼 있음에도 그 길이 강한 축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얼핏 생각하면 만해마을의 주제가 한용운이고 그의 배경에 불교가 있기 때문에 만해마을의 배치가 전통 사찰건축의 내향적, 점층적 공간을 닮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설계자가 그렇게 하고자 했다면 경절문을 사찰의 일주문으로 보고 만해마을을 관통하는 가운데 길 끝에 본당 역할을 하는 어떤 시설을 배치할 수도 있었다(아마도 서원보전이 본당 역할을 했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김개천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운데 길은 대지 북서쪽 끝에 배치된 만해문학박물관 앞에서 흐지부지 끝나 버린다(아래사진).
애초 만해마을을 관통하는 가운데 길은 사찰건축에서 본당으로 꽂히는 축의 역할을 맡지 않았다. 만해마을의 가운데 길은 대지의 형태에 맞춰 북서-남동방향으로 길게 만들어졌을 뿐 어떤 것을 상징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길 양쪽으로 툭툭 배치된 4개의 건물(문인의 집, 만해학교, 서원보전, 만해문학박물관)과 2개의 외부공간(님의침묵광장, 만해평화지종-아래사진)은 그 길로 연결되고 이어질 뿐 어느 것 하나 위계가 높고 낮음이 없다. 이제 만해마을로 들어서는 문의 이름이 왜 '경절문(徑截門; 불교 수행시 단계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인위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마음을 터득하여 바로 부처의 경지에 오르게 하는 법문)'인지 알 것 같다. 만해마을 전체가 본당인 셈이다. 그리고 이곳을 찾는 방문객은 절경문에 이르는 순간 이미 만해마을로 굽이 굽이 -어느 방향이 됐든- 들어오면서 일주문-천왕문-불이문을 거쳐 온 것이다.
만해마을의 모든 시설보다 높은 위계를 갖는 건 만해마을을 둘러싼 산 뿐이다. 가운데 길에서 어느 시설, 어느 외부공간을 보든 그 배경에는 산이 있다. 오히려 이 상황에서 한쪽의 방향성을 강조하는 강한 축을 둔다는 것 자체가 억지스럽다. 이런 면에서 보면 만해마을은 다방향인, 어떤 축도 없는 공간이다. 그럼에도 서원보전(준공 당시 명칭은 만해사, 연면적 239㎡, 위 사진)은 종교시설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중심이 될 수 있다. 이를 감안하여 설계자는 서원보전을 2x3으로 나뉘는 영역에서 가운데에 두었다. 그렇지만 서원보전이 만해마을에서 어떤 위계도 만들어내지 않게 하기 위해 건물 전면으로 '님의침묵광장(면적 900㎡)'이라는 외부공간을 두었다. 이 공간에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단상 외에 어떤 시설도 없다. 하지만 만해마을의 어떤 영역보다 이 영역은 산으로 충만되어 있다(아래사진). 빈 공간이 가장 충만할 수 있다는 것, 김개천의 말을 빌리면 "한정된 모습과 고정된 실체로서의 건축과 공간이 아닌 변화하며 이어지는 생명의 실상인 공空의 모습으로 무한생명을 위한 무한 공간을 추구하는 것(-Words from 김개천, Focus: 명묵의 건축, Article: Less but More, 이성민, 월간 플러스2006.04-)"을 님의침묵광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개천은 설계를 시작함에 있어 발주처라 할 수 있는 오현 큰스님으로 부터 "한정된 예산 내에서 자네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해보게. 근데 건축주는 내가 아니고 만해 선생님이네"라는 무게감 있는 OR Owner's Requirement을 전달 받았다. 결국 만해마을 설계에서 설계자는 '불교건축의 현대화', '전통건축의 현대화'에 앞서 '만해 한용운의 사상을 어떻게 건축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가?' 라는 더 어려운 질문과 마주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김개천에게 세 질문은 모두 일맥이었고 그의 건축언어를 나타내는 -그래서 책의 제목으로까지 된- '명묵明默'이 그가 제시하는 답이었다. 명묵은 '밝은 침묵', '침묵하지도 않는 침묵'으로 해석되는 알듯 말듯한 담론이다. 그런데 이 알듯 말듯함은 《님의 침묵》에 나오는 구절에서 느껴지는 알듯 말듯함을 공유하고 있다.
"Q: 그렇다면 당신이 지금까지 진행해 온 사찰에서 기본적이고 공통적인 개념은 어떤 것인가?"
"김개천: 불교의 정신 특히, 공간조형철학이라 할 수 있다. 선禪으로 구형되는 무형성, 무한성, 공시성, 상관성, 영속성, 무경계의 건축 등 이러한 것이 내가 불교를 통해 보아왔던 조형언어의 정신이다. 또한 자연계의 평범한 생명력 원리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은 속박과 구속에 순응적이지 못하다. 단체보다는 개인이 우선이고 武보다 文이 앞섰다.
우리는 중국과 일본과 비교해 다른 점들이 있다. 똑같이 침묵을 즐겼지만 한국인이 즐긴 침묵은 중국이나 일본이 즐긴 침묵과 다르다. 일본은 적묵(寂默; 고요히 명상에 잠기어 말이 없다)을 즐겼고, 중국인들은 반묵半默, 사묵斜默을 즐겼다. 그러나 추사의 시를 보면 '종일토록 햇빛이 마당에 내려 쬐는데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햇빛이 그 자리에 하루 종일 비치는 밝은 침묵, 침묵하지도 않는 침묵, 그것을 나는 명묵明默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중략)...
"명묵의 건축을 다른 단어로 이야기 하자면 선禪과 예禮의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명묵은 침묵적인 공간을 만들어 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하려 하지 않는데 침묵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빛을 이용해 사람을 명상적인 분위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침묵적 분위기는 존재하지 않고 형식은 느껴지지 않는데도 또 활동적 삶이 그 안에서 영위되고 있는데도 뭔가 모르게 침묵이 느껴지는 것이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우리의 마당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Words from 김개천, Focus: 김개천의 현대사찰건축, 대담:자생하는 건축, 월간 플러스2003.01-
인제군은 설악산을 정점으로 흘러 내려가는 산맥 지형이 대부분을 이루는 땅이다. 만해마을은 건물 디자인 자체만 보면 해당 대지가 아닌 다른 대지에 가져다 놔도 괜찮을 것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형태로 설계된 건물이 현재 대지에 앉혀져 주변 산, 넓은 범위로 자연과 어우러지고 있다. 그렇다고 그 어우러짐을 위해 건물 형태에 설계자의 시그네이쳐Signature를 삽입시켜 놓지도 않았다. 한정된 예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건물의 마감재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마천석과 노출콘크리트이고 형태는 육면체 박스Box가 기본이다. 김개천은 자신이 "익명의 건축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자신이 디자인한 건축물이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경지를 의미한다. 그는 "훌륭한 건물은 누가 만든 것인지 인공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누가 설계하였는지 관심조차 갖지 않게 만들어 스스로 존재하는 건축이길 원한다"고 했다. 같은 맥락으로 만해마을에서도 땅을 둘러싼 산과 자연이 주인공이 되게 하기 위해 건물들을 배치하고 설계했다. 하지만 그러는 과정 자체가 사실은 설계자의 의지가 개입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만해마을을 '건축가 없는 건축Architecture without Architect'로 부를 수는 없다. 즉, 익명성의 건축을 추구했지만 여전히 설계자의 생각과 어떻게 하겠다는 의지가 개입돼 있다. 김개천이 얘기하는 "인문화성(人文化成; 사람이 만든 인문의 세계가 자연과 어울려 풍요로움을 이루듯 의지가 개입되어 있음에도 그 의지를 찾기가 힘들며 자연과 하나된 경지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 '인문화성'이 '무의지'와 다른 점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 일주문 현판에 적힌 'ㅇㅇ山ㅇㅇ寺'와 경내 산신령을 모시는 산신각을 보면 불교건축이 배치될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산'이다. 조금 더 넓게 보면 '자연'이다. 만해마을에서 김개천은 땅을 둘러싼 산과 자연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건축물을 넘어 산과 자연을 더욱 빛나게 해 줄 수 있는 배치를 하고자 했다. 이 부분에서 담론의 영역을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자연의 의미를 땅을 둘러싼 산과 같이 눈으로 보이는 자연에서 정신세계의 자연으로 넓혀야 한다. 권영걸은 김개천의 작업을 해석하면서 스피노자Spinoza의 범신론적 세계관에 영향을 받은 Schelling이 "능산적인 자연, 즉 모든 것을 창출하는 포괄적 의미의 자연을 상정"하면서 그것을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의 자연"으로 얘기했다는 것을 인용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Schelling의 관점에서 절대자는 "살아 있는 자연임과 동시에 이성이며,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사이의 '무경계', '무차별'을 주장함으로써 동일철학의 입장을 취했다"고 설명한다. 이 부분에서 권영걸은 언젠가 읽은 김개천 작업에 대하여 김개천 자신이 "주관은 객관이요, 객관은 주관이다. 자연은 정신이요, 정신은 자연이다"라고 피력한 단상을 언급한다. 즉, "김개천이 대하는 자연은 눈에 보이는 정신이요. 정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이다. 그에게 정신은 곧 자아를 발견하는 일인 것이다. 또한 그에게 모든 것은 하나이며, 삼라만상, 자연, 절대자, 조화, 근원 등은 모두 동의어"라는 것이다《공간 속의 디자인 디자인 속의 공간, 권영걸(공간디자인비평연구회), 효형출판》.
어려운데 김개천이 직접 언급한 얘기로 초점을 맞춰보면, 그는 "모더니즘Modernism이 이룩한 보편적 미의 완성, 그리고 대상의 의지 조차 결여된 물적 본성만으로 미적 진실을 획득하려 했던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이상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유효함을 이룬 건축들이 "사람과 자연을 진실로 자유롭게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다"라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과 그 이후의 해체 등, 현대예술이 자유를 이야기하지만 자유를 극복하지 못한 여러 문제들을 생각하며 만해마을을 설계했다"고 한다(-Words from 김개천, 만해마을 건축가 김개천과의 대담: 건축가 없는 건축을 위한 시도, 공간지200311(432)-). 자신이 설계한 건축이 자연과 어울려 자연 그 이상의 것을 만들어야 하고 자연이 눈에 보이는 정신이며, 정신이 곧 자아를 발견하는 일이라는 논리라면 결국 김개천에게 건축을 한다는 것은 자아를 발견하는 일 그 이상의 경지에 오르고자 하는 행위다. 이쯤되면 스님이 궁극의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수행의 과정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