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적으로 아니면 일반적으로 한 도시를 상징하는 구조물이 있다. 예를 들면, 파리의 에펠탑Eiffel Tower, 런던의 빅 벤Big Ben,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Opera House 등이다. 그리고 이런 상징물들은 해당 도시를 넘어 해당 국가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그럼 미국을 상징하는 건 뭘까? 많은 사람들이 뉴욕 맨해튼Manhattan의 자유의 여신상the Statue of Liberty을 꼽을 것 같다. 하지만 신기념비주의, 방대한 영토 등의 이유로 자유의 여신상 외에도 미국을 상징하는 구조물들은 더 있다. 그럼 비공식적 혹은 개인적으로 한 도시, 한 국가를 상징하는 구조물을 꼽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 기준은 개개인의 경험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칠 듯하다. 2002년 미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그곳에 오랫동안 사셨던 친척분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골든게이트 브릿지Golden Gate Bridge, 금문교金門橋였다. 여독에 지쳐 정신이 없었지만 자욱한 안개 속에서 불쑥 드러난 붉은색의 브릿지 타워Bridge Tower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미국을 상징하는 구조물은 자유의 여신상도, 백악관도 아닌 금문교다.
금문교에 대한 얘기를 하려면 다리의 이름인 금문, 골든게이트Golden Gate 부터 해야 한다. 골든게이트는 샌프란시스코 반도와 마린Marin 반도가 맞닿아 있는 해협을 일컫는 지명이다. 혹자들은 골든게이트라는 지명이 캘리포니아California 골드러시Gold Rush와 연관돼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는 1848년~1855년 사이에 있었다. 반면, '골든게이트'라는 지명은 이보다 앞선 1846년 7월 1일, 존 프리몬트John Fremont가 쓴 회고록에 처음 등장했다. 프리몬트는 미 육군 장교이자 탐험가 였다. 무엇보다 그의 이력에서 주목할 점은 그가 공화당 최초의 미국 대통령 후보였다는 것이다. 프리몬트는 회고록에서 '크리소파일래Chrysopylae'라고 이 지역을 불렀는데 이는 'Golden Gate'를 뜻하는 그리스어다. 프리몬트는 이 지역이 이스탄불Istanbul의 'Golden Horn'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는데, 'Golden Horn'을 뜻하는 그리스어는 '크리소세라스Chrysoceras'다. 추측해 보면 일몰시 붉게 물드는 풍경이 프리몬트에게 황금을 떠오르게 한 것 같다.
샌프란시스코는 삼면이 바다에 면해 있었기 때문에 도시 확장에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고층 건물 건설에 필요한 기술 및 재료가 개발되지 않았을 때 도시의 확장은 평면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도시의 확장을 위해서는 반도 북쪽 건너편의 마린 반도나 동쪽 건너편인 오클랜드Oakland로 연결되어야 했다. 초기 운송수단 중 선박이 이런 역할을 맡았다. 1820년대 초반부터 운행을 시작한 페리Ferry는 1840년대에 들어서는 정기적인 운항 일정으로 운영됐다. 1867년에는 골든게이트 페리 컴퍼니Golden Gate Ferry Company라는 회사가 생겼는데, 이 회사는 당시 선박 보다 더 비중있는 운송수단이었던 철도회사, 사우던 패시픽 레일로드Southern Pacific Railroad의 자회사였다. 결국 철도회사가 모든 운송사업을 도맡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선박교통은 아무리 자주 다닌다 하더라도 정해진 시간에만 이용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그래서 골든게이트를 연결하는 다리 건설에 대한 니즈Needs는 늘 있어왔다. 심지어 도시 확장의 한계 때문에 당시 샌프란시스코의 성장률은 국가 평균 성장률 보다 낮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다리 건설은 지방정부에게는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전문가들은 골든게이트 해협의 폭이 2,000m가 넘고 빠른 해류 속도와 깊이 때문에 다리 건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이 지역은 바람도 거세고 안개도 심해서 공사 환경도 나쁘고 다 지어진다고 해도 운영이 쉽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
다리 건설이 최종적으로 채택된 계기는 공학도였던 제임스 윌킨스James Wilkins가 쓴 1916 San Francisco Bulletin 기사였다. 윌킨스의 기사에서도 상당수의 엔지니어들은 다리 건설을 위해서는 $100,000,000 정도가 필요하며, 비현실적이라고 말했다. 당시 이 금액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2,120,000,000 정도 라고 한다(2017년 5월 환율 기준 2조 3,840억). 그런데 단 한 명의 엔지니어만이 $17,000,000이 필요하다고 답했다(현재 기준 약 4,050억원). 그 엔지니어의 제안은 다리 양쪽에서 거대한 캔틸레버Cantilever로 상판을 지지하고 두 상판이 만나는 가운데에 현수 구조물을 만들어 연결하자는 내용이었다. 이 엔지니어가 현재 금문교의 설계자로 꼽히는 조셉 스트라우스Joseph Strauss다(아래 왼쪽 사진).
지방정부는 스트라우스가 제안한 디자인을 변경하고 몇몇 전문가들의 컨설팅Consulting을 받아들인다면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스트라우스의 다리 건설 계획안에 대해 다리 건설로 접근성이 좋아지는 캘리포니아 북부지역과 당시 막 산업이 시작됐던 자동차 업계는 지지 의견을 냈다. 반면, 자동차 산업의 발전으로 매출이 줄어들 위기에 처한 철도 및 선박 운항 회사들은 반대했다. 미국 사회이니 당연히(?) 사우던 패시픽 레일로드는 스트라우스를 상대로 법정 소송을 냈다. 미 국방부는 다리가 해군 선박 운행에 방해가 될 거라는 우려를 표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양한 찬반 의견이 나왔고 그런 과정을 겪으며 스트라우스는 설계를 진행했다. 금문교 설계 전까지 스트라우스는 그가 설립한 '더 스트라우스 브릿지 컴퍼니 오브 시카고the Strauss Bridge Company of Chicago'라는 회사를 통해 상당수의 도개교 설계를 했었다. 하지만 현수교 설계 경력은 전무했다. 그래서 스트라우스는 현수교 전문가를 비롯해 수학자들에게도 자문을 받았다. 그 중 한 명이 레온 모이세프Leon Moisseiff(위 오른쪽 사진)였다.
모이세프는 현재 금문교의 모습이 나오게 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모이세프는 뉴욕의 맨해튼 브릿지Manhattan Bridge(위 사진)를 설계한 엔지니어였는데, 이 다리가 금문교와 같은 현수교 구조다.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연결하는 이 다리는 1901년 착공돼 1909년 개통됐다. 맨해튼 브릿지를 통해 모이세프는 당대 최고의 현수교 권위자 라는 평가를 들었는데, 1940년 워싱턴州 타코마Tacoma의 타코마 내로즈 브릿지Tacoma Narrows Bridge의 붕괴로 명성에 흠집이 갔다. 모이세프의 조언을 금문교 설계에 실제 반영한 사람은 책임기술자였던 찰스 알톤 엘리스Charles Alton Ellis다. 그런데 엘리스는 일리노이 대학University of Illinois의 공대 교수이기는 했지만 공학 학위는 없었고 오히려 그리스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다. 물론 금문교 설계 전에 일리노이 대학에서 토목공학 학위를 받았다. 후에 퍼듀대학교Purdeu University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그런데 금문교 설계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31년 11월, 스트라우스는 엘리스를 해임하고 과거 함께 일했던 클리포드 페인Clifford Paine을 임명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엘리스는 심지어 무보수로 금문교 설계에 관여했다고 한다.
스트라우스와 엘리스가 엔지니어였다면 건축가로 금문교 설계에 참여한 사람은 어빙 모로우Irving Morrow였다. 모로우는 브릿지 타워(높이 227m)의 전체적인 형태 부터 조명 구성, 아르데코Art Deco 양식의 장식 요소, 가로등, 난간, 보도 디자인 까지 다양한 부분들을 설계했다. 심지어 현재 금문교의 아이콘Icon인 붉은색도 모로우가 선정했다고 한다. 금문교에 칠해진 색의 공식적인 명칭은 'International Orange'인데, 미적인 이유가 아닌 밀폐재 라는 기능적인 필요 때문에 칠해졌다. 참고로 미해군에서는 앞서 언급한 미 국방부의 우려와 같은 이유로 식별성을 높이기 위해 검은색과 노란색 띠를 반복적으로 칠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마치 공사현장의 고깔 처럼. 현수교 경력이 전무했던 스트라우스, 공학 학위도 없었던 엘리스, 여기에 건축가로 참여한 모로우도 다리 구조물 설계에 대한 경력은 없었다. 그는 1906년 버클리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을 졸업했고 1908년~1911년에는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Ecole nationale superieure des Beaux-Arts를 다녔다. 모로우의 실적은 주로 주거시설이었고 그나마도 유명하지 않은 건축가였다. 그가 금문교 설계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스트라우스가 1930년에 고용했기 때문이다. 금문교는 현수교와 관련된 경력이 없던 사람들이 긴 시간 협력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1928년 캘리포니아 법으로 승인된 를 통해 금문교의 디자인과 건설 및 재정계획이 확정됐다. 하지만 1929년 월가 대폭락 사건으로 건설자금 마련은 힘들어졌고 결국 1933년 1월 5일이 되어서야 착공됐다. 다리는 1937년 4월 19일 완공됐지만 정식 개통은 같은 해 5월 27일 이었다. 올해(2017년)는 금문교 개통 80주년이다. 참고로 샌프란시스코 만과 동쪽 건너편 오클랜드를 연결하는 베이 브릿지Bay Bridge(위 사진)는 1933년 7월 8일 착공해서 1936년 11월 12일 개통했다. 금문교 보다 공사기간이 더 짧았다. 스트라우스와 그의 팀들은 예산 보다 낮은 건설비($35,000,000)로 공사기간도 단축했다. 개통식 때 스트라우스는 대학에서 학급 대표 시인이라는 경력을 살려 이라는 자작시를 낭송했다고 한다. 금문교가 시작되는 남동쪽 스트라우스 광장Strauss Plaza에는 1955년에 옮겨온 그의 동상이 있다(아래사진).
뭐 당연한 얘기겠지만 금문교는 완공과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라는 지위를 누렸다. 이 지위는 1964년 까지 이어졌다. 현재는 세계에서 14번째라고 하는데, 현수교 길이 순위는 주主 경간의 길이를 기준으로 한다. 금문교의 경우 브릿지 타워 간의 길이(주 경간 길이)가 1,280m이고 전체 길이는 2,737m다. 참고로 현재(2017년 기준)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는 1998년 개통한 일본 아카시 해협 대교Akashi Kaikyo Bridge로 주 경간 길이가 1,991m에 달한다. 안도 타다오Ando Tadao가 설계한 물의 절(1991)과 아와지 유메부타이Awaji Yumebutai(2000)가 있는 아와지 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 다리를 건너야 한다. 전 세계 현수교와 관련된 몇 가지 얘기를 더하면 주 경간 길이 상위 10개 다리 중 4개가 중국에 있고 2012년 준공된 여수와 광양간 이순신 대교는 1,545m로 다섯 번째다.
다시 금문교 얘기로 돌아와서, 현재 금문교의 하루 차량 통행량은 110,000대 라고 한다. 금문교를 통과하려면 혼잡세가 포함된 통행 요금을 내야 하는데 경우 -FasTrak, Toll-by-plate, Carpool, Multi-axle vehicle- 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7정도다. 그러니 단순 계산해도 하루 통행비만 $770,000이다. 다리의 전체 폭은 27m이지만 차선은 6개고 나머지는 인도와 자전거도로로 이루어져 있다. 다리 상판은 수면에서 67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상당한 높이와 다리 아래를 흐르는 바닷물의 온도, 속도 때문에 자살 치사율(?)은 98%라고 한다. 사실 금문교는 자살명소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는데, 개통 이후부터 현재까지 대략 1,600명 이상이 이곳에서 자살했다. 금문교에 사용된 케이블Cable의 총 길이는 129,000km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여기까지 언급된 숫자와 기록들이 금문교와 관련된 팩트Fact지만 다리에서 느껴지는 힘을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나는 샌프란시스코를 가는 누구에게나 자전거든 도보든 느린 속도로 금문교를 지나가면서 가까이에서 느껴보기를 추천한다. 그러면 먼 발치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금문교와 브릿지 타워의 어마어마함, 케이블의 굵기 그리고 유려한 곡선에서 느껴지는 힘의 모멘텀Momentum에 감동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더불어 금문교를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스트라우스, 엘리스, 모로우, 페인 사이에 있었던 치열한 논쟁과 그 사이의 갈등을 상상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