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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도시, 칼스루헤의 302번째 생일(1715.6.17)
가장 기념비적인 도시, 칼스루헤Karlsruhe
도시설계가 Archur
2017.06.17

 

도시의 패턴Urban Pattern이 확연히 보이는 항공사진만 보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 곳은 이태리의 팔마노바Palmanova와 독일의 칼스루헤Karlsruhe. 물론 그런 생각이 든 후 유사한 목적을 지닌 비슷한 패턴으로 만들어진 도시가 몇 군데가 더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그래도 이 두 도시만큼 끌리는 곳은 없었다. 팔마노바와 칼스루헤 모두 특정한 목적을 위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다. 그래서 이런 표현이 조금 웃기기는 하지만 도시의 생일이 있다. 팔마노바의 생일은 1593107일이다. 이후 122년이 지난 1715617일은 칼스루헤의 생일이다. 칼스루헤를 처음 계획한 Jakob Friedrich von Batzendorf는 반경 440m 원 안에 첫 번째 칼스루헤 궁전Karlsruhe Palace을 설계하면서 탑으로 수렴되는 32개의 가로망을 계획했다(아래 도면). 그 중 칼스루헤 궁전 전면에서 정남쪽으로 뻗어내려가는 도로(1번 도로)를 기준으로 동-서 번갈아 번호를 붙였는데, 8번과 9번 도로 사이에 도시조직을 두고 나머지는 녹색의 공간으로 계획했다. 현재 1번 도로는 Platz der Grundrechte에서 Karl-Friedrich-Strabe로 이어지고 8번 도로에는 Waldstrabe, 9번도로에는 Waldhornstrabe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8번과 9번 사이에 이등변삼각형 형태로 도시조직이 배치됐고 빗변 밖으로 1,2,3번 도로 끝에 세 개의 성당이 배치됐다. 현재 빗변에 해당되는 도로는 Kaiserstrabe이고 세 개의 성당 중 동쪽에 있는 Kleine성당(아래x2사진)이 남아 있다. 1972Kaiserstrabe에 보행자 공간이 처음 설정됐고 1984년까지 지속적으로 연결됐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생활하는 도시를 만든다는 건 그것이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아니면 군사적인든 강력한 권력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다수의 사람들에게 전혀 생활기반이 없던 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상당한 신도시를 별 탈 없이 정착시킨 우리나라의 정책입안자들이 가지고 있는 힘은 참 대단하다. 아니면 그들의 힘 보다 더 대단한 부동산이라는 힘을 그들이 잘 이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찌됐든 지금처럼 도시유목민의 개념이 없던, 땅을 기반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산업혁명 이전에 신도시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활의 터전을 제공한다는 건 더욱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칼스루헤를 만들어낸 강한 힘은 Charles III William(1679~1738)에게서 나왔다. 그는 1679117일 두를라흐Durlach에서 태어났다. 칼스루헤에서 남동동쪽으로 5km가량 떨어진 두를라흐는 1565CharlesII가 바덴-두를라흐 후작의 거주지로 선택한 도시다. 그러다 1709년 후작에 오른 Charles III William1715년 영지의 수도를 두를라흐에서 칼스루헤 -정확하게 얘기하면 Hardtwald- 로 옮겼다. 아무리 절대권력이라 하더라도 천도는 쉬운 선택이 아니다. 심지어 당시 바덴-두를라흐는 프랑스와의 9년 전쟁(1688~1697)으로 취약한 재정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Charles III William이 왜 새로운 수도를 만들려 했는지 그리고 왜 그곳이었야 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도시의 이름로 부터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은 있다.

 

칼스루헤KarlsruheKarlRuhe라는 의미로 Karl은 도시를 설립한 Charles III William을 가르킨다. 그러면 Ruhe? 독일어로 Ruhe'휴식', '고요함', '평온함'을 의미한다. , 칼스루헤는 'Charles III William의 휴식'을 뜻한다. 이런 이름이 나온게 된데에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첫 번째는 Charles III William이 사냥여행을 갔다가 새로운 도시를 세우는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깨어난 뒤 이름을 붙였다는 설이다. 두 번째는 그가 사랑하지 않았던 아내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새로운 궁전을 지었다는 설이다. 두 번째 설이 맞다면 Charles III William도 참 대단한 사람이다. 뭐가 됐든 Ruhe의 의미가 맞아떨어진다. 그는 1718년을 시작으로 1719년까지 모든 행정시설을 칼스루헤로 옮기라고 명했다. 당연히 두를라흐 시민들은 반발했지만 몇몇 이주 장려책으로 1719년 인구는 2,000명에 이르렀다.

 

수도 이전 전부터 재정이 취햑했던 바덴-두를라흐는 새로운 궁전을 지을 자금이 부족했다. 결국 Charles III William은 나무로 궁전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붉은색 페인트를 칠했는데 그래서 한때 칼스루헤는 '붉은 도시Red City'라는 별칭을 갖지고 있었다. 그러다 1747년 화재로 첫 번째 칼스루헤 궁전은 소실됐다. Charles III William1738년 세상을 떴다. 그리고 그를 이은 손자 Charles Frederick(1728~1811, 위 동상의 주인공)은 바덴-두를라흐의 통치자에서 첫 번째 바덴 대공Grand Duke이 됐다. Charles Frederick은 계몽주의 사상에 입각한 성공적인 개혁을 이끈 군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농민을 해방시켰고 학교를 세워 농업, 공업, 수공업을 장려했으며, 고문을 철폐했다. 1808년부터는 그의 손자 Charles(Karl Ludwig Friedich)와 공동통치를 하기도 했다. Charles는 할아버지를 이어 1818년까지 바덴을 이끌었다. 그의 통치 마지막해에는 자유주의 위원회가 구성되기도 했다. 1822년 이 의회를 위한 첫 번째 건물이 Standerhaus(Friedrich Weinbrenner + Friedrich Arnold). 이 건물은 1944년 대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결국 1961년 큰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거됐다. 1993'Memorial Standerhaus'라는 디자인 개념으로 칼스루헤 시립도서관Stadtbibliothek KarlsruheStanderhaus기념관이 세워졌다(아래사진).

 

 

Charles FrederickCharles로 이어진 기반은 Charles의 삼촌 Louis I(1763~1830)와 이복동생 Leopold I(1790~1852)로 이어졌다. 정치적 안정은 수도의 번영을 가져왔다. 17502,500명에 불과했던 인구는 도시 건립 100주년이 됐던 1815년에 15,000명 이상으로 늘었다. 당연히 도시는 몇몇 관공서 건물과 외연적 확장이 필요해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도시를 대표하는 건축가가 등장하게 되는데, 칼스루헤에서는 Friedrich Weinbrenner(1766~1826, 위 사진)였다. Friedrich Weinbrenner1766년 칼스루헤에서 태어났는데, 아마도 그가 태어났을 때 칼스루헤에서는 건설 붐이 일었을 듯 하다. Friedrich Weinbrenner는 목수였던 아버지 작업장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건설업에 대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22세였던 1788, 취리히와 로잔느에서 건설업을 벌였고 1790년에는 비엔나에서 본격적으로 건축을 공부했다. 1791~1792년 동안에는 베를린에 머물면서 팔라디안Palladian양식을 접했고 이때 Carl Gotthard Langhans, David Gilly, Hans Christian Genelli 등의 영향을 받아 고전주의 건축언어를 받아들였다. 베를린에서 이탈리아로 이동한 Friedrich Weinbrenner는 로마, 폼페이, 파에스툼Paestum 등의 건축양식에 몰두했는데, 이 기간 동안 고전건축과 팔라디안 양식의 원형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을 것 같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스트라스부르그와 하노버에서 잠깐 일을 하기는 했지만 얼마안가 칼스루헤에서 자신의 사무소를 차렸다. 31세가 된 1797, Friedrich Weinbrenner'칼스루헤 제네럴 플랜General Plan(아래도면)'1822~1827'Via Triumphalis에 대한 계획'을 수립했다.

 

 

칼스루헤 General Plan은 앞서 언급했던 Jakob Friedrich von Batzendorf의 계획(1715)을 보정하는 계획이었다. 도시가 확장되면서 이등변 삼각형 영역내에서만 도시조직을 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Kaiserstrabe(위 사진)남쪽으로 확장됐다. 여기서 세 개의 지점이 중요해 지는데, 첫 번째는 Jakob Friedrich von Batzendorf 계획에서 1번 도로가 남쪽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하는 지점Marktplatz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동쪽 Durlacher Tor와 서쪽 과거 Muhlburger gate가 있었던 Kaiserplatz.

 

칼스루헤의 확장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Marktplatz(위 사진). Marktplatz는 앞서 1715년 계획에서 칼스루헤 궁전과 대응되는 종교시설 Konkordienkirche가 있던 자리다. 실제 KonkordienkircheFriedrich von chunk Dorff의 설계로 지어졌었다(1719~1722). 하지만 공사비 등의 문제로 완전한 성당은 아니었고 일종에 프레임만 지었졌던 것 같다. 1738Charles III William이 세상을 떴을때 이 성당(?)에 묻혔다고 하니 도시를 대표하는 종교시설이었음에 틀림없다. 1807년 도시확장이 계속되면서 1번 도로(Karl-Friedrich-Strabe)가 남쪽으로 더 뻗어내려가기 위해 성당을 허물었다. 그리고 Marktplatz를 조성했다. 이 모든 일은 당시 City Architect였던 Friedrich Weinbrenner가 맡았다. 그는 Charles III William의 유해가 묻혀 있던 자리에 나무로 만든 피라미드를 세웠다. 그는 후에 Konkordienkirche를 대신하는 도시를 대표하는 종교시설이 세워지면 옮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결국 16년이 지난 1823년에 역시 Friedrich Weinbrenner가 설계한 석재 기념비가 세워졌다.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6.8m의 이 피라미드는 원형 패턴에 이어 도시의 두 번째 상징이 됐다(아래사진).

 

 

피라미드의 건립과 Marktplatz 조성은 1822~1827년 동안 진행된 Via Triumphalis 조성의 일환이었다(위 도면). Via Triumphalis 조성은 칼스루헤 궁전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Platz der GrundrechteKarl-Friedrich-Strabe로 이어지는 축을 남쪽으로 연장한 뒤 Marktplatz, Rondellplatz 그리고 Ettlinger-Tor-Platz를 연속시키는 계획이다. 그리고 각 광장 한가운데에는 기념비가 놓였는데, 이를 통해 칼스루헤 궁전의 파사드Facade-Charles Frederick의 동상-피라미드-오벨리스크 그리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Ettlinger gate(칼스루헤 성의 남문)가 한 축 선상에 배치됐다. 기념비적인 도시들이 '이 공간이 도시에서 대표적인 기념비적 공간입니다'라는 메세지를 전달할때 사용하는 장치는 곧게 뻗은 길()과 그 끝에 배치된 장엄한 건축물, 오벨리스크, 동상 등이다. 대표적으로 유진 오스만Eugine Haussmann에 의해 개조된 파리와 식스투스5Sixtus V에 의해 개조된 로마를 들 수 있다. 그런데 Via Triumphalis에는 이 모든 요소가 일렬로 배치돼 있다. 도시에서 사용될 수 있는 기념비란 기념비는 종류별로 다 모아놓은 셈이다.

 

흥미로운건 칼스루헤의 시작은 절대권력이었지만 그 확장은 신장된 도시의 힘이 이끌었다는 점이다. 도시 확장의 결정적 사건이 된 Konkordienkirche를 허물고 만들어진 공간이 Market Place(Marktplatz)라는 것이 대표적이다. Jonathan Barnett도시디자인의 근대사, 국제출판에서 칼스루헤를 "유럽에서 전체적인 도시 디자인과 상업도시 디자인이 조화를 이룬 예"로 꼽았다. Barnett"18세기 지방 수도였던 칼스루헤는 당시 요새화가 필요한 만큼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곳"이었는데, "도시가 차츰 발전함에 따라 상업도시의 광장과 가로가 전제군주의 도로가 교차하면서, 일련의 비정형적인 미해결의 블록을 가진 구조를 형성하였다"고 설명했다. 도시에 시장Market Place이 만들어졌다는 의미는 칼스루헤가 더이상 절대권력으로만 작동되는 도시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1825년에 Friedrich Weinbrenner가 큰 도움을 주어 Polytechnic School in Karlsruhe가 설립됐는데, 2009년에 Karlsruhe Research Center와 합쳐져 Karlsruhe Institute of Technology가 됐다. Karlsruhe Research Center1956년에 설립된 National nuclear research center의 후신이다.

 

Markplatz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피라미드가 놓여 있는 광장은 정방형에 가깝고 그 아래는 장방형이다. 두 영역은 Zahringerstrabe로 나뉘어진다. 북쪽 피라미드가 있는 부분은 광장에 면한 건물의 용도도 주거와 상업으로 시장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다(위 사진). 반면, 남쪽 장방형 평면의 광장은 가운데 Karl Ludwig Friedich의 조각상이 세워진 분수가 설치돼 있고 동쪽에 Karlsruhe Protestant Church(Evangelische Stadtkirche Karlsruhe), 서쪽에 시청Rathaus 그리고 남동쪽에는 경찰서가 배치돼 있다. 도시를 대표하는 종교시설과 공공행정시설이 배치된 광장이다(아래사진). 칼스루헤 시청은 1728년에 처음 지어졌다. 아마도 이 첫 번째 시청은 지금 자리가 아닌 Kaiserstrabe 안쪽 어디쯤에 있었다. 1811년 첫 번째 시청을 허물고 지어진 두 번째 시청이 지금 우리가 보는 건물이다. 시청 맞은편에는 1807년 사라진 Konkordienkirche를 대신해 도시를 대표하는 종교시설로 지어진 Evangelische Stadtkirche Karlsruhe(Karlsruhe Protestant Church)가 있다. 이 교회와 시청사 모두 Friedrich Weinbrenner가 설계했다. Evangelische Stadtkirche Karlsruhe19449월 대공습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1958년 다시 지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내부는 현대적으로 바뀌었다. 내부공간의 개조 설계는 Horst Eduard Linde가 맡았다(아래x2사진).

 

 

미국의 기초를 만든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프랑스에 미국 특사로 방문했을때 칼스루헤를 왔었다고 한다. 방문후 제퍼슨은 당시 미국의 수도 워싱턴D.C.계획을 세우고 있던 Pierre Charles L'Enfant에게 칼스루헤 방문 동안 했던 스케치를 포함해 유럽내 12개 도시의 지도를 전달했다. 칼스루헤가 워싱턴D.C. 계획에 전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큰 영향을 주었음에는 분명하다. 현재 칼스루헤는 바덴뷔르템베르크Baden-Wurttemberg에서 주도인 슈트트가르트Stuttgart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인구는 대략 296,000명으로 세계2차대전때 도시의 35%가 파괴되고 인구도 65,000명 수준으로 감소했음에도 회복이 빨랐다. 칼스루헤내 건물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건이 1944년 대공습이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칼스루헤는 연합군의 대공습을 받았는데 1940~1945년 동안 총 135차례나 있었다. 칼스루헤가 이렇게 집중 공격을 받은 이유로 남서쪽 알프스 산맥과 인접한 독일의 최전방이었다는 점, 탄약공장이 있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뭐 광륜이나 팬Fan 모양의 도시 패턴이 폭격의 타겟처럼 보여서 그랬을 수도 있고(이건 정말 막 던지는 생각임). 전후에는 프랑스군과 미군이 도시를 나눠 주둔했다. 칼스루헤의 미군기지는 1995년에 폐쇄됐다. 도시 복원 과정에서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와 독일 연방재판소, 주정부 행정기관들이 칼스루헤에 입지했다.

 

Christian Mikunda마음을 훔치는 공간의 비밀, 21세기북스에서 독일 칼스루헤의 설계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광륜光輪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되어왔는데, 후작 Charles III William이 사방으로 비추는 태양 빛을 본떠 지은 도시"라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빛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후광을 강조하기 위해 빛줄기를 두른다면 영예의 광륜은 곧바로 광장의 꼬리가 되어 오만의 상징으로 타락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비평을 더했다. 그런데 난 이 비평이 적어도 칼스루헤에서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칼스루헤의 광륜은 도시가 더이상 절대권력에 의해 작동되지 않았을때에도 새로운 기능에 맞춰 그 성격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현재 칼스루헤 궁전 북쪽으로 뻗어있는 길들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이 되어주고 있고 남쪽으로 뻗은 길들은 도시 확장의 기본 골격이 되어주고 있다.

 

도시설계가 Archur

Archur가 해석하는 도시,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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