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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건국(1392.7.17)
사직단(1395)
도시설계가 Archur
2017.07.16

 

BC12세기에 주례周禮라는 책이 쓰였다. 책은 ,,,,,6부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 부분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BC32~BC7년에 보완하여 고공기考工記라는 책이 됐다. 우리는 편의상 '주례고공기'라 부른다. 이 책이 주목받는 이유는 "匠人管國, 方九里, 旁三門, 國中九經九緯, 經徐九軌, 左祖右社, 面朝後市"라는 내용 때문이다. 이 내용은 후대 중국 역대왕조 도성건설의 기본이 되었다. 특히 마지막 "左祖右社, 面朝後市"는 국가 중요 시설인 종묘(좌측), 사직단(우측), 행정관청(전면), 시장(후면)의 배치를 결정했다.

 

중국 역대왕조 도성건설의 기본이 이랬으니 우리나라 도성건설의 기본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특히, 조선의 수도 한양 건설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한양 정도 직후 정도전은 새 도시에서 '괴력난신怪力亂神'이 거처할 곳을 아예 없애버리려 했다. 그는 종묘와 사직, 궁궐과 관아, 저자와 민가, 학교와 사당만으로도 도시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아마도 정도전은 서울의 공간요소를 공적 공간으로 분배하고 관리하고자 했던 듯싶다 서울은 깊다. 전우용, 돌베개. 한양에서 주례고공기의 원칙에 벗어나 있는 시설은 시장이다. 한양의 경우 경복궁이 정전이니 이를 기준으로 후면은 북악산이다. 시장을 산 위에 만들 수는 없으니 행정관청이 밀집된 육조거리와 수직으로 교차하는 종로를 따라 특히 동대문과 남대문 일대에 형성됐다. 그러나 '좌묘우사'에 해당되는 종묘와 사직의 위치는 정궁인 경복궁을 기준으로 서쪽과 동쪽에 배치됐다.

 

조선시대 왕이 외척간신들에게 놀아나고 비선실세에게 휘둘릴 때 신하들은 종묘사직을 보존하라고 읍소했다. 당시 왕은 신하들의 뜻에 맞게 바꾸거나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지 못하는 존재였다. 물론 몇몇 왕은 그렇게 되기는 했지만. 조선은 1392717일에 건국됐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제헌절이 717일이라고 한다. 조선의 건국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제헌절은 "헌법을 제정·공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국경일"인데, 우리나라 헌법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조선은 자유민주주의도, 최소한 공화국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묘에 대해 안다. 그 세세함까지는 언급할 수 없겠지만 조선시대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폐를 모시던 왕실의 사당이라는 정도는 안다. 위치도 창경궁과 종로3가 언저리로 말할 수 있다. 반면 종묘에 버금가는 사직에 대한 인지도는 무척 낮다. 종묘는 동양의 파르테논Parthenon이라 하여 우리나라를 찾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에게 전통건축의 힘을 일깨워주는 장소로 소개된다. 종묘에 대한 감상을 한 번이라도 일갈하지 않은 건축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 반면, 사직단은 그 위치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일제에 의해 조선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두 공간이 위기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사직보다 종묘에 관심을 더 집중시켰다. 아무래도 종묘가 조상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라는 이유가 가장 컸을 것이고 우리사회가 농경사회에서 벗어나고 있었다는 이유도 들 수 있을 것 같다. 사직단이 모시는 국사國社 정위토신(토지신이면서 나라를 지켜주는 신)과 국직國稷 정위곡신(곡식의 신)이 점점 와닿지 않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직단의 제사가 폐지된 계기는 1908년 통감부 칙령에 의해서였다. 1911년에는 건물과 대지가 조선총독부로 넘어갔고 1922년에는 주변에 도로를 내고 공원을 만들면서 부속 건물들이 철거되고 영역은 좁아졌다. 1924년에는 아예 공원으로 개설됐고 1940년에는 사직공원이 됐다(현재 사직공원의 면적은 188,710). 당시 사직단의 상태는 두 개의 단만 남은 상태였다고 한다. 광복 후 사직단은 제모습은 커녕 더 훼손되는 절차를 밟았다. 1962년 서울시 도시계획에 따라 사직단의 정문이 원래 자리에서 15m 후퇴 이전됐고 아동보건병원(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 종로도서관, 야외수영장, 동사무소 등이 경내에 들어서면서 사직단은 각 시설의 남은 영역을 차지하는 모양새가 됐다. 명칭도 아예 사직단이 아닌 사직공원으로 바뀌었다 모던스케이프-일상 속 근대 풍경을 걷다, 박성진, 이레. 198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담장과 부속 시설 일부가 복원됐다.

 

사직단의 핵심은 국사신과 국직신을 각각 모시는 두 개의 설단인 동단(사단)과 서단(직단)이다. 두 단 모두 정방형으로 한 변의 길이는 7.65m이고 높이는 약 1m. 각 단의 사면에는 3층의 계단이 설치돼 있다. 두 개의 설단 주변에는 정방형으로 낮은 담이 둘러져 있고 그 안쪽에는 돌바닥이 깔려 있다. 정방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도형이다. 장방형에서 네 변이 가능한 같은 길이로 수렴하는 도형일 뿐이다. 더군다나 한양을 만들 때 자연지세를 최대한 존중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사직단의 정방형은 아마도 한양에서 가장 이상적인 도형일 듯하다. 천원지방天圓地方. 정방형은 땅을 상징하는 기하학이다. 국사신과 국직신 모두 땅을 기반으로 하기에 정방형은 이 두 신의 상징이다. 낮은 담으로 둘러싸인 영역 안쪽의 돌바닥은 이쪽과 저쪽의 다름을 암시한다.

 

두 개의 설단이 있는 정방형 영역 밖으로 또 하나의 돌담이 둘러싸여 있다. 땅의 이상적인 상징에서 현실세계로 더 왔으니 돌담은 정방형에서 장방형이 된다. 돌담 각 변에는 신문神門이 설치돼 있다. 신문은 말 그대로 신이 드나드는 문이다. 신문을 통과하면 돌길이 나온다. 물론 돌길이 아닌 잔디밭을 통해서도 이동할 수 있지만 이는 신성치 못하다. 돌길은 직각으로 꺾여 있다. 그래서 인간의 입장에서는 불편하지만 이는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돌길 가운데를 따라 신이 이동한다.

 

네 개의 신문 중 주3칸으로 만들어진 북신문이다(위 사진). 북신문에서 돌길은 ┘→┌ → ┘으로 꺾여 서신문으로 나온다. 이 길의 이름은 향축로香祝路. '향축'은 제사에 쓰는 향과 축문을 의미한다. 돌길이 첫 번째로 꺾이는 지점에 판위板位가 있다. 왕이 제례전 의관을 고치던 곳으로 판위에서 북유문으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지만 직접 연결되는 돌길은 없다. 안내판에는 그려져 있는데 실제는 없다. 18세기 초 정선이 그렸다는 사직단도(아래그림)를 보면 항축로는 이 판위까지만 나 있다. 판위에서 북유문으로 연결되는 돌길이 없다면 판위는 인간이 신에게 가장 가깝게 도달할 수 있는 위치다. 유문 중 남유문 만이 유일하게 돌길로 서쪽 구석에 있는 신실과 연결돼 있다.

 

두 설단이 나란히 있어서 사직단은 북신문에서 보는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다. 인왕산을 배경으로 사직단을 보고자 한다면 동신문에서 봐야 한다. 어디서 보든 사직단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수평의 미'. 수직이 인간의 욕망이라면 수평은 자연의 시작이다. 모든 구조체가 허물어져 땅에 흩어져 있는 폐허지를 볼 때마다 수평에 대항할 수 없는 수직의 미약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이곳에서는 종묘에서 느껴지는 숭고미나 장엄함을 느낄 수 없다. 종묘의 어마어마한 지붕과 구조체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사직단은 주변의 어수선함과 너무 가깝다. 인간의 세계에서 신의 세계를 느끼기 전에 있어야할 전이공간도 이곳에는 없다. 또한, 그 어수선함을 누르기에는 현재 사직단의 수평이 너무 짧다.

 

 

위성사진을 살펴보다 네 신문으로 둘러싸인 돌담 영역 안에 네그루의 나무가 심어져 있는 사진을 봤다. 현장에서는 분명 보지 못한 나무들이었다. 20123월 이후에 촬영된 위성사진부터 그 나무들은 보이지 않았다. 사직단이 공원으로 조성됐을 때 심어졌던 나무였으리라. 네 신문으로 둘러싸인 돌담 영역 안은 신의 세계다. 신의 세계는 하늘과 연결돼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세계가 나무 아래 있다면 국사신과 국직신을 모시는 두 설단은 더 이상 신의 상징일 수 없다. 그렇다고 그 나무가 하늘 위까지 올라간 잭과 콩나무의 콩나무는 아니지 않은가?

 

201517일 문화재청은 사직단 복원사업의 시작을 알렸다. 20144월 국회를 통과한 <사직단 복원 촉구 결의안>의 후속조치였다. 2027년까지 진행될 이 사업을 통해 사라진 13개 건물을 복원하고 3개 동을 보수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사직동 주민센터,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 종로도서관 등을 허물어야 한다. 모두 공공시설로 인근 주민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이를 고려해서 가장 먼저 발굴작업이 진행된 영역은 이율곡 모자의 동상이 나란히 세워져 있던 전사청典祀廳권역이었다(아래사진). 우선, 이이 동상(1969. 8)과 신사임당 동상(1969.10)이 파주의 이이 유적 내 기념관 근처로 옮겨졌다. 2015 1120일에는 이곳에서 당시 건물들의 기반 뿐 만 아니라 제사에 쓰였던 우물(제정)과 방아터인 저구가 터가 발굴됐다.

 

전사청 권역 서쪽, 사직단 영역 가장 서쪽에는 단군성전이 있다. 당연히 사직단원래부터 있었던 시설은 아니고 1968년 이숙봉의 기부로 지어졌다. 이숙봉은 불교 종단 중 하나인 천화불교의 중심이었다. 그녀는 언니 이정봉과 여동생 이희수와 함께 움직였는데, 해방후 서울에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남산이었다. 그때부터 세 자매는 단군과 사직신을 모시는 성전을 짓고자 했다. 한국전쟁 후 세 자매는 인왕산 아래 누상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왕산에는 서울을 수호하는 신당인 국사당이 있다. 그런데 현재 국사당도 처음부터 이곳에 있지는 않았다. 1925년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이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던 국사당을 이곳으로 옮겼다. 어찌됐든 1960년 세 자매는 용운사를 세우고 사직공원 현성전 자리에 있던 판자집 1채를 사들여 천관암이라 이름 지어 단군성상과 사직신을 모셨다. 현재 우리가 보는 단군성전의 전신이다. 단군성전이 서울시로부터 보호문화재로 인정받은 시기는 1973년이었다. 현재 단군성전은 1990년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의 기부로 사단법인 현정회가 개축한 것이다(아래사진). 성전 내부에는 정부표준 단군영정과 국민경모단군상이 봉안돼 있다(아래x2사진). 사직단 복원사업에 따른 단군성전의 철거 문제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전사청 권역 복원 다음 단계는 논란의 중심이었던 공공시설이 있는 영역에 대한 발굴조사 및 복원사업이다('종로 사직단 원형 복원 싸고 논란', 경향신문, 2014.10.21). 시설 이용 측면에서 볼때 인근 주민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설은 두 도서관이다. 사직단 서쪽에 있는 종로도서관은 1920년 파고다공원 옆 한국군악대 자리에 설립된 경성도서관의 후신이다. 현 위치에 신축된 시기는 1968년으로 연면적 3,563. 2016 전국문화기반시설 총람》에 따르면 2015년 한해 이용객수는 1,231,407명다. 북쪽에 있는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은 1979"세계 어린이의 해를 기념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어린이 책의 천국"이라는 지위를 누리는 시설이다(2015년 이용자수 1,057,523). 최초 이 건물은 아동보건병원(1956)으로 지어졌는데 서울시교육청이 1979년 인수해 어린이도서관으로 개관했다. 하지만 어린이도서관으로의 역사는 19832월 부터 20025월까지 단절됐다. 이 기간 동안 본 건물의 소유권이 서울경찰청으로 넘어가면서 '사직동팀'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사직동팀은 청와대의 특명사건을 담당하던 '경찰청 형사국 조사과'의 별칭이다. 이 팀은 2000년에 해체됐다.

 

사직단 북쪽에 있는 이 권역에 대한 발굴작업 및 복원사업에 대한 이슈는 2017 기준으로 622년 된 역사와 38년의 기억 그리고 현재의 삶 중 우리에게 무엇이 의미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사직단 복원사업의 목적은 일제에 의해 훼손된 역사성과 민족정기 회복이다.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성장한 우리 역사의 상징을 복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직단이 지어진 조선초기는 우리에게 먼 역사다. 또한, 우리 역사가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 시점에서 농경사회는 아득하다. 반면, 어린이도서관과 야외수영장(놀이터 자리)이 운영됐던 30여년 전의 추억과 현재는 삶이다.

 

무엇보다 기억할 수 있는 시절을 희생시키고 복원하는 시설을 통해 정말 민족정기가 회복될 거라 믿는 사람은 없다. 그 주장을 믿었다면 끊임없이 종묘사직을 보존하라는 읍소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촛불을 들고 국민들이 스스로 뽑은 대통령에게 명령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 이슈에서 그나마 다행인 점은 두 도서관이 사용하는 건물의 건축적 가치가 크지 않다는점이다. 다른 형태로 현재 자리 언저리에 시설이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사직단 복원사업과 계속적인 지역주민들의 도서관 이용은 공존할 수 있다.

도시설계가 Archur

Archur가 해석하는 도시,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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