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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151주년(1866.9.18)
절두산 기념성지 / 이희태(1967)
도시설계가 Archur
2017.09.19


 

1866흥선대원군은 정초부터 프랑스 선교사 등 천주교인들을 탄압했다병인박해 였다당시 박해 때 살해된 천주교인들이 8,000여명이었다. 그 중 절두산 순교성지에서 목이 잘린 천주교인들의 수는 177명 정도였다(자료출처: 절두산 순교성지 홈페이지). 탄희성 화백의 <순교사화>는 사진이 없던 시절을 그림으로 기록하고 있다.

절두산은 과거 누에머리를 닮았다 하여 '잠두봉'이라 불렸다그리고 그 아래는 삼남지방의 조운선과 한강 유역의 선박들이 모여들었던 관문 양화진이었다교통의 요지에 기이하게 생긴 바위산까지 있었으니 꽤 눈에 띄는 장소였을 것이다눈에 띄는 장소에서는 주목받는 행동을 해야 하는 법조선은 백성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던 퍼포먼스Performance를 이곳 잠두봉과 양화진에서 했다.


 

국가가 하는 퍼포먼스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병인박해를 통한 조선의 메시지는 '경고Warning'였다경고의 내용은 조선정부는 천주교인들과 '양립할 수 없다'였다. 18C 후반이 지나면서 조선에 도입된 천주교는 본질에 가까웠다당연히 천주교는 당시 조선이 지니고 있었던 유교사회의 윤리와 충돌했다공존할 수 없는 양쪽에서 더 완강했던 힘은 당시 기득권층이었던 유교적 사회였다절두산에서 천주교인들의 목을 내리친 칼은 그 완강함의 결과였다.


 

병인박해 때 중국으로 탈출한 리델Felix Clair Ridel 신부(위 사진 왼쪽)는 중국 톈진天津에 있던 로즈Pierre Roze 제독(위 사진 오른쪽)에게 진상을 보고했고 제독은 프랑스 함대 3척을 끌고 강화도를 침범했다병인양요의 시작이다. 1866년 9월 18일 로즈 제독은 신부와 한국인 신도의 안내로 인천 앞바다를 거쳐 양화진을 통과했다이후 10월에는 함대 7척을 이끌고 인천 물치도(現 작약도 일대)에 나타났고 14일에 4척의 함정과 해병대가 강화도 갑곶진 고지를 점거했다프랑스군은 11월 11일에 강화성을 철거하고 떠났다.


 

1966년 병인박해 100주년을 맞아 양화진 순교지에 기념관 건립을 위한 현상설계를 개최했다설계 조건 중에는 "절두산의 원형을 조금도 변형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이유는 "원형을 보존해야만 백 년 전인 병인박해 당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켰던 순교자들의 숨결을 오늘날 더욱 생생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이희태가 현상설계 당선자로 선정됐다.


 

1966년 3월에 착공된 기념관은 1967년 10월에 완공됐다(설계기간 1964~1966)착공식은 한국천주교 최초의 한국인 주교 노기남 대주교가 거행했다기념관은 두 개의 장방형이 한쪽 모서리에서 만나는 형태의 평면으로 동쪽 매스Mass에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이서쪽 매스에 병인박해100주년 기념성당이 배치됐다(위 사진)기념성당 아래에는 성인 유해실과 한국순교성인 27위와 무명순교자 1위의 유해도 안치됐다.


 

건물이 완공된 1967년은 한국전쟁이 끝난지 14년이 되는 해로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당시 1인당 GNI가 45,000원이었다(참고로 2016년 1인당 GNI는 31,984,000)직접 비교가 가능한 건축물을 들자면 정부의 국책사업의 일환으로 지어진 자유센터(김수근)가 1964년에 지어졌고 이제는 꿈마루(조성룡)가 된 舊 서울 컨크리 클럽하우스(나상진)가 1968년에 완공됐다이런 시대에 국고 지원 없이 연면적 1,691㎡ 규모의 기념비적 성격의 건물을공사하기 난해한 암벽 위에 올려놓는다는 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설계자도 그리고 시공자도 경험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더해 이희태는 설익은 전통건축의 현대적 해석까지 곁들여야 했다. 당시 국가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법에 대한 공유된 규범은 없었다결국 개인의 취향에 의존해야 했는데대부분 전통건축의 형태 모티브Motive를 추상화해서 반영했다절두산 기념관에서 이희태도 마찬가지였다기념성당에는 잘린 갓 모양의 지붕을박물관에는 초가지붕을 연상시키는 매스를 올렸다그리고 그 사이에 세운 첨탑은 순교자들의 목에 걸려 있던 칼을 상징토록 했다(위 사진)첨탑이 칼의 형태를 따른 이유는 병인박해 때 일어난 죽음을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외에도 기둥의 결구(?) 방식이나 주추공포 등의 형태가 전통건축의 모습을 따랐다.


 

건축물이 무언가를 상징함으로서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면 절두산 기념성지는 주목받는 자리에 세워졌기 때문에 최적이었다병인박해 때 이 땅에서 조선의 집권세력이 천주교인들의 목을 날리면서 '그들과는 양립할 수 없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면 이희태가 설계한 기념관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을까그건 박해를 당했던 집단이 '순교자로서 우리를 기억하라(Martyrdom)'라는 메시지다.


 

그런데 어떤 메시지가 됐든 그것을 수신 받는 사람들이 동의하지 못한다면 그건 결국 메시지의 강요다조선의 집권세력이 전달한 메시지의 목적이 경고였다면 박해를 당했던 집단은 기념관을 통해 다른 목적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다그건 "조선의 집권세력이 했던 경고는 결국 아집이었고 우리는 그 경고마저 받아들이고 포용Tolerance한다"그리고 그 포용은 천주교가 추구하는 포용인류에 대한 하느님그리스도의 사랑이었다메시지의 목적이 경고에서 포용으로 바뀌면 그 장소를 주목하는 대상은 그 메시지를 수신할 수밖에 없다왜냐하면 그 메시지의 목적이 내 삶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메시지의 첫 번째 키워드Keyword가 수용되면 그 다음 따라오는 내용들은 큰 거부감 없이 전달된다종교를 떠나 이곳에서 숨을 거둔 천주교인들이 순교자라는 사실도현재를 사는 우리가 그들의 삶을 기억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일반인들에게는 거부감 없이 다가간다.


 

기념관이 완공된 1967당시 사람들에게 기념비를 통한 메시지의 전달은 지금보다 쉬웠다문맹률도 높았고 정보의 노출도 지금보다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언론과 정부의 말도 검증하는 시대다기념비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공감'되지 않으면 잔소리다절두산 기념관도 어느 시기까지는 그곳에 올려져 주목 받는 것만으로도 의도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시기를 꼬집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최근에는 그 정도 자세만으로는 의도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다왜냐하면 현재 우리사회에서 기념물은 범람하고 있고 사람들은 그 기념물들을 통해 더는 무언가를 기억하지 않으며실제 기억은 고정된 대상을 세우자마자 바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Robert Bevan은 집단기억의 파괴알마에서 "기념물은 여느 인공물처럼 도시경관의 한자리를 차지할 뿐"이고 "이런 인식에서 출발한 예술가들은 지난 수십 년간 '반기념비적'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했다.


 

그럼절두산 기념관이 의도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현재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이러쿵 저러쿵 말 많은 현재 기념관을 다시 지으면 될까난 "포용당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원할 때 갈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라만 보는 기념비/기념관'이 아니라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기념비/기념관'이 되어야 한다. '메시지의 단순한 수신'이 아니라 '내가 그 장소에 섰을 때 그 건축물이 기념하고자 하는 바를 공감할 수 있어야한다천주교 집단에서도 이 사실을 알기에 김대건 안드레아 동상(전뢰진, 1972, 위 사진)복자바위 이전(1973)절두산 순교자 기념탑(이춘만, 2001)과 같은 상징물의 설치를 어느 순간 끝내고 과거 몇 년간은 절두산 기념성지를 주변 도시조직과 연결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해왔다.


 

현재 절두산 기념성지는 성지聖地이면서 공공공간이다이런 변화가 성지의 성스러움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비판을 낳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성지가 어떤 의미를 지녀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다른 방식으로 성스러움을 느끼는 장소라 볼 수도 있다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절두산 위에 무리하게 올려진 예배당과 박물관의 위치는 오히려 공공공간(의 공간)에서 성지(의 공간)로 장소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유리한 조건이다예배당으로 연결되는 북쪽의 계단과 박물관으로 연결되는 동쪽의 경사로가 전이공간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아래사진).

도시설계가 Archur

Archur가 해석하는 도시, 건축.
저서. <닮은 도시 다른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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