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신고 119.
생명과 직결된 번호이기에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이 알고 있는 상징이다. 그 상징이 너무 강력해서 다른 무언가가 끼어들 여지는 없어 보인다. 1991년 소방법을 개정할 때 11월 9일로 '소방의 날'이 제정될 때도 119가 갖는 강한 상징성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오히려 의도하지 않은 1991년이라는 시기가 '소방'이라는 키워드Keyword 앞에 1과 9라는 숫자 외에 다른 숫자는 끼어들 여지가 없는 듯한 생각마저 들게 한다.
문제는 119가 가지고 있는 강한 상징이 뻔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뻔함을 만들기도 한다. 도시를 돌아다니다 보면 종종 소방서 건물 입면에 표현된 '119'를 본다(위 사진). '누구나 아는 그래서 너무나 강력한 '화재신고는 119'라는 사실을 굳이 건물 입면에 까지 새길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결국 '설계자가 그 강함 앞에서 무엇 하나 할 생각이 없었구나' 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설계자들도 있다.
이제는 서울의 랜드마크Landmark가 된 DDP 동쪽에는 을지로 119안전센터가 있다(위 사진). 을지로 119안전센터가 기존 소방서 건물과 다르게 설계된 배경에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과 인접해 있다는 입지적 특성을 감안한 서울시의 조치가 있었다. 서울시는 경관적인 조화를 위해 특별경관관리 설계자를 대상으로 지명경쟁입찰을 통해 설계를 맡겼는데, 그 설계자가 류재은&시건축이었다.
류재은은 "건물 부지의 지형과 공원이 조성된 주변 환경과의 조화에도 특별히 신경을 썼다"고 한다. 무엇보다 "공공시설은 무엇보다 주민들이 편하고 개방적이어야 하며, 주변을 압도하는 형태보다는 오히려 낮은 자세로 주변과 어울리는 것이 훨씬 적절하다"고 판단했다(시건축 홈페이지). 을지로119안전센터는 동서로 긴 장방형 매스Mass가 소방차가 정차돼 있는 차고와 어긋난 상태로 적층돼 있다. 그리고 그 두 매스 사이에 '119'라는 싸인Sign이 붙은 빨간색 매스가 끼워져 있다. 을지로119안전센터에서 가장 눈에 띄는 떠 있는 장방형 매스는 블록의 방향성을 따랐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DDP가 지어지는 동안 '동대문디자인프라자&파크 홍보관'이 있었는데, 홍보관이 을지로119안전센터와 비슷한 디자인이었다(아래사진).
을지로119안전센터는 2009년 준공됐다. 그리고 2013년 구로119안전센터가 준공됐다. 설계자는 황두진이었는데, 개인적으로 그와 만났을 때 황두진은 "도시의 축과 맥락을 고려해 작업했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구로라는 동네에 어떤 맥락Context이 존재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황두진이 구로라는 동네에서 잡아낸 맥락은 뭘까?' 궁금해졌다. 구로구는 1964년 4월 15일에 지정된 '구로공단'으로 시가지가 이루어진 동네다. 우리에게 현재 더 친숙한 '서울디지털국가산업단지'는 '구로공단'의 후신後身이다(아래 위성사진). 서울디지털국가산업단지는 서울에 있는 유일한 국가산업단지다. 면적은 1,922,000㎡로 1단지는 구로구 구로동에, 2,3단지는 금천구 가산동에 있다《2016한국산업단지총람, 한국산업단지공단》.
지금 이곳에는 공장보다 업무시설이 더 많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과거 아파트형 공장, 현재 지식산업센터. 대부분의 공장부지가 지식산업센터 혹은 아울렛 형태의 판매시설로 재건축됐다. 하지만 배후 지역의 변화는 공장부지에 비해 거의 없다. 재개발·재건축 사업을 기대하지만 이는 자본의 힘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재개발·재건축 사업은 각 대지 소유자들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미래에 대한 소유자들의 기대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변화가 더딘 지역에서 우리는 과거를 읽어낼 수 있다. 그래서 구로공단의 흔적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과거 공장 부지가 아닌 배후 지역으로 가야 한다. 서울디지털국가산업단지 배후 지역에서 읽어낼 수 있는 구로공단의 흔적은 부족한 도시기반시설과 높은 밀도의 다세대,다가구 밀집지다. 그 중 살아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는 도시기반시설의 부족함은 도로다. 이 일대 도로는 좁다. 양방향 통행이 아슬할 정도다. 사실 이런 상황은 서울시내 다세대, 다가구 밀집지라면 비슷하다. 다만 이 일대 좁은 도로는 비교적 곧다. 공장이 들어서 있는 지역이다 보니 지형이 심하지 않고 적정한 기반시설은 아니더라도 공업단지 배후지로서의 역할을 필지를 구획할 당시 고려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특징은 다세대, 다가구 밀집지 내부의 좁은 도로에 비해 블록Block 바깥을 감싸는 도로에는 고가차도나 지하차도와 같은 입체화된 도로시설이 많다. 주변에 철도, 간선도로와의 교차를 입체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공단의 물류 처리를 원할하게 하기 위함이다. 블록 바깥을 감싸는 도로의 차량 속도가 빠르다 보니 이 도로에 면한 건물들의 간판은 크다. 그래서 이 일대는 서울의 비슷한 다세대,다가구 밀집지보다 더 어지럽다. 구로119안전센터가 딱 이런 상황 속에 놓여 있다.
구로119안전센터 전면(동쪽)을 지나는 구로동로는 왕복4차선으로 블록 바깥을 지나는 도로다. 계획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명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이 일대 비중있는 간선도로를 연결하는 보조간선도로의 위계다. 구로119안전센터 전면에서 7시 방향으로 분기하는 구로동로35길은 왕복2차로로 250m를 내려가 가마산고가차도에서 끝난다. 도로의 기능으로 따지자면 집분산도로다. 구로동로와 구로동로35길은 건물 앞에서 30도 정도 벌어져 있다. 그리고 건물 남쪽으로 구로동로35자길이 블록 내부로 들어간다(위 위성사진 참고).
황두진이 구로119안전센터 프로젝트에서 읽어낸 도시의 맥락은 바로 이 '세 길의 교차점'이었다. 그는 30도 정도로 갈라지는 구로동로와 구로동로35길이 가지고 있는 방향성을 매스의 형태로 받아줬다. 구체적으로 구로119안전센터의 저층부 매스는 비슷한 높이의 건물들(2층 이하)이 늘어서 있는 구로동로35길의 방향성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고층부 매스는 역시 비슷한 높이의 건물들(4층 이상)이 늘어서 있는 구로동로의 방향성을 따른다. 이로 인해 구로119안전센터의 매스 전면부는 저층부 두 개층(B1~1F)이 고층부 세 개층(2F~4F)에 비해 후퇴돼 있다(위 사진). 이런 방향성은 두 도로를 따라 늘어서 있는 주변 건물들의 입면을 따라 바라봤을때 확연하게 드러난다.
황두진은 이런 차이를 단순히 매스의 형태에 그치지 않고 기능 배치와 외관재의 다름으로 확장시켰다. 저층부에는 업무공간(차고, 사무실)을, 고층부에는 대기 및 휴게공간과 공용공간(체력단련실, 식당, 의소대회의실 등)을 배치했다(연면적 813㎡). 그는 이러한 배치를 통해 소방서의 "핵심공간(차고와 사무공간)을 외부로 적극 드러내어 개방적이며 열린 이미지를 만들고자 했다(-황두진 홈페이지-)." 구로119안전센터의 외관 이미지를 결정하는 익스펜디드 메탈Expanded metal은 고층부에만 적용시켰다. 앞서 언급한 저층부와 고층부의 다름을 외관재까지 확장시킨 결과이기도 하지만 더 많이 노출되는 고층부의 직사광선을 막고 적절한 채광 및 개방감을 확보하기 위함이기도 하다(아래사진).
황두진이 구로119안전센터의 저층부 매스와 고층부 매스를 각각 다르게 처리한 방식은 그가 오래전부터 발전시켜온 '중첩된 기하학'이라는 건축개념의 결과다. 중첩된 기하학은 "한 건물 안에 서로 다른 기하학적 체계가 공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황두진은 "서로 다른 기하학은 역시 서로 다른 구조 및 재료, 즉 구축술과 결합하여 각 공간 안에서의 건축적 경험을 더욱 풍부하고 깊이 있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봤다. 여기에 더해 '중첩된 기하학'이 더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무지개떡 건축 개념'과 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지개떡 건축의 핵심은 "수직적으로 다른 기능이 들어가는 것"이다. '수직적으로 각각 다른 기능'과 이에 적합한 기하학적 특성을 대응시키는 것이 '무지개떡 건축 개념'과 '중첩된 기하학'의 만남이다. 황두진은 "'중첩된 기하학'은 '복합'이라는 기능적 개념에 대응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훌륭한 건축적 전략"이라고 말했다《무지개떡 건축: 회색도시의 미래, 황두진, 메디치미디어》
결국, 황두진이 본 프로젝트에서 '세 길의 교차점', '중첩된 기하학', '무지개떡 건축'을 통해 반영하고 싶었던 맥락은 '고밀'이라는 밀도였다. 그는 우리가 "저밀도 전근대 도시 바로 위에 고밀도 현대 도시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처절한 '밀도전쟁'을 해왔다고 봤다. 그리고 그 전쟁의 결과는 "밀도를 만들어내자니 역사를 파괴해야 하고, 역사를 보존하려니 도시 기능을 포기해야 하는, 해묵은 딜레마"였다《무지개떡 건축: 회색도시의 미래, 황두진, 메디치미디어》. 그런데 구로119안전센터가 지어진 땅은 구로공단 배후지역이라는 역사 -이것도 역사라고 인정한다면- 가 고밀로 드러난 맥락을 지니고 있었다. 이 땅에서 설계자는 딜레마를 겪을 필요가 없었다. 다만, 딜레마를 푸는 것보다 더 쉽지 않을 수 있는 '도시기반시설이 부족한 고밀지역'이라는 특징 아닌 특징을 맥락으로 인정해야 했다. 이는 구로공단 배후지역을 그 자체로 맥락을 지닌 서울의 한 지역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구로공단'의 명칭을 '디지털단지'로 바꾸고, 노동자생활을 체험시설로 타자화시키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서울이라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맥락은 파리나 유럽내 도시들처럼 역사성이 강한 맥락은 아니다. 오히려 서울의 맥락은 어수선하게 만들어진 지금의 서울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황두진에게는 이미 북촌과 서촌에서의 경험이 있었다. 그는 舊 열린책들 사옥(2000)에서 서촌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의 맥락으로 봤고 가회헌(2006)에서 한옥과 뒤섞인 어수선함 그 자체를 맥락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두 지역은 서울에서 한옥이든 뭐든 맥락이 있다고 인정되는 지역이다. 구로라는 동네와는 비교할 지역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별거 아닌 구로동로와 구로동로35길 양쪽에 들어선 별거 아닌 건물들에 맞춰진 구로119안전센터의 입면을 보면서 그 별거 아님마저도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