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건축가들이 얘기하는 건축과 지원 동기를 들어보면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미대를 지원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어서 선택했다는 내용이 많다. 미대를 지원할 수 없었던 이유는 돈이 안 된다는 것과 -뭐 같은 맥락인데- 집안의 반대. 그래서 그런지 그림 잘 그리는 건축가들이 참 많다. 스티븐 홀Steven Holl도 그림 그리는 -'잘'은 잘 모르겠지만- 건축가 중 한 명이다. 심지어 위키피디아Wikipedia에서 스티븐 홀은 건축가이자 화가, 특히 수채화가Colorist로 소개돼 있다.
스티븐 홀은 1947년 12월 9일에 워싱턴Washington주 브레머턴Bremerton에서 태어났다. 올해 그는 칠순이다. 그의 아버지는 대학에서 그래픽 아트Graphic Art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가 괜히 열심히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었다. 실제 그는 워싱턴 대학교the University of Washington을 다니면서도 건축에 흥미가 별로 없어서 미술대학의 수업을 주로 들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스티븐 홀이 건축과 미술 중 어디로 진로를 결정할지 모를 때 건축가의 가능성을 보고 조언을 아끼진 않은 사람은 당시 미대 교수였다.
대학 시절 스티븐 홀이 건축과에서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건축 역사와 이론이었다. 그가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헤르만 푼트Hermann Pundt(위 왼쪽 사진)의 가르침이었다. 결국 스티븐 홀은 1970년 대학 졸업 후 로마 건축상을 받아 유럽 여행을 했다. 의외이기는 한데 그가 실무를 익힌 곳은 건축사무소가 아닌 조경건축가 로렌스 헬프린Lawrence Halprin(위 오른쪽 사진) 사무소였다.
스티븐 홀은 1976년 AA스쿨에 입학했고 졸업 후 뉴욕으로 와서 'Steven Holl architects'라는 이름의 사무소를 차렸다. 지인의 주선으로 위 이미지>에 참가해서 《Progressive Archiecture》가 주는 상을 받았지만 사무소를 차린 후 10년간은 꽤 고생했다고 한다. 사무소 설립 초기에는 설계작업 보다는 시라큐스 대학이나 파슨스 디자인 스쿨, 컬럼비아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이 더 많았다.
스티븐 홀이 사무소를 차렸을 때 함께 일했던 레베우스 우즈Lebbeus Woods는 스티븐 홀에게 가장 중요한 건 "건축 이론이 아니라 철학과 과학에서 비롯된 개념들, 즉 사고思考"라고 강조했다. 우즈에 따르면 스티븐 홀이 생각하는 건축은 "아무리 고상한 것이라 해도 오로지 그 자체의 형식적 원칙에만 응답하는, 세상과 동떨어진 특별한 예술이 아니라 인류의 폭넓고 다양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예술"이었다. 허버트 마이어스Herbert Meyers와 리처드 거스트먼Richard Gerstman이 쓴 《크리에이티브 마인드Creative Mind, 에코리브르》에서 스티븐 홀은 "건축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는 일"이기 때문에 "모든 측면을 연구하고, 기본 요소들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가 생각했던 건축가가 해야 할 일은 실용적 통찰을 위해 직관을 항상 유지시키는 것이었다.
2012년 미메시스에서 스티븐 홀의 건축 철학을 정리한 《스티븐 홀, 빛과 공간과 예술을 융합하다》라는 책이 나왔다. 책에서 스티븐 홀은 자신의 건축을 설명하는 네 개의 키워드Keyword -①Pro Kyoto, ②Compression, ③Porosity, ④Urbanisms- 를 제시했다.
스티븐 홀이 'Pro Kyoto'에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작업으로 꼽은 프로젝트는 'Whitney Water Purification Facility and Park(2005)', 'Oceanic Retreat(2001)' 그리고 'The Swiss Residence(2006)'였다. 이 외 Fukuoka Nexus World Kashii(1991)에 설계한 집합주택(Void Space/Hinged Space Housing, 위&아래사진)도 아주 살짝 언급했다.
이 집합주택의 1~2층 매스는 북쪽이, 2~5층 매스는 남쪽이 비워져 있다. 스티븐 홀은 북쪽을 향한 네 개의 빈공간은 동적이고 남쪽을 향한 네 개의 빈공간은 정적이라고 봤다. 그리고 이 빈공간들이 건물에서 맞물려 "내부의 삶에 신성한 느낌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주변 도시를 연결된 공간Hinged space에서 고요한 빈 공간Void space으로 변모시키는 매개체"라 설명했다. 건물 1층부 남쪽은 전면도로에 대응될 수 있도록 빈공간이 없다. 건물내 개별 세대는 90㎡~185㎡ 크기로 5가지 평면으로 설계됐다. 전체 35세대다.
두 번째 키워드 'Compression'은 "유쾌한 경험적 현상을 만들어 내는 하나의 컨셉을 통해 프로그램, 장소, 공간 디테일Detail 등 다양한 요건들을 응집하는 것"이다. 사실 스티븐 홀은 건축에서 축소 가능한 요건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Compression'으로 설명되는 작업 중 맨해튼Manhattan에 설계한 'Storefront for Art and Architecture(1993, 위&아래사진)'가 있다.
장변 6m, 단변 1m에 불과한 협소한 대지에 스티븐 홀이 비토 아콘치Vito Acconci와 함께 작업한 부분은 30m 길이의 1층 파사드 리노베이션Facade Renovation이었다. 수직 혹은 수평으로 회전하는 10개의 패널Panel을 통해 92㎡에 불과한 내부공간과 전면 가로(Kenmare st)가 시각적, 동선적 그리고 조금 억지를 쓰자면 이용적으로 연결된다. 별도의 입구가 있지만 Kenmare st을 걷는 보행자는 마음만 먹으면 어떤 패널의 열린 부분을 통해 건물 내부로 들어설 수 있다. 또 때로는 가로와 약간의 높이차를 두고 뚫려진 패널의 열려진 부분에 걸터앉아 잠시 쉴 수도 있고 수평으로 열려진 패널에 자신의 소지품이나 마시던 커피를 올려놓을 수도 있다.
어떤 개구부를 통해 내부로 들어갔다 다시 다른 개구부를 통해 외부로 나가기를 몇 번 반복해 보면, 정면의 높이에 맞춰 높게 뚫린 개구부에서는 전면 가로에서 벌어지는 행위가 한 번에 보이기도 하고 보행자 무릎 높이 정도로 뚫린 개구부에서는 움직이는 발만 보이기도 한다. 또한 정면과 비스듬하게 열린 틈으로는 외부에서 내부를 응시하는 누군가와 갑작스레 눈이 마주치기도 한다. 건물의 개구부나 틈을 통해 외부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가로를 따라 걷는 보행자의 모습조차 분절되어 마치 다른 사물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 번째 키워드 'Porosity'는 "단단하고 독립적인 물체 형태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연속된 공간들의 현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스티븐 홀은 "공간들 안에서, 주위에서, 사이에서 건축을 경험함으로써 다양한 정서와 기쁨을 느끼게 된다"고 생각했다. 'Porosity'를 쉽게 생각하면 원이 타공된 재료를 입면에 사용하는 것인데 이는 너무 직접적이고 영역과 영역을 넘나드는 크고 작은 건축적 장치들이나 매스 형태로 이해하면 쉽다. 2001년 준공된 Bellevue Art Museum(위&아래사진)이 여기에 해당된다.
Bellevue Art Museum의 개념은 "세 가지로 이루어진 비변증법적 개방성Non-dialectic openness"을 의미하는 'Tripleness'다. 여기서 세 가지는 경험Experience-사고Thought-접촉Contact, 3개 층, 3개 갤러리, 3개의 다른 빛 상태 그리고 3가지 순환 방향이다. Bellevue Art Museum 안에는 이런 개념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개방 공간이 있다. 이 중 뮤지엄 로비Lobby 역할을 하는 포럼Forum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위 오른쪽 사진). 상층 갤러리로 연결되는 경사로도 포럼에서 시작된다. 스티븐 홀은 사람들은 점점 더 큰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모인다고 믿었는데, 이 믿음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포럼이다. 그래서 Bellevue Art Museum의 포럼은 가장 크고 가장 밝다.
마지막 키워드 'Urbanisms'은 "기폭제로서의 건축과 21세기 빌딩 배치에 대한 재고"로써 "새로운 건축 프로젝트를 통해 자연 풍경의 관점에서 바라본 밀집 도시의 새로운 비전Vision"을 의미한다. 계획안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스티븐 홀이 2007년 있었던 동대문운동장 부지 지명초청현상설계에서 제시했던 'Weave(위 이미지)'라는 개념이 여기에 해당된다. 계획안에서 'Weave'는 ①짜임이 형태로 된 이중수평과 수직적공원, ②역사적인 건축물-전통정원-자연발생적인 길들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서울 강북의 형태, ③인근 패션 및 텍스틸 지구의 새로운 역할 의미, ④자연경관- Urbanism-건축이라는 세가지 요소의 21세기형 조합을 의미했다.
자신의 건축언어를 설명하는 네 가지 키워드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스티븐 홀이 개념Concept에서 건축을 시작하는 방식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가 워싱턴 대학교 건축학과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이유, 실무를 건축사무소가 아닌 조경건축가인 로렌스 헬프린 사무소에서 시작했던 이유도 모든 프로젝트는 '개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실제 스티븐 홀이 "건축학도들에게 진심으로 해주고픈 충고"도 "좋은 컨셉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좋은 컨셉은 디자인의 원동력이며, 철학적 바탕이 다른 반대자들 앞에서 자신의 디자인을 방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하나 추가하자면, 스티븐 홀이 처음으로 실무를 시작하고자 했던 곳은 루이스 칸 사무소였다《건축을 시로 변화시킨 연금술사들, 황철호, 동녘》. 이 또한 개념을 중요시한 자신의 철학 때문이었는데, 결론적으로는 루이스 칸 사무소에서 실무 경력을 쌓지 못했다. 이유는 루이스 칸 사무소가 있었던 필라델피아로 갈 준비를 하던 중 루이스 칸의 부음을 접했기 때문이다. 스티븐 홀은 루이스 칸이 했던 "건축은 존재하지 않는다. 건축의 정신이 존재할 따름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따라서 건물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아주 작아도 상관없다. 나는 아주 작은 것 안에 거대한 정신을 담을 수 있다고 믿는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