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사이클” (리사이클의 하위 개념들 중 하나) 을 주제로 하는 디자인 전시회의 공간계획을 맡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디자인 전시회는 짧은 기간 동안 최대한 강렬한 체험을 연출하고자 하는 의도로 기획됩니다. 잠깐 동안의 강한 효과를 쉽고 빠르게 만들어내려 하다 보니, 보통, 전시 준비가 완료된 시점과 전시가 끝나는 시점이 되면 적지 않은 양의 폐기물이 발생하게 됩니다.
먼저 갖게 된 문제의식은, “재활용”을 주제로 하는 디자인 전시회의 전시 공간 연출 과정에서 재활용될 수 없는 폐기물이 많이 발생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전시 공간은 완성된 작품을 왜곡 없이 고스란히 드러내기 위한 공간입니다. 그래서 작품을 적당한 높이로 올려 놓기 위한 ‘받침대’ 라던지, 공간을 구획하기 위한 ‘가벽’등의 공간 구성 요소들은, 아무런 표정 없이 막혀있는 백색을 띄는 것이 보통입니다.
깨끗하고 하얗게 비워진 받침대(white cube) 위에 최종적으로 완성된 근사한 작품이 사뿐히 얹혀 있는 모습은, 지금까지의 전시회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풍경입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결과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은 오래된 믿음이었습니다. 전시회의 주제가 “재활용”이라면, 그 믿음은 한결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작품이 얹혀 있는 받침대가 “추상적인 백색 덩어리” (white cube) 가 아니라, 과정에 대한 정보를 넌지시 전달하는 어떤 “느슨한 매체”가 된다면, 한결 재미있고 풍성한 체험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플라스틱은 친환경적인 재료는 아니지만,여러 번에 걸쳐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플라스틱 수납 상자는충분히 “친환경적”입니다.
작품이 얹히는 “받침대”와 전시공간을 분할하는 “벽”을 속이 훤히 보이는 플라스틱 수납 상자를 쌓아서 만든다면,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문제의식에 대한 좋은 대답이 될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쌓아 올리기에 적당하도록 디자인된 기성 제품이 있었습니다.
전시를 위해 한참 작업 중인 작가들에게 수납 상자를 보내고 쓰레기통으로 사용하게 해 보자.
작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부산물들이 자연스럽게 수납상자 안에 쌓일 것이다.
그렇게 채워진 수납상자들로 벽을 만들고 받침대를 만든다면, 보다 입체적인 정보가 전달되는, 깊은 풍경, 깊은 전시회가 연출될 수 있겠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수납상자에 전시회의 타이틀을 인쇄할 수도 있습니다. 전시가 끝난 다음에, 이렇게 표기된 수납상자들을 원하는 분들께 나누어 드린다면, 전시를 통해 전하려 했던 메시지가 전시가 끝나고 받침대와 가벽이 해체된 다음에도 살아남아 보다 넓게 퍼지게 될 것입니다.
테스트 삼아 만들어 본 가벽입니다.
반투명한 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여진 풍경은 복잡한 설명 없이 감각적으로도 예뻐 보입니다만, 사실은 그다지 참신한 광경은 아닙니다. 특히 일본 건축가들이 많이 구사하는 스타일이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감각적으로, 그리고 일차적으로 소비되는 스타일로서의 풍경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저로서는, 그렇게 연출된 풍경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과 그 풍경으로 인해 어떤 상황이 펼쳐질 것인가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층적으로 이해된” 풍경을 저는 “깊은 풍경”이라 부릅니다.)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리사이클(recycle)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전시공간이 아닌,리사이클(recycle)의 실제 구현을 유도하는 전시공간 계획.
완성된 작품을 반영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기획, 전시, 해체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