밈하우스 건축이야기

출판사+카페+단독주택

"처음이란 것은 언제나 그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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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엔 건축의 독립 후 첫 주택설계 건물이다.

​좋은 마을에 좋은 집을 만들고 싶었다.

#1. 혼자 사는 젊은 여성 사업가를 위한 사무소 겸 주택설계

건축사사무소를 개소하고 나서 첫 주택설계에 들어갔다. 건축주는 서울에서 출판 사업을 하다가 제주도에 새로운 삶터를 잡는 여성 사업가. ‘처음’이란 것은 언제나 그러한가. 나의 이름을 걸고 클라이언트를 맞이하게 되니 내 마음속엔 복잡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건축주는 어떤 사람이고, 나는 또 어떤 건축물을 계획할 수 있을까. 이전 회사들에서 설계할 때 건축주와의 소통이 부족했던 점들을 생각하며, 이 집에 살게 될 사람에 대한 이해에 초점을 맞춰보자고 되뇌었다.

#2. 건축주를 만나다

간단한 인사 후 바로 오등동 대지로 향했다. 건축회의를 할 생각에 나만큼이나 잠을 설쳤다는 건축주는 오등동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부터 들뜬 목소리로 짓고 싶은 집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녀는 집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주어진 경제적 조건 내에서 무엇을 버리고 취해야 하는지 누구보다도 더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나지막이 얘기를 했다. 집을 짓겠다고 결정한 순간부터 자신의 인생을 새로이 되돌아보게 된다고.

그녀는 ‘건축’을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철학적’이라고 했다. 나는 의아스러웠다. 내가 생각하는 철학은 무겁고 낯선데 말이다. 한때 건축이 예술인지 기술인지 그 사이에서 고민했던 적은 있으나 철학과 연관 지어본 적은 없다. 그리고 그녀는 건물을 짓는 과정은 책을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며 그녀만의 깨달음을 이야기했다. 난 아직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훗날 내가 그녀의 도움을 받으며 책을 만들게 된다면 그 말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3. 나는 행운아다

건축주는 과도하게 디자인된 건축 작품이 아닌 자신의 삶이 녹아든 집을 원했다. 건축사를 믿사오니 알아서 잘만 설계해달라고 전적으로 맡기지도 않았다. 본인을 닮은 유일한 집, 삶을 재충전하고,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집. 그리고 그 지역에 녹아들어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그런 집을 원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마을과 그리고 지역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싶다 말했다.

집이란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한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와 변화해갈 미래까지 담아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수 십 년간 우리는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사용가치보다 최대수익을 위한 교환가치에 집중을 해왔다. 이렇게 정체성을 잃어가는 주택 가치는 단순 바닥면적으로만 환산된다. 다행히 나의 첫 건축주를 만나고보니 조금씩 변화의 물결이 느껴진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속에 내가 있고 나의 집이 공존한다는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간다. 좋은 건축을 만드는 것은 건축가의 역할보다는 건축주의 역할이 더 크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본인을 닮은 집.

삶을 재충전하고,

소소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집.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집을 원했다.

#4. 한라산을 배경으로 낮은 건물이 아기자기 있는 작은 마을

따사로운 햇살을 쏟아내는 날, 맞은편 대지의 노란 유채꽃 밭이 너무나 아름답다. 간단히 마을을 거닐어 본 후 본격적으로 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예산. 최근 급등한 제주도의 땅값 때문에 대지 매입에 예산의 절반이 나갔다. 현재 지목이 과수원이라 집을 지을 수 있는 대지로 형질 변경과 농지 전용에 드는 비용도 많을 터다. 나는 주택설계에서부터 준공까지의 일련의 과정과 예산부족으로 인한 건축공사의 위험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충분한 자금이 있다면 걱정이 없다. 그러나 예산이 모자라지만 희망적인 기대로 공사를 진행하다가 준공에 이르지 못하면, 건축주가 잃거나 손해 보는 것이 너무도 커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안전하게 공사가 끝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시켜드려야 했다.

#05. 제주다운 건축이란 무엇일까..?

어릴 적 제주도에 살면서도 제주스러운 건축에 대해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제주에서 나는 재료와 공법을 적용하여 현대화된 건물을 지었으면 좋긴 하겠는데... 그게 무엇이란 말인가!

"돌건축으로 하고 싶어요." 건축주는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제주 민가나 귤창고를 보고 너무 좋아했다. " 제주스럽다는 것이다." 처음 그녀가 제주도에 이사하려고 마음먹고 나서 이미 지어져 있는 돌로 지어진 건물을 매입하러 여기저기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예전에 지어진 돌건물을 개조해서 민박집이나 카페 등을 운영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돌건물은 인기가 올라가고 가격이 높아졌다. 결국 그녀는 자기가 원하는 건물을 직접 짓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돌건축으로 하고 싶어요.”

#6. 손맛이 나는 돌건축

우리가 생각하는 석재 쌓기는 정교하게 돌을 다져 올리는 것이 아니라, 거친 손맛이 나는 제주식 건축이다. 돌도 이미 재단되고 잘 깎여진 것이 아니어도 좋다. 시멘트벽돌로 내벽을 쌓고 그 바깥에 돌을 쌓아 시멘트 바름을 하자. 내 생각에는 그리 비싸게 공사비가 들지 않더라도 가능할 것 같다. 적어도 사람들이 많이 방문하는 출판사와 카페가 있는 1층은 돌건축으로 하기로 했다.

#07. 디자인 방향

Simple & Modern

귤 창고 혹은 제주민가 같은 박공지붕지역재료 사용

Reading Cafe

책을 매개로 주민과 나누는 문화 공간

No-Furniture

가구를 없애 인테리어 비용 절감

White Vintage

벽지 대신 흰 페인트로 마감시간성이 묻어나는 내추럴한 이미지

Flexible Space

가족과 지인들을 위한 공용 공간 확장/변화가 가능한 가변적인 인테리어

#08. 산고를 겪지 않은 주택이 있을까

갑자기 인접대지에 건축공사가 시작되었다. 단독주택 필지로 분양한다던 대지에 갑자기 단지규모의 집합주택이 들어온단다. 밈하우스 남측에 4층짜리 건물이 들어서니, 채광은 물론이거니와 한라산 조망까지 다 가리게 생겼다. 공중에 떠있는 듯한 2충 매스에는 한라산을 바라볼 수 있는 멋진 발코니가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휴식과 사색의 발코니 공간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오히려 사생활 보호를 위해 막아야 할 불필요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이.럴.수.가...." 결국 한라산 조망을 포기하고 급히 정원이 있는 동쪽에 발코니를 새로 만드는 설계변경에 들어갔다. 오등동이라는 작은 마을에 지역과 더불어 소박한 주택 하나를 지으려는 작은 계획은 제주도의 급박한 개발행위 앞에서 무력해졌다. 결국 정원을 중심으로 한 내부지향형 건물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집 짓는 과정을 유쾌하게 엮어보려는 우리의 계획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09. 제주를 닮은 집

한 건물에 일터와 주택이 공존해 있는 밈하우스. 1층이 복잡한 일터이자 만남의 공간이라면, 2층은 휴식과 쉼의 공간이 된다.

1층이 어둡고 거친 현무암이라면,

2층은 밝고 편안한 바다와 하늘을 닮았으면 좋겠다.

#10. 실수를 하다

1층 내벽 쌓는데서 실수가 생겼다. 주방의 낮은 칸막이벽을 천정까지 올려버린 것이다. 놀란 마음에 다음날 첫 비행기로 제주로 내려가 벽돌을 모두 뜯어내었다. 그런데 도면대로 시공되지 않은 게 또 하나 더 있었다. 화장실 문의 위치가 바뀌어 주방과 화장실 문이 서로 마주 보고 열리게 된 것이다. 건축주는 부엌이 집안 부인이라면, 화장실은 둘째 부인이라서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어른들로부터 전해 들은 터라 이런 실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물 쓰는 공간이라는 것은 비슷하지만, 어쨌든 서로의 공기가 다르니까. 결국 모두 뜯고 재시공하기로 하였다.

#11. 마무리 작업

밈하우스를 처음 설계를 의뢰받았을 때는 60여 평의 ㄱ자형 2층 건물이었다. 넓은 거실과 부엌은 한라산을 향해 있었고, 1층 사무실 옆에는 손님들이 머무를 수 있는 원룸형의 게스트룸도 있었다. 그러나 설계를 진행하다 보면 처음에 생각한 프로그램과 공간의 크기들이 변하기 마련인가 보다. 게스트룸도 사라지고 2층 주택도 줄어들었지만, 그만큼 좀 더 넓은 정원을 갖게 되었고 추후 시간이 지나면서 정원 쪽으로 공간을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인접대지 신축공사로 한라산을 바라보는 테라스는 벽으로 막혀져버렸지만 대신 정원을 향한 넓은 발코니 창이 생겼다. 폴딩도어를 활짝 열면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중정이 그녀의 품에 안긴다.

#12. 마지막 밈 이야기

생각보다 제주 오등동은 빠르게 변해간다. 밈하우스의 왼쪽도... 오른쪽도... 뒤편도... 앞도..... 온통 공사현장이다. 작은 마을에서 갑자기 도시 풍경으로 변화한다. 정면에 있던 커다란 소나무도 잘려 나간 지 오래다. 마을은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밈하우스만은 마을풍경 속에 남아 책과 함께 쉬어갈 수 있는 편한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설계: 이엔 건축사사무소

위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도: 출판사, 카페 + 단독주택

대지면적: 232 ㎡

건축면적: 115.90 ㎡

연면적: 177.38 ㎡

높이: 9.3m

구조: 철골구조, 조적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