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과 발로 풍경을 읽어내는 사람이고
읽어낸 풍경을 꾸준히 기록하는 사람이고
그 기록들을 양분 삼아 디자인을 풀어내는 사람입니다.
- 전문분야
- 설계
- 대표자
- 천경환
- 설립
- 2011년
- 주소
- 서울 종로구 창덕궁길150-5 깊은풍경건축사사무소
- 연락처
- 02-525-0429
- 이메일
- lazybirdc@naver.com
Posted on 2017.01.18
- 동대문디자인플라자 #01. 시퀀스
- 재미나요 l 서울의 발견
‘서울시 디자인레터’에 실릴 내용을 취재하기 위해, 안개님과 함께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이하, ‘디디피’)에 다녀왔는데요. 그 내용을 정리해서 일단 여기에 먼저 올립니다.
아시다시피 디디피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이루는 지형의 일부로 조성되어, 사방에서 접근할 수 있게 설계되어있습니다. 덩치도 크거니와 출입구도 여럿이고, 또 내외부의 공간이 다양한 레벨에서 입체적으로 엮여져 있는지라,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낼 것인가’ 라는, ‘관찰의 시퀀스’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선택을 할 수 있겠는데, 지하철역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으로 답사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흔히 접하는 지하철역 지하보도의 풍경입니다. 맥락이 지워진 ‘무균 공간’을 걷다 보면, 문득 살짝 기울어지는 완만한 형상의 입구와 마주하게 됩니다. 디디피가 홀로 ‘잘 나가지’ 않고, 성공적으로 주변 동네와 함께 공존하며 활력을 퍼뜨리기 위해서, 우선 이 지하보도가 활성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 공간은 평범한 지하보도와는 어떻게든 다르게 디자인될 필요가 있습니다. 깔끔하고 지루한 통로로 끝내기에는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통로를 겸한 어떤 다른 기능이 함께 부여되어야 할 것입니다.
살짝 기울어진 기둥윤곽과 둥글게 말려들어가는 경계부분처리가 디디피의 디자인 정체성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문을 통과하면 열주로 이루어진 또 다른 경계와 마주하게 됩니다.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이동하는, 가슴 벅차도록 극적인 체험입니다.
먼저 마주치게 되는 것은, 노출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거대한 육교입니다.
건축의 스케일을 넘어서는, 토목 스케일의 크기인데요. 얼핏 과장된 몸짓으로 보이는데, 건물을 주변 도시 맥락과 연결하여 묶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었습니다. 건물의 형상이 워낙 떠다니듯 유동적인 이미지인지라, 강하게 묶어주는 몸짓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음직합니다.
널리 알려진 조감도의 시점에서는, 이 육교가 ‘동대문역사문화공원교차로’에서 디디피로, 대각선 방향으로 연결되는 상황이 잘 드러납니다. 그런데 사실, 육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부터의 지상 유동인구량은 그다지 크지 않고, 당분간은 그리 크게 늘어날 것 같지도 않아 보입니다.
오히려 육교의 흐름이 제대로 ‘기능’하는 것은, 지하철역으로부터 직접 연결되는, 아랫부분입니다. 그래서 육교라고 말하기 보다는 지하철 연결통로를 이루는 회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 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회랑은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인데, 상부의 ‘판’과 지탱하는 ‘보’의 접합부분이 살짝 접히듯 파여지는 식으로 연출되어 있었습니다. 덕분에 한결 가뿐해 보이는 효과가 생기는 것이죠.
묵직하고 부드럽게 흘러가던 회랑은 살짝 휘어지면서 알루미늄 패널로 이루어진 디디피 본체로 스며들어갑니다.
어떤 부품들을 어떤 방식으로 짜맞추어 만들었는지, 즉, ‘구축’에 대한 정보가 최대한 감추어진, 그냥 둥글둥글한 허깨비, 흔히 이야기하는 우주선처럼 디자인된 건물이지만, 이런 장면에서는 익숙한 수법을 만난 듯 해서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바닥판은 알루미늄 패널 스킨을 꿰뚫는 반면, 난간 부분은 스킨과 만나기 직전 끊어지는 모습입니다. 가끔씩 보이는 이런 식의 연출이 건물의 이미지를 야무지게 만들어주고 있었습니다.
떠받드는 기둥과 바닥을 이고 있는 보가, 마치 모노코크 구조의 비행기나 자동차 뼈대를 연상케 합니다. 벽과 천정에서 되풀이되는 조형어휘가 방향성을 도드라지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기둥마다 놓여있는 작은 화분이 눈에 거슬리더라고요. 기껏 힘들여 연출해 놓은 역동적인 이미지에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
지하를 거닐다 보면 여러 동선들이 발견되고, 또, 건물본체가 이리저리 휘감기듯 접히는 모습도 보이는데, 절로 감탄이 나오더군요.
그리고 이 시점에서의 이런 장면을 찍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이렇게 넓게, 그리고 정처 없이 꿈틀거리는 ‘건물의 아랫면’을 만나는 기회는, 아마 전세계적으로도 드물 것입니다.
모니터 속 라이노 모델링 화면이 그대로 실체화된 풍경입니다. 수없이 다듬어졌을 모델링이겠는데, 그래도 얼핏 조금 어색해 보이는 부분이 아주 가끔 있었습니다.
이렇게 매끈하고 둥글둥글한 디자인이기 때문에, 마감 패널 계획이 아주 중요해집니다. 지루함을 덜어내고 스케일 감각을 전달하기 위한 패널 나뉨 계획이 눈에 띕니다.
두툼하게 휘감기는 면으로 연출된 난간과, 엄청난 길이로 뻗어 나온 캔틸레버 건물 본체 사이. 주변의 낯익은 건물들이 낯선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둥글둥글한 알루미늄 패널 마감의 건물본체와 꿈틀거리며 흘러가는 노출콘크리트 덩어리는 충분히 현란한 조형입니다. 하지만 표면이 매끄럽고 색깔이 차분해서 디디피는 오히려 조용히 배경으로 후퇴하고, 사이로 보이는 길 건너 거대 쇼핑 건물들이 마치 주인공처럼 도드라지는 모습입니다. 맥락에 대한 아무런 존중 없이 일방적으로 들어선 조형이기 때문에, 오히려 생생하게 꿈틀거리는 현실에 대해서 배경, 혹은 액자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화여대캠퍼스센터(ecc) 효과와 비슷합니다. 워낙 이질적이기 때문에 배경으로 기능할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일상에 대한, 서울의 풍경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못해 마련된 역사유적의 흔적과 맥락 없이 둥실 떠오른 거대한 금속 덩어리. 그 사이로 보이는 거대 쇼핑몰 건물들. 간단한 구도 만으로 무시할 수 없는 묵직한 메시지가 만들어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안개님의 안내를 따라 이 곳으로부터 건물 내부 답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입구가 워낙 많다 보니 입구마다 번호를 붙여놓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번호 간판이 아쉽습니다.
알루미늄 패널 마감 부분의 입구 간판들은 매끄러운 조형감을 최대한 강조하기 위해서 마치 피부 위의 문신처럼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각종 이정표나 안내문들도 마찬가지였구요. 디자인 의도와 그 의도를 구현하는 완성도가 충분히 공감됩니다.
그에 비해 군더더기처럼 붙어있는 노출콘크리트 부분의 간판은 아무래도 아쉬운 거죠. 아쉬움을 접어두고, 입구로 들어갑니다. 미끈하게 한 덩어리로 연출된 건물이라, 사람과 직접 만나는 부분의 스케일 감각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 출입구들이 한결같이 사람 몸의 스케일을 크게 뛰어넘지 않는 모습입니다.
내부 또한 이음새 없이 매끄럽게 연출되어 있었습니다. 동굴처럼 말이죠.
스케일 감각은 계속 이어집니다. 주변의 다른 방이나 전시실로 들어가는 입구 부근에서는 복도가 살짝 확장되는데, 복도 높이 가득 꽉 차게 접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키가 의식되는 높이만큼만 살짝 휘어지며 접힙니다.
천정의 높이 차이로 자연스럽게 공간의 쓰임새가 나뉘어지는 효과도 일어납니다. 천정 높은 부분은 흘러가는 공간이고, 천정 낮은 부분은 움직임이 잠시 멈추는 공간입니다. 표면이 매끄럽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공간 연출 의도가 각별하게 느껴지는 듯도 합니다.
온갖 기호들도 매끄러운 표면에 어울리게 디자인되어 있었습니다. 겨냥하는 방향의 끝만 살짝 튀어나온 화살표.
소화전 등의 뚜껑들도, 최대한 매끄러운 벽에 스며드는 식으로 디자인되었네요.
그에 비해 비상구 표시 램프나 콘센트 박스가 살짝 튀어나와 있는 모습은 조금 아쉬웠고, 옥의 티였습니다. (남이 열심히 잘 해 놓은 건물 보면서 까탈스럽게 따지자니 조금 멋쩍습니다만.)
자하의 공간답게 벽이 기울어져 있는데, 가끔씩 뚫려있는 화장실 출입구에서 드러나는 벽의 단면 윤곽을 통해 구체적인 표정을 가늠하게 됩니다.
복도의 끝, 또 다른 출입구 너머로, 그 유명한 ‘이간수문’이 보입니다. 두툼한 창틀 때문에 깔끔하게, 온전히 보이지 않는 점은 아쉬웠습니다.
처마 높이 또한 그렇습니다. 처마 너머 이간수문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게끔 높이를 설정할 수는 없었을까요. 주인공이 액자 테두리 안에 깔끔하게 들어오도록 말이죠.
다른 문들을 보면, 앞서 말했던 것처럼 사람의 스케일에 맞는 크기로 뚫려있는 경우가 많았고요.
외부공간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 길게 찢어진 창문과 함께 문을 만들어지는 부분도 있었는데, 이 경우에도 유리 창문의 높이는 사람 몸의 스케일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습니다.
널리 트인 외부공간에 면해서 뚫린 문의 경우, 문 자체의 크기는 변함 없지만, 문 언저리부터 표면을 옴폭 들어가게 접은 식으로 연출되기도 했는데요. 기본적으로 정해진 스케일 감각은 유지하면서, 상황에 따라서 섬세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이죠.
오간수문에 면한 출입문의 경우도, 문 자체의 크기는 복도 높이에 맞춰 그대로 유지한다 하더라도, 바깥의 처마 높이는 다소 높게 가져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문에서 처마 아래 공간으로 이간수문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도록 말이죠. 아마도 구경하는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어떤 다른 사정이 있었겠지요. 어쩌면 이렇게 옴폭 후퇴해서 처마 밑 공간을 만든 것 부터가, 이간수문과의 관계를 의식한 결과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깥으로 나와서 문을 보았는데요. 오간수문으로 이어지는 성벽과 맞닿고 있네요. 앞서 보았던 매끄러운 노출콘크리트가 아닌, 입체 문양이 돋아있는 노출콘크리트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성벽을 의식한 디자인이었을까요.
건축가 천경환
손과 발로 풍경을 읽어내는 사람이고
읽어낸 풍경을 꾸준히 기록하는 사람이고
그 기록들을 양분 삼아 디자인을 풀어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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