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17.01.24
- 동대문디자인플라자 #02. 연결
- 재미나요 l 서울의 발견
오간수문을 통과하면, 여러 가지 시간의 켜가 하나의 풍경에 모여있는, 놀라운 모습이 보입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동대문운동장조명탑/거대쇼핑몰/한양성벽.
휘감기듯 흘러가는 성벽.
앞서 문에서 보았던 알루미늄 패널의 흐름을 닮았습니다. 의도였을까요.
매끈하게 흘러가던 알루미늄 패널 벽면에서 문득, 퉁명스러운 표정의 문이 보입니다. 투박하게 잘려지는 모습에서 멋 부리는 문이 아닌, 장비 반입 등의 실용적인 요구를 위해 설치된 문이라는 사실이 느껴집니다.
알루미늄 패널 벽은 알루미늄 타공 패널로 슬쩍 바뀌었다가, 이내 노출콘크리트 벽체가 됩니다. 타공 패널은 바람이 드나드는 급배기구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재료가 바뀌고 상황이 바뀌어도 전체 덩어리의 윤곽은 매끄럽게 이어집니다.
느슨하게 올라가는 비탈길을 올라가면서, 비로소 이 곳이 ‘공원’이었음을 실감합니다. 날렵하게 마름모꼴로 잘려진 바닥판이 디디피 이미지와 어울리는 느낌입니다.
가로수 뚜껑 또한 마름모꼴인데, 랜덤 패턴의 구멍이 뚫려있네요. 바닥 포장 돌판의 문양과 이어지는 수법임을 이해하겠습니다. 다만 돌판 패턴에 똑 똘어지지 않게 맞추어진 모습은 조금 의외였네요.
비탈길을 올라가면 옛 동대문운동장에 설치되어 있었던 성화대가 나옵니다. 조명탑과 함께 외롭게 남은 동대문운동장의 흔적인데요.
그래도 이나마 남은 것을 감사하다고 말해야 할지.
공원에서 바라보는 디디피는 인접한 도로의 번잡스러움을 가려주는 얕은 담장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로에서 보다는 한결 작게 느껴지고, 친밀하고 만만한 느낌이 들어서 좋았습니다. 옥상에는 사막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심어져 있었는데, 공원에서 옥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분명 연속된 상황은 아니었지만, 멀리서 느슨하게 보면 대충 연결된 느낌은 나더라고요.
여러 갈래로 잘게 나뉘어진 땅은 저마다의 기울기와 방향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넓은 공원이 별로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다만 길게 선형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다른 평범한 공원과는 다른 인상이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슬슬 올라가다 보면 두 개의 덩어리가 접히며 포개지는 지점에 도착하게 됩니다. 지형 덕분에 확실히 전면 보다는 한결 친밀한 스케일로 느껴집니다.
두 덩어리의 접점이자, 건너편으로 관통하여 연결되는 통로입니다. 디디피를 조감도의 시점에서 보면 말랑해 보이는 커다란 거머리 모양의 덩어리 두 개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예전 동대문 야구장과 동대문 종합운동장, 이 두 개의 건물을 의식한 결과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몰입하게 하는, 빨아들이는 듯한 장면이 펼쳐집니다.
숨막히도록 관능적인 모습. 앞서 건너편에서 보았던 어마어마한 캔틸레버의 하부가, 어둠 속 살짝 밝은 덩어리로. 반사광 덕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이런 스케일의 이런 조형을 마주하게 되었다니, 감동스러울 정도.
그리고 한편에는 다른 출입구가 보입니다. 문 언저리를 옴폭 넣어서, 넓게 펼쳐진 광장과 문 사이, 완충되는 공간을 만들었네요. 바깥으로 뚫리는 문에는 비나 눈을 의식해서 ‘캐노피’라는, 처마의 역할을 하는 덮개를 붙이는 것이 보통입니다. 문 앞 처마 밑이라는 공간이 없으면 우산을 접거나 펼치는 등, 건물을 드나들 때 필요한 준비 동작을 하기 불편하거든요. 그런데 매끈한 조형이 강조되는 디디피에서는 바깥에 군더더기를 붙이는 것 보다, 이렇게 벽면을 밀어 넣는 식으로 처마 밑 공간을 만드는 편이 훨씬 더 디자인 의도에 어울리는 방법이었겠습니다.
덕분에 길게 뻗어나가던 건물 표면에 주름을 만들어서 지루함을 덜어낼 수도 있었고요. 큼지막한 주름 아래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멀리서도 출입구의 위치를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한다는 효과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곰곰 생각해 보면 건물을 드나들면서, 우리는 많은 준비 동작을 합니다. 앞서 우산 이야기도 했지만, 유모차나 외투 따위를 접거나 펼칠 수도 있겠지요. 가방을 고쳐 들 기도 하겠고요. 또 자전거나 휴지통을 놓아 두는 공간이 되기도 합니다.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 또 다른 출입구를 향해 올라갑니다. 얇은 판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것처럼 연출된 계단.
알루미늄 패널들이 오픈조인트로 붙어있는데, 사람 몸이 닿을 정도의 높이에는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모서리 덮개가 붙어있었네요.
그리고 오픈조인트 줄눈 말고도, 판에 살짝 흠집을 주는 식으로, 약한 단계의 줄눈을 표현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올라가서 뒤돌아 본 모습입니다. 새로운 지평면이 열리면서, 건너편 쇼핑몰 건물들이 가지런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매끈하게 이어지는 디디피의 지붕은 쇼핑몰 건물들을 돋보이게 하는 받침대가 됩니다. 마치 분재를 담는 화분처럼.
지형을 담아내는 두툼한 난간인데, 이런 문구만으로 올라가려는 욕구를 제어하기는 조금 버거워 보입니다. 패널 일부가 벌써 주저앉았네요.
‘디디피 시민쉼터’로 올라가는 넓은 비탈길인데,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지붕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점에서 앞서 말했던, ‘전시대’나, ‘화분’으로서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납니다.
앞서 ‘지형을 담아내는 두툼한 난간’이라 말했던 부분입니다. 살짝 접어서 꺾었는데, 조명 따위가 숨어있겠지요.
지붕 위 열린 잔디밭을 남김 없이 빨아들이겠다는 듯, 낮고 넓게 찢어 놓은 창문. 앞서 말했듯, 사람의 스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창문 구석에 문이 뚫려있어서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차라리 길다란 유리창문 전체를 여닫을 수 있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입체 곡면이라 아무래도 힘들었겠지요.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처마 밑 공간.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곡면이다 보니, 수직으로 세워진 문 옆으로는 이렇게 세모꼴의 단면이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옆에 안내판이 보이는데, 기왕 열심히 디자인하는 이런 요소들도 건물 맞춤으로 멋지게 디자인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세모꼴의 단면인데, 흡입력(?)을 강조하는 효과도 있네요.
워낙 완성도가 높은 건물이다 보니, 무난하게 처리된 문 관련 하드웨어들이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기대가 높은 만큼, 그래서 이런 부분에까지 필요 이상으로 까탈스럽게 시선을 던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카페로 사용될 공간이라는데, 카운터와 벤치 등도 자하의 디자인이라네요. 워낙 강렬한 개성의 공간이다 보니, 공간을 채우는 이런 가구들도 함께 맞춤으로 디자인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앞서 보았던 출입구 부근의 휴지통이나 자전거 거치대, 안내판 같은 사소한 아이템들도 자하가 디자인했으면 ‘장소의 완성도’가 몇 단은 더 높아졌을 것입니다.
건축가 천경환
손과 발로 풍경을 읽어내는 사람이고
읽어낸 풍경을 꾸준히 기록하는 사람이고
그 기록들을 양분 삼아 디자인을 풀어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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