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17.03.26
- 소설가 황순원의 102번째 생일(1915.3.26)
- 황순원문학관 양평소나기마을 / 한국종합기술(2009)
국어교과서에 실려서 일까? 황순원의 '소나기'는 꽤 유명한 문학작품이다. 대략의 줄거리를 물어도 사람들이 답할 수 있을 만큼 '소나기'는 보편적이다.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1175번지에서 태어났다. 올해(2017년)는 그의 102번째 생일이다. 고향이 북한이니 일단 황순원 컨텐츠Contents에서 출생지Birthplace 활용은 물건너 갔다. 그는 6세때(1921년) 평양으로 이사했다. 남한으로 넘어온 계기는 1946년 9월 서울중고등학교 교사가 되면서 부터다. 황순원은 1955년 교사를 그만두고 문학활동을 이어갔고 1957년 4월에 경희대학교 문리대 교수로 취임했다. 그는 2000년 9월 14일, 서울 동작구 사당동 자택에서 세상을 떴다.
황순원이 '신문학'에 '소나기'를 발표한 시기는 한국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1953년 5월이었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경기도 광주로 피난을 갔고 이듬해 1.4후퇴때 부산으로 피난지를 옮겼다. 평양에서 태어났으니 남쪽 끝으로 갈수록 그에게는 생경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1953년 8월 그는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니 '소나기'를 한참 쓰고 있을때 황순원은 아마도 부산에 있었을 듯하다. 실제적인 그의 행적만 놓고 보면 황순원 컨텐츠가 활용될 수 있는 지역은 상당히 한정돼 있다. 그런데 그는 '소나기' 속에서 소녀가 이사가는 곳으로 '양평읍'을 언급했다. 내용을 보면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간다는 것이었다. 거기 가서는 조그마한 가겟방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이다. 소나기의 장소적 배경이 경기도 양평일 것이라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럼 왜 황순원은 많은 지역 중에서 '양평읍'을 생각해 낸 것일까?
상상력이 필요할 것 같다. 우선 이북에서 자란 그에게 이남지역은 생소하다. 그러니 특별한 연고가 없는한 이남지역의 어떤 장소를 언급하기는 쉽지 않다. 둘째, '양평읍'이라는 지명은 1979년 양평면面이 읍邑으로 승격되면서 생겼다. 그러니 황순원이 '소나기'를 썼던 1953년 이전에는 '양평읍'이라는 지명은 없었다. 소설에 나오는 '양평읍'에서 '읍'은 행정구역 단위의 '읍'이 아닌 동네에서 비교적 번화한 '읍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소녀네가 조그마한 가겟방을 보게 된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봐도 이 맥락이 맞을 듯 싶다. 마지막은 '양평'이라는 지명인데, 그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 피난 갔던 곳이 광주군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양평은 남한강 건너편에 있기에 소설의 배경으로 그가 가지고 오기에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 즉, 양평은 황순원의 행적과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지만 지금에 있었고 황순원은 소설 '소나기'를 쓰면서 지근에 있던 양평을 등장시켰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황순원문학관에서 해설사가 황순원의 고향 '평양'을 뒤집으면 '양평'이 된다고 한 설명은 국어과목 시험 준비를 위해 사용된 암기법 같아 건조하다.
작가가 소설의 배경으로 '양평읍'을 직접 언급해 줌으로써 양평군이 '황순원'과 '소나기' 컨텐츠를 갖게 됐으니 군郡 입장에서는 굴러온 호박이다. 양평소나기마을 홈페이지에는 '후배문인들이 그분들(실향민작가들) 모두에게 고향을 찾아드리는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있고 통일이 되어 고향이 복원되는 날, 그곳으로 문학기행도 가고 그곳에 생가도 복원해야 할 것이다'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미리 힘을 기르고 마음을 다지며 자료를 보관하고 관리하면서 그 분들의 업적을 선양할 장소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황순원의 제자들과 교수들은 선생의 작품들 중에서 단편소설의 백미인 '소나기'가 온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작품이라는 데 착안하였다'라고 건립취지 및 배경을 밝히고 있다.
양평소나기마을은 서종면 문호리에서 양평읍으로 연결되는 지방도 제352호선(중미산로)에서 분기하는 황순원로 변에 있다(소나기마을길 24). 자연보전권역, 특별대책지역, 수변구역, 상수원보호구역 등으로 인해 양평군에는 계획적으로 조성된 시가지가 없다. 양평군에서 취락지는 산이 강과 만나 평평해지는 곳에 있고 산으로 오를수록 흩어진다. 양평소나기마을 주변에도 사람들은 S자 곡선의 청계산 북서쪽 골짜기를 따라 산재해 산다. 그 골짜기 어떤 완만함에 소나기마을이 조성돼 있다(대지면적 47,640㎡).
'황순원'과 '소나기' 컨텐츠가 양평군까지 굴러오게 된 계기는 앞서 언급했듯이 황순원이 소설 속에서 쓴 한 문장이다. 난 그 느슨한 연결고리 사이에 수많은 상상력이 개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시설을 조성하는 주체나 특히 설계자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 것 같다. 소나기마을 북서쪽에 ┌자로 배치된 황순원문학관에서부터 그 앞 진입광장에 조성된 분수의 조형물까지 형태적인 상징은 모두 소설에서 소년과 소녀가 소나기를 피했다는 '수숫단'이다. 이런 논리로 만들어진 황순원문학관을 보면서 참 근천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황순원문학관 가운데 삽입된 원뿔을 보고 수숫단을 연상시키는 일도 쉽지 않다. 오히려 소나기가 오면 피는 우산 같다(연면적 2,305㎡).
소나기마을 한가운데 잔디를 깔아놓은 소나기광장에서는 두 시간마다 한 번씩 소나기도 맞을 수 있다. 인공의 물이 뿌려질때 광장 한구석에 있는 수숫단에 들어가서 소설 속 소년과 소녀가 되어볼 수도 있다. 소나기마을이니 모든게 소나기, 소나기, 소나기라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소설 '소나기'가 소나기를 통해서만 이야기 되고 또 느낄 수 있는 작품은 분명 아니다. 소나기를 맞아야 소설 '소나기'이고 소나기를 피해 수숫단에 들어가야 '소나기' 속의 소년과 소녀가 되는 것도 분명 아니다. 솔직히 얘기하면 양평소나기마을은 문학작품 '소나기'가 아닌 자연현상 소나기를 체험하는 시설 같다. 아마도 시설의 조성 목적 -'황순원 선생의 소설 '소나기'의 배경이 되는 양평에 소설을 주제로 한 문학테마마을과 문학관을 조성하여 수도권의 대표적인 문학테마마을로 조성'- 에서 '테마'라는 키워드Keyword를 테마파크Theme park에서 테마의 역할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황순원문학관과 소나기마을에는 '소나기'라는 테마는 있을지언정 '문학', '소설'은 없다.
황순원의 '소나기'에 대한 흔한 평가는 '성숙한 세계로 입문하는 통과제의의 과정으로 소녀와의 만남, 소녀의 죽음, 조약돌과 분홍 스웨터로 은유되는 소년과 소녀의 감정의 교류 등'이고 작품에서 소년과 소녀가 소나기를 만나는 장면은 절정이자 전환점으로 '두 사람의 교유는 고조되지만 소녀는 병세가 더쳐 죽게 된다. 유년에서 성적 성숙의 징검다리를 건너갈 때면 누구나 겪게 되는 정서적 경험이 서정시적 여운을 남기며 보편적인 정감의 세계로 독자를 연결시킨다'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난 소나기마을이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어야 하는 건 지금과 같은 소나기 체험이 아니라 '유년시절에서 성숙의 세계로 넘어왔을때 경험했던 정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서는 모든 개인이 가지고 있었고 경험했던 감정이다. 그건 마치 영화 '건축학개론'을 본 대부분의 남성들이 떠올린 첫사랑의 기억과 같은 것이다.
황순원문학관과 소나기마을을 조성하는데 총 124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됐다고 한다(국비50억원, 도비25억원, 군비49억원). 2006년 12월 20일 착공해 2009년 6월 13일 개장한 이 시설은 다행히(?) 年관람인원이 쏠쏠하다. 《2016 전국문화기반시설총람》에 따르면 2015년 年관람인원은 110,516명(2014년에는 128,552명)이었다. 직접 비교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서울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임영환&김선현&디림건축, 2010)의 年관람인원이 104,565명이고 용인에 있는 백남준아트센터(Kirsten Shemel + Marina Stankovic + 창조건축, 2008)가 118,692명이다.
도시설계가 Archur
Archur가 해석하는 도시, 건축.
저서. <닮은 도시 다른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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