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17.06.24
- 롱샹성당(Notre Dame du Haut) 봉헌(1955.6.25)
- 롱샹Ronchamp성당 / 르 꼬르뷔지에(1955)
올(2017년) 초 예술의 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을 찾았다. 서구 근대건축의 아이콘Icon이라 불리는 르 꼬르뷔제Le Corbusier 전시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가 설계한 건축물 17개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전시였다. 전시의 제목은 '현대건축의 아버지 4평의 기적'. 얼마나 영향력이 대단하면 '아버지'일까? 78년(1887~1965) 간의 생애 속에서 두 개의 종교건축은 특히 수작으로 꼽힌다. 롱샹성당과 라뚜렛 수도원이다.
두 종교시설의 설계를 르 꼬르뷔제가 맡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은 꾸뛰리에Maire-Alain Couturier(1897~1954) 신부다. 리옹Lyon의 도미니크 수도회Dominican Order 소속이었던 꾸뛰리에 신부는 현대예술과 건축의 정신을 통해 성당의 변화를 모색했던 개혁파였다. 신부는 예배당에 오는 신자들이 미적 강렬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위대한 예술가가 필요한데 르 꼬르뷔제가 그 역할을 해주리라 믿었다. 신부는 르 꼬르뷔제가 신자들이 갈망하는 무언가를 한번 더 확신 할 수 있게 해줄 것이고 그를 통해 예술과 영성은 잘 어우러질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도 아니었던 르 꼬르뷔제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흥미로운 점은 롱샹성당과 라뚜렛 수도원 모두 르 꼬르뷔제가 설계를 맡기 전에 모리스 노바리나 Maurice Novarina라는 건축가가 설계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꾸뛰리에 신부는 1937년부터 현대예술가들의 작품으로 앗시 성당Notre-Dame de Toute Grace du Plateau d'Assy을 장식하기 시작했는데, 이 성당을 설계한 건축가가 모리스 노바리나였다.
"윗 사람이 그(꾸뛰리에 신부)에게 당시 종교예술에 대한 생각을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모두 다 생명력이 없고 퀴퀴한 먼지를 뒤집어 쓴 아카데미시즘Academicism일 뿐입니다. 모방 속의 모방은 현대인들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마네, 세잔, 르누아르, 고흐, 마티스, 피카소, 브라크 같은 현대 화가들은 모두 성당 밖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전도한들 중세교회에 있는 예술 거장들의 작품만큼 직접적이고 강한 설득력을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이 현대 미술의 거장들이 르네상스 시대의 관능주의 예술가들보다 더 재능이 뛰어나다는 사실입니다!"
-르 코르뷔지에 언덕 위 수도원, 니콜라스 판Nicholas Fan, 컬처북스-
롱샹성당의 정식 명칭은 'Notre Dame du Haut in Ronchamp'이다. 우리나라 말로 해석하면 '정상Haut 위에 있는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 정도가 된다. 롱샹Ronchamp은 성당이 있는 프랑슈콩테Franche-Comte지역의 꼬뮨名이다. 인구가 3,000명도 안되는 산촌마을이다(면적은 23.54㎢). 성당은 보주Vosges산맥이 벨포트Belfort 협로로 내려오는 마을 북쪽 언덕 위에 있다. 마을보다 110m 가량 높은 언덕 위에 올려져 있는 성당은 마을로 접근하는 아몬트 거리Rue d'Amont에서 바라보면 마치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Acropolis 언덕 위에 올려 있는 파르테논Parthenon 같다.
압도적인 높이는 아니지만 주변 보다 도드라진 지형 때문이었는지 성당이 올려진 언덕은 고대부터 신앙의 장소였다. 4세기에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을 시작으로 언덕 위에는 몇 차례에 걸쳐 성당이 새로 지어졌다. 그리고 이 언덕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순례성당이 됐다. 롱샹 성당이 세워지기 전 1913년 벼락으로 붕괴된 성당은 15세기에 지어졌었다. 이후 1936년 네오고딕Neo-Gothic 양식으로 재건됐는데, 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에 폭격으로 완파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옛 성당이 있던 자리에 새로운 성당을 짓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르 꼬르뷔제가 설계에 착수한 시기는 1950년 5월이었다. 이듬해 1월, 르 꼬르뷔제는 브장송Besancon 교구 성미술위원회에 안을 제출했고 20일 승인을 받았다. 승인과 동시에 스테인드 글라스Stained Glass는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 모자이크는 장 바젠Jean Bazaine이 맡았다. 하지만 설계안에 대한 반대가 있어서 착공이 지연되다 1953년 9월 공사가 시작됐다. 르 꼬르뷔제는 현장 여건을 고려하여 파괴된 옛 성당의 석재를 일부 재활용했다. 성당은 1955년 6월 25일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됐다.
건축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롱샹 성당은 영화나 잡지책에서 한 번쯤 봤을 듯하다. 그만큼 성당은 형태에서 오는 감응이 크다. 평면의 윤곽을 보면 동서로 조금 긴 장방형이지만 네 면의 어떤 벽도 곧게 세워져 있지 않다. 지붕도 남동쪽 꼭지점을 향해 거침없이 솟아있다. 롱샹 성당 보다 형태적으로 더 기이한 건물들이 난무하는 지금에 봐도 성당의 형태는 아름답고 강력하다. 그런데 이토록 형태적인 건축물을 설계한 사람이 다름 아닌 1920년대 모더니즘의 정수精髓, 화이트 큐비즘White Cubism으로 대표되는 건축가라는 사실은 여러 비평을 낳았다. 심지어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을 대표하는 책인 《현대 포스트모던 건축의 언어The Language of Post Modern Architecture》를 쓴 찰스 젱크스Charles Jencks도 롱샹 성당을 포스트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꼽았다. 참고로 젱크스는 같은 책에서 르 꼬르뷔제 사상을 실현한 건축물로 항상 언급되는 세인트 루이스St.Louis의 프루트-아이고Pruitt-Igoe주택단지의 폭발 장면을 모더니즘 건축의 종말로 보았다. 프루트-아이고 주택단지는 미노루 야마사키Minoru Yamasaki가 설계했다. 모더니즘 건축과 포스트 모더니즘 건축을 상징하는 건축물의 중심에 르 꼬르뷔제가 있다는 얘기다. 안도 다다오Ando Tadao는 롱샹 성당을 두고 "르 꼬르뷔제가 걸어온 길을 스스로 부정하는 아이러니한 결과물"이지만 "장소성과 역사성을 회복하려는 시도, 예전에 없던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하고 건축의 가능성을 확대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20세기 건축을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고 평했다《건축을 꿈꾸다, 안그라픽스》.
사실 서양건축사에서 건축은 구조체가 만들어내는 공간보다는 엄격한 비례 아니면 화려한 양식으로 분석돼 왔다. 모더니즘 시대의 건축도 이러한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모더니즘 건축이 과거 건축이 보여주던 장식을 걷어내기는 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장식이 사라진 곳을 다른 형태의 장식이 대체했을 뿐이다. 르 꼬르뷔제 또한 1920년대에는 백색추상 건물로 분류되는 완벽한 큐비즘의 장식 없는 건축을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내세운 미적가치는 '기계', '대량생산', '합리성' 등 이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초기 그의 건축은 과거 서양건축사에서 주요하게 다루어 왔던 비례, 양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콘크리트의 가소성Plasticity 실험에 중점을 둔 조형적인 형태와 공간 중심의 건축으로 전환된 2차 세계대전 이후 -구체적으로 1950년 이후- 부터 그는 진정으로 과거 건축에서 주요하게 다루어 왔던 것들과 결별할 수 있었다. 롱샹 성당은 이런 그의 후반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롱샹 성당 또한 르 꼬르뷔제라는 한 건축가에 의해 만들어진 건축물이기에 1920년대 백색추상 건축과 공유하는 면도 분명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성당의 벽, 특히 남쪽과 동쪽 벽이다. 르 꼬르뷔제 건축에서 돔이노Dom-ino 구조를 통해 구조체로서의 역할을 벗어던진 벽은 가로로 긴 창을 낼 정도로 자유로워졌다. 건물 내부 벽도 하중을 생각하지 않고 자유롭게 곡선을 그릴 수 있었다. 그가 주장한 '새로운 건축의 5형식'에서 '자유로운 평면', '자유로운 입면'에 대한 얘기다. 하중에서 벗어났으니 벽은 한없이 가벼워질 수 있었다. 그런데 롱샹 성당에서 벽은 다시 두꺼워졌다. 빛의 향연을 느낄 수 있는 남쪽 벽은 심지어 3.7m까지 두꺼워졌다. 성당 내부에 기둥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육중한 콘크리트 지붕을 받치는 구조체는 성당의 벽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벽과 지붕 사이에 틈이 있다. 즉, 기울어진 벽 전체가 구조체가 아니라는 얘기다. 벽과 지붕 사이, 빛이 스며드는 틈을 자세히 보면 지붕을 지지하는 몇 개의 기둥이 보인다. 기둥을 품은 벽은 조형적인 이유로 두꺼워진 하지만 여전히 '자유로운 입면'이다.
롱샹 성당 설계 전까지 르 꼬르뷔제는 개인주택이나 집합주택을 주로 설계했다. 실제 그는 사람이 살지 않는 건물은 설계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과 공간의 비례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모듈러Modulor로 발전했다. 그러나 1950년 이후에는 종교시설을 포함해 공공건축 설계를 맡았다. 자신이 주로 설계하는 건축물의 용도가 달라졌기에 1920년대 주거시설을 설계하던 방식은 바뀌어야 했다. 이 중에는 '빛'에 대한 접근과 처리 방식도 있었다. 르 꼬르뷔제는 자기 자신이 "빛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자신에게 "빛은 건축의 기본"이며, "빛과 함께 구성"한다고 주장했다《프레시지옹Precision, 동녘》. 심지는 그는 "건축이란 밝은 빛 아래로 보이는 완성되고 정확하고 아름다운 양감의 유희다. L'architecture est le jeu savant, correct et magnifigque des volumes assembles sous la lumiere." 라고 정의했다《새로운 건축을 향하여 Towards a New Architecture, DoverPublications》. 다만 주거시설에서는 위생을 위해 빛을 가능한 내부로 끌어들이려고 고민했는데, 롱샹 성당에서는 빛의 신성함을 위해 내부를 어둡게 했다. 빛은 어둠이 있어야 더 빛나기 때문이다. 1920년대 작업과 비교하면 빛을 실내로 끌어들이는 반대의 방식이 필요했던 셈이다. 남측 벽이 두꺼워진 이유다. 그 두꺼움으로 인해 내부로 제한적으로 들어오는 빛의 괘적이 남는다. 더불어 스테인드 글라스가 끼워진 바깥쪽에 비해 내부쪽 구멍의 크기가 더 커서 빛의 괘적이 그려지는 면은 벽 두께보다 더 길다.
같은 맥락으로 성당 내 알코브Alcove형태로 만들어진 세 개 채플Chapel의 역할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성당 내부 신도석 외 3개의 작은 채플을 만들어 미사 중에도 개인 또는 소규모 참례가 가능할 수 있도록 한 건 설계 착수 전부터 르 꼬르뷔제에게 주어진 요구조건이었다. 성당내 채플 중 하나는 남쪽 주출입구 서쪽에 북쪽을 향해 창을 두고 있고(위 사진에서 오른쪽) 나머지 둘은 북쪽 부출입구 양쪽(동서쪽)에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창을 두고 있다(위 사진에서 서로 등지고 있는 채플). 크기는 북쪽을 향한 채플이 동서쪽을 향한 것 보다 크다(아래사진). 설계 요구조건에서 밝힌 이유로 인해 세 개의 채플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내 생각에는 각 채플이 말 그대로 부속 예배당이나 소 예배당으로서의 기능 보다는 각 방향으로 성당을 비추는 빛을 느끼기 위한 공간으로서 더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롱샹 성당은 언덕 위에 있음으로 인해 어떤 방향에서든 빛에 노출돼 있다. 빛을 느낄 수 있는 다른 공간과 그 공간 속 어둠만 있다면 어느 방향에서도 다른 빛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북쪽 부출입구 양쪽에 규모가 같은 두 채플의 외벽 중 동쪽으로 창이 난 채플 내부 벽에만 빨간색을 칠한 이유도 다른 공간에서 빛을 느끼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아래사진). 신이 어디에나 있듯 빛도 어디에나 있다. 그렇다면 빛을 느끼는 방식에 따라 어디에나 있는 신을 다른 방식으로 느낄 수 있다.
서유럽의 일반적인 성당 배치는 예루살렘이 있는 동쪽으로 제단을, 그 반대편인 서쪽에 주출입구와 파사드Facade가 있다. 롱샹 성당의 제단도 동쪽에 있다. 하지만 주출입구는 남쪽에, 부출입구는 북쪽에 있다. 동쪽을 향해 있는 제단 뒷 벽은 남쪽 벽 만큼은 아니지만 크고 작은 개구부로 빛이 스며든다. 그리고 남서쪽 모서리에 또 하나의 출입구가 있다. 롱샹 성당이 지금까지 지어졌던 성당들과 다른 점은 제단 뒷 벽도 사용한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신도들이 제단을 바라보며 미사가 진행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제단 뒷 벽은 성당의 어느 벽보다 상징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롱샹 성당에서는 그 상징성을 남쪽 벽이 가지고 갔다. 이유는 성당의 제단 뒷 벽이 양면을 다 이용할 수 있기Reversible 때문이다(아래사진).
성당은 다시 지어졌음에도 4세기 부터 유지돼 온 순례성당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해야 했다. 롱샹이 작은 산골마을이라는 점을 감안했을때 성당을 항시 이용하는 사람은 적다. 실제 좌석은 50석이고 빈 공간을 이용한다고 해도 200석 규모가 최대다. 하지만 일년에 몇 번이라도 찾아오는 순례객 수는 많다. 르 꼬르뷔제가 제안한 방식은 실내공간은 작게 만들지만 많은 수의 순례객들이 찾아왔을때를 대비해서 야외 미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야외 미사를 집전하는 제단을 내부 제단 벽 반대편에 설계했다(아래사진). 그리고 야외 미사에서 신자들이 제단을 보고 앉을 수 있도록 성당 동쪽을 더 넓게 두었다(10,000명까지 가능한 넓이). 언덕 북동쪽 구석에는 계단형 피라미드도 만들었다. 피라미드는 프랑스 레지스탕스France Resistance를 추모하기 위한 추모비이지만 야외미사시에는 스탠드 역할을 한다. '집이 살기 위한 기계'라면 성당은 미사를 드리기 위한 최적의 장치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제단 뒷 벽에 놓인 성모 마리아 상은 회전된다. 이 성모 마리아 상은 1944년 2차세계대전으로 파괴된 이전 성당에서 남은 유일한 유물이다. 제단 뒷벽에 걸린 테라스Terrace에도 문이 있어 건물 내외부를 드나들 수 있다.
2011년 렌조 피아노 설계로 'Ronchamp Tomorrow Project'가 진행됐고 그 결과 롱샹 성당 주변은 크게 바뀌었다. 프로젝트는 부속 성당 및 시설 신축을 포함해 주변 조경을 변화시키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2012년 롱샹 성당에 도착했을때 단번에 느껴지는 변화는 '드러남'이었다. 2000년 성당을 처음 찾았을 때는 성당 주변의 수목이 무성했다. 9월이라는 시기적인 면도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성당은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심지어는 2000년 당시, 나무에 가려져 있어서 르 꼬르뷔제가 설계한 순례자 호스텔, 관리자 숙소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2012년에는 성당 뿐만 아니라 부속건물들이 언덕 위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가장 아쉬웠던 건 영역 입구에서 성당으로 접근하는 길에서 보여지는 모습이었다. 2000년 길 양쪽으로 사람 키 높이 이상으로 자란 나무들은 그 끝에서 성당의 일부만 보여줬다 감췄다. 언덕을 오른 길에 비하면 짧은 그 길에서 내 기대감은 극에 달했다(아래사진). 하지만 2012년 이 길에서 본 성당은 '저기 성당이 있다'가 전부였다.
도시설계가 Archur
Archur가 해석하는 도시, 건축.
저서. <닮은 도시 다른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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