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18.01.06
- 수요집회 시작(1992.1.8)
-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 장영철&와이즈WISE건축(2012)
2015년에 있었던 '12.28 한일위안부합의'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 철학(?)을 알 수 있게 해준 사건이었다. 가해자는 가해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피해자는 합의 과정에 빠졌는데, '합의'는 됐다는 발표. 양측은 '최종적', '불가역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한국측에서 이 단어를 말했을 때 왠지 '내가 역사적 숙원 사업을 풀었다!'라는 치적을 되돌리지 말라는 뜻인 것 같았다.
합의 2년이 되는 작년 12월 28일 문대통령은 '위안부 합의 TF조사결과에 대한 입장문'을 냈다. 그리고 올 1월 4일 문대통령은 위안부피해 할머니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했다. 박근혜 정부가 합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소홀히 했던 피해자들의 의견을 청취하기 위해서 였다. 합의는 이제 다시 시작되어야 하고 그 주체는 정부가 아닌 피해 할머니들이어야 한다. 국정 철학이 정말 있다면 박근혜 정부의 국정 철학에서 빠져 있는 것 중 하나는 '공감 능력'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988년 '여성과 관광문화 세미나'에서 윤정옥 교수에 의해 세상에 처음 드러났다. 그리고 1991년 8월 14일 故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공개증언이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기 위해 (사)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는 수요집회를 시작했다.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의 한국 방문을 앞둔 때였다.
수요집회는 2002년 3월 500회가 됐다. 이 때 단일 주제로 개최된 집회로는 세계 최장 기간 집회 기록을 갱신하며 기네스북Guinness Book에 올랐다. 등재 사실을 자랑스러워해서는 안 된다. 그만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우리가 해결하지 못했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올해 수요집회는 26년째가 됐다.
2003년 정대협은 집회에서 머물지 않고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이 겪었던 역사를 기억하고 교육하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박물관 건립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듬해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건립위원회'를 조직했다. 당시 정부와 국회가 지원한 금액은 5억 원. 같은 해, 서울시는 박물관 건립부지로 서대문독립공원 내 매점 터를 기부했다. 건립위원회 입장에서는 사업비의 상당부분을 절약할 수 있는 아주 감사한 조치였다. 박물관의 설계도 여성건축가 김희옥(ATEC건축)의 재능기부로 실시설계까지 완료했다(위 이미지).
2006년 8월, 박물관 건립을 위한 관련 심의가 모두 통과됐다. 그런데 광복회, 순국선열유족회 등 일부 독립유공단체들이 서대문독립공원내 박물관 건립을 반대했다. 이유는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 2007년 6월 3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광복회의 입장을 인용하면, "위안부 희생자들이 물론 불쌍하긴 하지만 목숨을 걸고 광복을 위해 싸운 이들과 '피해자'인 위안부는 층위가 다르며, 서대문 독립공원에 위안부 박물관이 들어오면 독립운동이라는 성지의 '순수성'이 훼손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2009년 3월 8일 박물관 착공식이 열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독립공원은 피해자를 기리는 곳이 아니라 독립 운동가들의 투쟁과 독립정신을 후손에게 교육시키는 장"이기 때문에 "좁은 울타리 안에서 순국선열 봉안소와 박물관이 같이 있다는 것은 억눌리고 피해를 받은 역사와 나라의 주권을 찾기 위해 투쟁한 자랑스러운 역사가 공존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이런 공존이 "역사를 배우기 위해 오는 학생들에게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한국신문, 2010.01.06.). 역사와 나라의 주권을 찾기 위한 '자랑스런 투쟁' 만큼이나 내 딸, 내 여동생, 내 누나의 삶과 인권을 찾기 위한 싸움도 자랑스럽게 여겼다면 이런 박물관 만들 일도 없었을 텐데. 참 수컷스러운 논리다.
결국 서대문독립공원 내 건립은 중단됐다. 건립위원회의 입장은 ‘보류’였다. 수요집회를 1,000회(2011년 12월 14일) 이상 열면서, 그리고 그 전부터 자신들의 잃어버린 인권과 회복될 명예훼손을 기다렸듯이 이번에도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박물관 건립 자체를 미루지는 않았다. 건립위원회는 2003년부터 모금을 시작한 17억원 중 일부를 성산동 부지와 주택 매입에 사용했다(대지면적 345㎡). 준비한 사업비의 상당부분을 부지마련을 위해 썼으니 남은 사업비는 당연히 부족했을 터, 결국 박물관 건물은 신축이 아닌 기존 집의 리모델링Remodeling으로 결정됐다.
비록 기부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변경된 대상지에 지어질 박물관 설계권은 김희옥이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젊은 건축가들에게 설계 기회를 주었으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를 냈고 자신은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이 외 심사위원은 조성룡, 한만원, 김준성, 임재용, 선탁). 결국 제한경쟁 설계방식으로 설계공모가 추진됐다. 설계 참여에 지명된 건축가는 장영철, 전숙희 와이즈WISE건축 外 전병욱 JNK건축, 이정훈 조호JOHO건축, 김창균 UTAA건축이었다. 4개 회사 중 와이즈건축이 '기억과 추모와 치유와 기록'이라는 주제로 당선됐다. 당선작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전시 공간을 과감히 2층으로 올리고 1층에 관람객들과 박물관 관계자가 소통하도록 사랑방을 둔 '사랑방 같은 박물관'이라는 참신한 해석을 내놓았다"라고 평했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의 개관일은 2012년 5월 5일, 어린이날이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처럼 전쟁이 만들어낸 불행한 역사의 희생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미래의 주역인 어린이들에게 '평화'의 가치를 알려주려는 의미"라고 한다. 설계자는 건물 안팎 공간에서 '기억과 추모와 치유와 기록'의 스토리라인이 흘러가는 시퀀스Sequence를 이루도록 했다.
대지 서쪽 구석에 있는 주출입구로 오는 동안 관람객에게 박물관은 큰 건물처럼 보인다(위 사진). 건물 기단부 옹벽에 쓰인 전벽돌이 건물 입면에도 사용되어 하나의 매스로 인지되기 때문이다. 그럼 왜 실제 크기보다 더 커보이게 했을까? 위안부 할머니들이 그렇게 보였으면 좋겠다고 했단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좋은 집은 큰 집이다. 고래등 같은 큰 집. '나라의 주권을 찾기 위해 자랑스런 투쟁'을 한 사람들이 기념되는 그런 큰 집. 위안부 할머니들도 그런 큰 집을 가지고 싶으셨을 것이다.
평범한 동네와 전쟁이라는 콘텐츠 간에 생기는 간극은 의외로 순식간에 바뀐다. 관람객이 박물관의 작은 출입구를 들어서 맞닥뜨리는 공간은 좁은 통로다. '쇄석길'이라 불리는 이 통로에서 관람객은 어디로 끌려갈지 모르고 전쟁터로 끌려간 위안부 할머니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경험한다. 할머니들의 평범한 삶이 전쟁터라는 비일상적인 환경으로 순식간에 이동하는 경험. 쇄석길은 건물과 뒤쪽 옹벽 사이의 틈이다. 박물관이 집이었을 때 길고양이나 다니던 틈. 척척거리는 군화소리가 내가 밟는 쇄석소리와 뒤섞이는 이 좁은 틈에서 삶은 전쟁터로 전환된다. 어쩌면 이 둘은 실제로도 정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그 가까움은 집이었을 당시 2층 발코니였던 박물관의 추모관에서도 느껴진다.
발코니 난간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벽돌을 듬성듬성 쌓아 만든 벽이 있다(위 사진). 듬성듬성 쌓인 벽돌은 틈을 만든다. 벽돌 안쪽에는 돌아가신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진과 이름 그리고 날짜가 적혀 있다. 그 기록 사이사이로 박물관 주변의 지극히 평범한 풍경이 포개진다. 이 장면이 가장 슬펐다(아래사진).
현재 나의 삶은 '나라의 주권을 찾기 위한 자랑스런 투쟁'을 통해 있을 수 있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 장소에서 추모하는 위안부 할머니들도 나의 매일매일과 전혀 상관없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싶은 역사와 억눌리고 피해를 받은 역사 모두가 있었기에 지금 내가 보는 평범한 풍경이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마도 맞다.
발코니 난간의 벽이 만들어내는 장면을 보면서 지극히 평범한,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을 지닌 동네와 박물관이 얘기하고자 하는 전쟁 그리고 피해자 사이에 간극을 굳이 메꿀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 간극이 있기 때문에 평범한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전쟁의 리얼러티Reality와 그 전쟁으로 희생된 할머니들을 더 처절하게, 하지만 사색적으로 추모하고 기념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잘 모르는 것으로 교육시키지 말고 내가 잘 아는 것을 통해 무엇이든 느끼게 해주자고 다짐 했었다. 그래서 태어난 지 얼마 안됐을 때부터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녔다. 심지어는 뱃속에 있을 때도 그랬다. 내가 데리고 간 곳에서 아이가 무언가를 꼭 얻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공감하고 싶은 그 곳의 분위기만이라도 느껴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나만의 교육방식이다. 그런데 정말 미안하게도 이 박물관만큼은 데리고 오고 싶지 않았다. 박물관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사실을 아이에게 설명해줄 자신이 내게는 아직 없다. 하지만 나를 울컥하게 만든 늘 보아온 주변의 평범한 풍경과 늘 대하는 햇살을 공감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 그때 함께 오려고 한다. 그때까지 난 이 집이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이었으면 좋겠다.
도시설계가 Archur
Archur가 해석하는 도시, 건축.
저서. <닮은 도시 다른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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