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과 발로 풍경을 읽어내는 사람이고
읽어낸 풍경을 꾸준히 기록하는 사람이고
그 기록들을 양분 삼아 디자인을 풀어내는 사람입니다.
- 전문분야
- 설계
- 대표자
- 천경환
- 설립
- 2011년
- 주소
- 서울 종로구 창덕궁길150-5 깊은풍경건축사사무소
- 연락처
- 02-525-0429
- 이메일
- lazybirdc@naver.com
Posted on 2018.01.10
- 체르베니카멘 #02. 내부
- 재미나요 l 바깥나라
건물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하얀색으로 단순하게 정돈된 일련의 돔들이 늘어선 복도.
접하는 언저리에는 아주 살짝, 보일 듯 말듯 얕은 장식 패턴이 붙어있었고요..
사슴 머리와 뿔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깊은 산과 숲으로 풍요로운 슬로바키아의 환경이 짐작되는 모습입니다.
하얗게 매끈한 벽과 천정과는 조금 다른, 바깥의 길바닥 같은 느낌의 복도 바닥.
밖에서는 그냥 평면상의 그림처럼 보였던 창문인데, 안에서는 조금 다르게 연출되어 있었네요. 당연한 일이겠지만 창문을 통해 밖에서는 읽히지 않았던 벽의 두께가 가늠이 되는데, 워낙 두껍다 보니, 창문 언저리가 또 다른 켜의 공간처럼 연출되는 모습입니다. 마치 작은 ‘방’ 같은 느낌이랄까요.
며칠 뒤 방문했던 보즈니체흐라드 같은 다른 성에서는, 창문 부근의 공간에 붙박이 의자 등이 붙어서, 정말로 다른 방으로 꾸며진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창턱마다 화병이나 화로 같은 소품들이 하나씩 놓여 있어서, 한 켜 나뉜 또 다른 공간이라는 느낌을 더 강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부유한 가문이 경영했던 성으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는 순간.
당시 인기 많았던 이탈리아 스타일로 지은 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도 ‘이탈리아의 방’ 쯤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단지 이국적이라는 사실 만으로 다른 문화, 다른 스타일에 끌리는 모습을 사대적이라며 곧잘 비판하는데, 다른 배경의 문화를 동경하는 마음은 시대나 지역을 떠나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인가 봅니다.
요즘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어 결혼식장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흐르는 지하수 바로 위에 바닥 돌판을 얹어 만든 방이라 저절로 온도조절이 된다는 설명도 들었습니다만, 어찌되었든 우선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화려한 색깔과 장식들입니다.
유럽의 입장에서는 다소 변방이라고 볼 수 있는 슬로바키아. 당시 사람들이 가졌을 지 모를, 정통유럽(?) 문화를 선망하는 마음이 읽히는 듯도 합니다.
복도에는 체르베니카멘의 전체 모형이 있었습니다. 직사각형으로 네모난 윤곽과, 네 개의 모서리마다 세워진 둥근 대포탑(터렛)이 잘 보이네요. 그리고 한 때 귀한 광물들이 가득 저장되어 있었을 지하 창고의 단면이 보입니다. 지하창고와 대포탑. 화려한 이탈리아 방에 잠시 가려져있는, 체르베니카멘의 진짜 모습입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아주 완만한 계단의 난간. 관통하는 기둥.
2층으로 올라가는 길…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입니다.
하얀 벽을 배경으로 단순한 선처럼 표현되고 있는 손 스침이 보기 좋았고, 한편으로는, 벽을 가득 채운 그림들이 눈길을 끌었는데요. 벽의 역할이라고 하면, 비바람과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고, 공간을 구획하여 쓰임새를 담는다는 것 등을 우선 떠올리게 되는데, 그에 못지않게, 이야기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달한다는 의미 또한 중요한 것 같습니다. 때로는, 이야기를 담아서 전달하기 위해 지어진 듯 한 건물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야기를 담은 벽.
1,2층을 연결하는 계단 언저리는, 흔히 보는 계단실이나 로비, 홀 등에서의 구성과 얼핏 비슷해 보입니다만,
요즈음의 건물 유형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복도’와 ‘방’이 따로 구분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병원, 호텔, 학교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쭉 뻗은 복도를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벽으로 나뉜 방들이 나열되는 형식이 아닙니다. 그냥 방들의 연속인데, 문과 문을 연결하는 동선의 영역이, 오직 바닥에 깔린 양탄자를 통해, 마치 복도처럼 암시되고 있을 뿐입니다.
당연한 듯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사용하고 있는 방-복도식의 유형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계급이 세분화되고,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이 복잡해짐에 따라 다듬어져서 만들어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앞서 1층에서 보았던 것처럼, 벽이 워낙 두툼하다 보니, 건물 안팎을 관통하는 창문 언저리 또한 두툼하게 됩니다.
창 너머로부터 들어오는 빛에 물들어, 어두컴컴한 내부 공간에 대조되어, 창문 언저리가 ‘빛의 공간’, ‘빛의 방’이 되는 효과가 생기는데요.
솔리드와 보이드, 음과 양이 역전되어, 빛의 볼륨이 양감을 띄면서 도드라지는 효과가 나는데, 잘 알려진 대로, 르 코르뷔제의 롱샹 성당에 응용되기도 하고요.
복도 구분 없이 줄줄이 연결된 방에는, 영화로웠던 과거를 보여주는 온갖 보물들이 놓여있었는데, 이런 것들이 컬렉션이 되는 것이고, 성은 박물관이 되는 것이고.
막다른 방에는 온갖 병장기류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좀 더 자세히 보지 못해 아쉽습니다. 워낙 개인적인 관심사라, 후루룩 넘어갔네요.
건물 바닥은 돌로 포장되어, 여기가 건물 속인지, 길바닥인지 헷갈리는 상황.
병장기류가 전시되어 있었던 막다른 방의 반대편, 또 다른 막다른 곳에는, 아주 커다란 방이 있었습니다. 디귿자로 꺾어지는 양탄자가, 이 방이 막다른 방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지요.
유물을 전시하는 방식으로는, 이런 방법이 제일 좋습니다. 공간 속, 원래 점유하고 있던 방식 그대로 놓여 전시되는 방식. 장소의 의미, 유물의 의미 모두 생생히 전달되는.
나란히 뚫려있는 창문들이 인상적입니다.
창문과 창문 언저리의 깎여진 공간, 창문 앞과 옆에 놓여있는 가구들과 가구 위에 놓인 소품들까지. 여러 요소들이 맞춤처럼 짜여져, 장소가 됩니다.
건축가 천경환
손과 발로 풍경을 읽어내는 사람이고
읽어낸 풍경을 꾸준히 기록하는 사람이고
그 기록들을 양분 삼아 디자인을 풀어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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