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19.05.12
- 의상대사, 부석사 창건(676.2.10)
- 부석사浮石寺
부석사浮石寺. 글자 그대로 '공중에 뜬 돌'.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얘기인데 공중에 떴다는 그 돌은 현재 부석사 무량수전 서쪽에 있다. 어쩌다 돌이 공중에 떴을까? 사연은 이렇다. 661년 의상대사는 당나라로 유학을 간다. 원효와 함께 갔는데, 원효는 중간에 깨우친 바가 있어 신라로 되돌아 가고 의상만 당나라로 갔다. 원효가 깨우친 계기가 그 유명한 해골물 사건이다.
당나라에 간 의상은 한 여인의 청혼을 받는다. 선묘 낭자다. 의상의 답은 NO! 신라로 떠나는 의상을 보고 선묘 낭자는 용이 되어 의상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며 바다로 투신한다. 감동 받은 용왕님. 선묘를 용으로 만든다. 한편,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화엄경을 전파하다 절을 세우기 위해 봉황산에 들어간다. 그런데 봉황산에 살고 있던 도둑 무리가 의상의 절 건립을 방해한다. 이때 용이 된 선묘가 나타나 바위로 변했다. 하늘을 나는 용이 변했으니 변한 바위도 하늘에 떠 있었다. 중력을 거스르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으니 도둑은 도망을 쳤고 의상은 절을 지을 수 있었다. 의상은 선묘를 기리기 위해 절 이름을 '부석사'라 했다. '선묘설화'다.
무량수전 서쪽에 있는 돌이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아무리 그 뜬 돌이라 해도, 그래서 그 돌이 논픽션의 근거라 해도 선묘설화는 현실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풍부한 상상을 통해 설화를 현실의 이야기로 받아들였다는 과거지만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한 날짜는 너무 정확하다. 676년 2월 10일. 어떤 근거일까? 어찌됐든 그 날짜가 정확하다면 올해는 부석사 창건 1342년이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를 중국에서 간이화 하면서 등장한 종파가 '선종'과 '정토종'이다. 그 중 정토는 부처가 계신 곳. 정토종 사찰의 본당명은 '수명이 한량없는 절', 즉 '무량수전無量壽殿'이다. 그러니 무량수전은 속세의 극락정토, 서방정토다(자세한 내용은 2016년 5월 14일 석가탄신일 2640주년에 쓴 '담양 정토사 무량수전' 글 참고).
무량수전이 극락정토이니 그 다다름은 수행의 과정을 상징해야 했다. 사찰의 배치는 내향적이어서 문을 통 해 한 단계 한 단계 들어가는 과정에 의미가 있다. 그 과정의 첫 단계에 일주문一株門이 있는데 현판에는 '太白山 浮石寺'라 적혀 있다. 부석사 일주문의 이름은 '조계문'이다(위 사진). 사찰의 이름과 함께 사찰이 앉혀진 산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건 불교에서 사찰은 산과 항상 어울려지고 그래서 산 또한 사찰배치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이해 한다.
조계문 다음은 천왕문天王門이다(위 사진). 어릴 적 사찰을 둘러보다 꿈에 나올까 두려웠던 사천왕상이 이곳에 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범종각을 가운데 두고 좌측에 취현암, 우측에 의향각이 나온다. 흡사 쌍탑식 형태의 가람배치 같지만 법당 자리에 법당이 없고 범종각이 있다. 범종각은 1746년에 세워졌다. 부석사의 궁극적 공간인 무량수전 그리고 안양루는 범종각에 의해 아주 절묘하게 가려져 있다(아래사진).
범종각 1층 시커먼 어둠의 기둥공간을 나올 쯤 부석사 궁극의 공간인 무량수전과 안양루가 보인다. 그런데 그 방향이 삐딱하다. 30도 틀었다고 하는데, 그 정확한 각도가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애초 방향을 튼 누군가도 몇 도를 생각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양문으로 오르는 계단 앞, 단 아래 낮은 돌은 곧게 오르지 말라고 소심하게 얘기한다. 그리고 그 행동은 하나의 세계가 끝났음을 암시한다. 안양루는 1611년에 세워졌다.
안양安養은 극락極樂의 다른 이름이다. 안양루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세계는 극락의 세계이니 조계문에서 범종각까지 이르는 축에 포개질 수 없었다. 안양루 1층에는 '안양문'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안양루 현판에 안양루라 적지 않은 이유는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계단 아래에서 올려다 본 안양루는 활짝 편 학의 날개 같다. 많은 사람들이 안양루를 보고 '비상飛上'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는데 괜히 그런 건 아닌 듯하다(위 사진). 범종각처럼 이번에는 안양루 1층을 통해 기둥공간을 지나 가파른 계단 아래 서면 무량수전이 올려다 보인다. 하지만 현판은 석등에 가려져 보이지 않으니 서방정토는 보고도 닿을 수 없는 곳인 것 같다(아래사진).
안양문을 통과해 최순우가 쓴 책 제목처럼 《무량수전 배흐림기둥에 기대서서, 학고재》 앞으로 펼쳐진 풍경을 보는 순간 안양문은 안양루로 전환된다. 김개천은 "산과 하늘의 우주만이 부각"되는 이 장면에서 "안양루는 우주의 중심이 된다"고 썼다《명묵의 건축-한국 전통의 명건축 24선, 김개천, 컬처그라퍼》. 김훈은 "부석사에서 내려다보는 소백산맥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을 달리는 산맥으로 떠오르기 십상인데, 그 풍경은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설명하려는 자에게 침묵을 명령하는 듯하다. 그 풍경을 설명하려는 시인, 묵객들의 끈질긴 허영심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중략)... 당唐에서 화엄 수학을 마치고 전란에 휩싸인 조국으로 돌아와 닫힌 산하를 열어서 화엄의 도량을 건설하던 무렵의 젊은 의상의 마음속 비밀을 헤아리는 일이 부석사로 가는 여행의 사명이라야 옳을 것이다"고 했다《자전거여행2, 김훈, 문학동네》.
부석사 무량수전은 1016년 원융국사가 중창했지만 1358년 왜구에 의해 전소돼 1376년 재건됐다. 서방정토는 밤이 없는 광명의 세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언제나 음악이 연주되고 꽃비가 내리는 화려한 세상이라고 한다. 하늘이 이 정도면 땅도 상응해 주어야 한다. 경전에 따르면 서방정토의 바닥은 빛나는 유리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좀 정신없을 것 같지만 지극히 즐거운極樂 공간에 대한 상징이라 이해하면 될 듯하다. 어찌됐든 극락의 공간을 상징하는 무량수전은 일반적으로 사찰에서 가장 화려하고 장엄하다. 부석사 무량수전도 예외가 아니어서 바닥에 유약을 바른 청유리 전돌을 깔았다.
무량수전 내부에서 극락의 공간을 표현하려는 수고보다 더 인상적인 건 아미타불의 위치다. 전통건축은 전면의 폭이 측면 보다 넓거나 같다. 전통건축은 깊이 있는 공간이 아니라 펼쳐진 공간이다. 무량수전도 전면5칸, 측면3칸이다. 전통건축은 건물의 정면성을 확실하게 부여한 평면을 하고 있고 그에 따라 건물 안에서 시선은 넓은 전면을 향해 펼쳐진다. 불당만 봐도 일반적으로 불상은 전면을 보고 앉혀져 있다. 하지만 무량수전 내 아미타불은 건물의 전면이 아닌 측면을 바라보고 있다. 무량수전의 좌향이 거의 정남이니 아미타불은 서쪽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아미타불이 서방 극락세계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사족을 하나 붙이려 한다.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하는 스튜디오 드리프트Studio Drift가 공중에 돌을 띄웠다(위 사진). 작품명은 '드리프터Drifter'. 스튜디오 드리프트 홈페이지에 가면 동영상도 볼 수 있으니 어떻게 돌을 띄웠는지 확인할 수 있다. 스튜디오 드리프트를 설립한 Lonneke Gordijin과 Ralph Nauta가 '선묘설화'를 알 리는 없다. 하지만 작품의 의도와 제목 -Drifter; 정착을 못하는 사람, (직장 등을)전전하는 사람- 을 보면 용이 된 선묘가 나타난 이유가 의상의 절 건립을 반대하는 도둑들에게 겁을 주기 위함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치피 설화가 되려면 상상을 해야 하니 멋대로 상상을 해보면 의상의 아내가 되지 못한 선묘는 의상 주위를 멤도는 드리프터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멤도는 장면을 우연히 본 도둑들이 겁을 먹고 도망을 간건 아닐까? 물론 이야기가 이렇게 되면 선묘(善妙, 좋은 묘함)의 이름은 바뀌어야겠지.
도시설계가 Archur
Archur가 해석하는 도시, 건축.
저서. <닮은 도시 다른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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