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토요일,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 서거 111주년이 되는 해다. 9년전 그러니까 그의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에 우리는 그를 기념하기 위한 새로운 기념관을 남산에 지었다. 남산(南山). '남쪽에 있는 산'이라는 의미가 전부다. 참 중성적이면서도 어느 고을에나 있을 법한, 마치 '뒷산'과 같은 이름이다. Naver에서 남산을 검색해 보면 같은 이름을 지닌 지명이 몇 백개가 나온다. 한양에 있는 남산은 과거 도시의 남쪽 경계를 이루던 산이다. 지금은 서울의 경계가 넓어져 마치 우산처럼 서울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옛날에는 남산이 아닌 '목멱산(木覓山)'이라 불렸다고 하는데, 이 명칭도 '마뫼'라는 옛말에서 유래했고 이 또한 '남산'이란 뜻이라고 한다. 현재 서울이 아닌 과거 한양을 기준으로 봤을때 남산은 백성들에게 가장 친숙한 공간이었을 듯 하다. 높이(남산의 높이는 262m) 면에서도 그렇고 주변에 어떤 시설이 있었는가를 생각해 봐도 왕이 머무는 궁궐이 있던 북악산(높이 342m)과 인왕산(높이 338m) 보다는 남대문 시장이 있던 남산이 백성들에겐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는 공간이었을 듯 싶다. 그래서 '남산'이라 불리지 않았을까?
1910년 고종이 자신의 친필로 쓴 '한양공원'이라고 새겨진 석비를 세우면서 남산을 시민공원으로 개발(?)했다. 하지만 1925년 조선총독부는 경성신사 조선신궁을 남산에 세웠다. 그리고 1932년에는 절도 하나 세웠는데 그 이름이 '박문사'였다. 둘의 위치는 남산을 기준으로 북서쪽과 북동쪽이었다. 현재 위치로 얘기하면 조선신궁은 서울특별시 교육연구정보원(舊 남산어린이회관)이 있는 분수광장이었고 박문사는 신라호텔이 있는 자리다. 조선신궁은 식민지 조선의 정신적, 종교적 지배를 꾀함이었고 박문사는 이토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이었다. 일본은 박문사를 세우기 위해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옮겨다 놨다.
조선신궁은 1945년 광복이 되자 그 다음날 폐쇄됐다. 그것도 일본인들 스스로 했다. 조선신궁은 조선인들에게 강요한 그들 생각의 뿌리였기에 일본인들은 다른 사람의 손으로 훼손되기 보다는 그들 스스로 폐쇄하는게 더 낫다고 판단한 것 같다. 하지만 박문사는 대한민국 건국 후 철거됐다. 그리고 그 자리에 신라호텔이 세워졌다. 박문사가 추모하고자 했던 이토히로부미는 1대 일본제국의 내각총리대신이자 조선통감부의 통감이었다. 죽은 날은 1909년 10월 26일이었고 그를 사살한 사람은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었다. 대한제국을 식민통치한 일본, 그 일본의 정신적, 종교적 지배를 상징했던 조선신궁 그리고 실질적인 행동에 앞장섰던 이토히로부미, 마지막으로 그를 저 세상으로 보낸 안중근의 관계는 한양 남쪽에 있던 산, 남산을 중심으로 관계맺고 있다. 흥미로운건 이토 히로부미든 안중근이든 그들이 남산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적은 없다는 사실이다(안중근은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이토히로부미가 박문사라는 공간을 통해 남산과 관계 맺음을 한건 1932년 일본인들에 의해서다. 그럼 안중근이 남산과 관계맺은건 언제 누구에 의해서 였을까? 남산에 안중근을 기념하기 위한 공간을 만들자는 건의를 한 사람은 안춘생이다. 안춘생은 안중근의 종질(오촌관계)로 안중근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고 광복 후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교장과 제9대 국회위원을 지낸 인물이다. 안춘생이 안중근의사 기념관 건립 부지로 건의한 곳은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 안중근이 살해한 인물이 이토히로부미고 그를 추모한 절이 박문사이므로 박문사가 있던 자리에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지어야 한다는 논리가 일견 더 타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이에는 이, 눈에는 눈'과 같은 생각으로 안중근은 행동하지 않았기에 -그렇기에 안중근은 Terrorist가 아니다.- 박문사보다 더 상위에서 조선인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려한 상징인 조선신궁 자리에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짓자는 결정은 참 대의에 맞다. 뭐 안춘생이 건립 건의를 한 시기에 박문사 자리에 다른 건물이 있었다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세계의 대세를 짐작하고 해외에서 신호흡을 하는자 어찌 무모하게 타인의 생명을 빼앗을 자가 있을 것인가. 이등박문의 정책이 동양평화에 지대한 해를 끼치는 일에 일신 일가를 돌볼 여지가 없이 결행한 것이다."
-안중근의사의 법정진술에서-
안춘생의 기념관 건립 건의 전에도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는 사업과 추모행사는 꾸준히 전개돼 왔었다고 한다. 그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이강과 광복군으로 활약했던 김홍일, 안춘생 등 15명이 중심이 되어 1963년 4월 '사단법인 안중근의사숭모회'를 설립했었고 그해 12월 정부의 승인도 받았었다. 안중근의사를 기념하는 첫번째 건물은 1970년 10월 개관했다. 당시 대부분의 공공시설이 그렇듯 건물은 Concrete로 된 한옥 Style이었다. 사업비 중 일부는 박정희 대통령이 지원했었다.
안중근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언도받고 3월 26일 순국했다. 그로부터 60년 후에 그를 기념하는 첫 번째 공간이 만들어졌고 다시 40년이 지나 그가 서거한지 100년이 된 2010년, 그를 기념하는 두 번째 공간이 만들어졌다. 첫 번째 기념관을 지을땐 '기념관'이란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가? '기념관'이 전시관이나 박물관과 같은 차이점은 무엇인가? '안중근'을 기념하는 공간은 다른 사람을 기념하는 공간과 무엇이 달라야 하고 무엇으로 상징성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하지 못했다. 우선 짓는게 먼저였다. 그 시대 안중근의사 기념관 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이 그랬다. 다시 40년이 지나 어떤 이유가 됐든 다시 짓는 기념관은 위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곱씹을 필요가 있었다. 지금 시대는 첫 번째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지을때와는 달리 모든 생활에서 무조건 하고나서 생각하는 시대가 아니기에 그런 고민은 공감대와 타당성을 넘어 반드시 고민하고 가야할 문제였다.
새로운 기념관 건설을 위한 현상설계는 2007년에 열렸다. 대지는 옛 기념관이 있던 자리가 아닌 그 뒷편(남쪽)이었다. 흥미로운 건 공모전 설계조건 중 직사각형 대지(1,715㎡ = 35m x 49m)를 정해주고는 1층 면적이 대지면적의 75%(1,300㎡), 지하층면적이 대지면적의 96%(1,650㎡)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주어진 직각사각형의 대지를 꽉 채운 Mass를 발주처 측에서 원했다는 걸 의미하는데, 아마도 기념관에 필요한 면적을 최대한 확보하면서도 기념관이 남산으로의 조망을 막지 않아야 한다는 대지가 갖는 제약사항을 해결하기 위한 설계의 전제조건이었던 것 같다. 뭐 설계안에 응모하는 건축가는 결국 주어진 대지를 기준으로 봤을때 75%의 건폐율을 지키기 위해서 건축물의 mass가 Box형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그래서 건축가의 창의력을 제한하는 조건으로 해석했을 수도 있다.
현상설계 당선자는 'DLIM'. 이 설계사무소 Homepage Main 화면에 나오듯이 'DLIM'은 'Design & Life In Mind'의 약자다. 이 작은 설계사무소를 이끄는 건축가는 임영환과 김선현으로 부부건축가다. 그래서 DLIM은 사무소 대표인 임영환의 성인 'LIM'과 Design의 'D'의 합성어이기도 하다. DLIM에게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그들이 사무소를 차리고 처음 준비한 현상공모작품으로 첫 타석에 Homerun을 친 셈이다. 물론 뒤에 얘기하겠지만 그 Homerun을 누가 쳤는지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고 더군다나 그 타자가 속한 구단도 코만 파고 있었다.
"매번 초기설계안을 구상하면서, 나는 많은 유혹들에 부딪친다. 나의 건축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여러 수단들,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선정적인 Design 어휘들, 그들의 유혹에 쉽게 굴복 한다면, 나는 한낱 피상적인 Stylist로 전락할 것이며, 마음 속의 삶을 조각하는 좋은 건축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내 건축일 뿐 대중과 함께하는 진정한 건축이 아니다. 이번 안중근의사 기념관 설계경기를 준비하면서도 그분의 글을 읽고 영상들을 보면서 그 행적을 쫓았던 과정이 결국 고인인 안의사님의 마음속 그림을 찾고자 했던 나만의 대화방식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논단 Project Report : 안중근의사 기념관, 임영환, 건축(대한건축학회지) 200708(51)-
현상설계가 끝나고 2008년 옛 건물이 철거됐다. 그리고 2009년 4월 공사를 시작해서 2010년 10월에 새로운 기념관이 완공됐다. 현상 제안안과 최종 건설된 모습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특히 기념관의 전체적인 모습을 결정한 12개의 직육체면체가 4x3으로 나열된 조합은 그대로 유지됐다. 다만 현상제안시 건축가가 '공간과 길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해 다른 기울기를 가진 세 개의 Ramp로 제안'했던 접근동선은 기념관 북쪽에서 시작해 서쪽을 따라 지나가 Sunken된 남서쪽 주출입구로 꺾어 들어가는 주 진입동선만 남고 사라졌다. 아래 왼쪽 Image는 현재 남아 있는 주진입 Ramp옆에 기울기를 더 심하게 해서 육면체 사이로 들어가도록 설계한 Ramp의 모습을 보여준다.
현상 최종안에 들었던 계획안 중 DLIM의 안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 작품은 내외종합건축사사무소와 박종혁이 제안했던 것(위 Image, 가작)으로 마치 지형이 갈라진 듯한 외관을 하고 있다. 내외건축 外 가작을 받은 곳은 JU한양대Studio와 JU건축사사무소다(-설계경기 vol65-).
"기념관이 남산에 우뚝 선 건축물이 아니라 산자락의 일부로 읽혀졌으면 하는 바람이 설계의 주된 의도였기 때문에 계획 건축물 주변의 대지를 Design하는 일은 중요한 과정이었다."
-논단 Project Report : 안중근의사 기념관, 박종혁, 건축(대한건축학회지) 200707(51)-
기념관 진입은 전술했듯이 기념관 북서쪽 끝에서 서쪽 면을 따라 지하1층으로 차츰 내려오는 Ramp를 따라 진행된다('명상의 길'). Ramp 우측으로는 '경계의 못'이라고 해서 박막의 벽천에 안중근 의사의 유묵과 어록이 새겨져 있다. Sunken된 '명상의 길'을 따라 내려와 좌측으로 돌면 기념관 주출입구가 나온다. 4x3으로 정렬된 12개의 기둥 中 남서쪽 Corner에 있는 기둥이다. 주 출입구를 통과해 들어오면 우측에 4x3으로 정렬된 12개의 Mass 중 가운데 외기를 면하고 있지 않은 두개 Mass가 있는 자리에 천장까지 뚫린 참배홀이 나온다. 이 공간이 이 건축물이 전시관이나 박물관이 아닌 기념관인 이유를 설명해 준다. 3개층을 관통해 떨어지는 천창 아래 안중근의사의 좌상이 놓여있고 태극을 감싼 피로 쓴 '대한독립'이라는 글씨가 나를 압도한다. Camera Shutter도 누르지 못하고 멍하니 처다봤다. 아니 그가 나를 응시했고 난 그 응시에 대응할 수 밖에 없었다. 왠지 그가 묻는듯 했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 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 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동포에게 고함-
멍한 기분을 추스리고 참배홀을 보니 조금씩 공간을 이루는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참배홀을 감싸고 있는 벽체는 대부분 화산석이다. 그래서 공간은 더 묵직하다. 그런데 왼쪽 전시실로 나 있는 수평띠 창, 환기구, 오른쪽 벽에 있는 전시관으로 오르는 Escalator 선형에 맞춘 개구부와 상부 Polycarbonate 그리고 정면 상부 하얀색 석고보드와 천창 아래 매달린 조명설비 등이 좀 어지럽게 보였다. 이 모든걸 생략한채 칼로 자른듯 화산석으로만 마감된 딱 떨어지는 공간 내부에서 안중근의 좌상을 마주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너무 엄숙하고 압도적이었을까? 그렇다면 안중근의 좌상을 기단에서 내리고 참배객이 서 있는 눈 높이에 안중근 좌상의 눈높이를 맞췄다며 어땠을까? 아무말 없이 참배객과 안중근의 좌상 만이 있는 공간에서 눈을 마주하는 경험. 그랬다면 난 시선을 피했을지도 모른다.
"하늘이 사람을 내어 세상이 모두 형제가 되었다. 각각 자유를 지켜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누구나 가진 떳떳한 정이라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으레 문명한 시대라 일컫지만 나는 홀로 그렇지 않는 것을 탄식한다. 무릇 문명이라는 것은 동서양 잘난 이 못난 이 남녀노소를 물을 것 없이 각각 천부의 성품을 지키고 도덕을 숭상하여 서로 다투는 마음이 없이 제 땅에서 편안히 생업을 즐기면서 같이 태평을 누리는 그것이라.
그런데 오늘의 시대를 그렇지 못하여 이른바 상등사회의 고등인물들은 의논한다는 것이 경쟁하는 것이요 연구한다는 것이 사람 죽이는 기계라. 그래서 동서양 육대주에 대포 연기와 탄환 빗발이 그칠 날이 없으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닐 것이냐. 이제 동양 대세를 말하면 비참한 현상이 더욱 심하여 참으로 기록하기 어렵다.
이른바 이토히로부미는 천하대세를 깊이 헤아려 알지 못하고 함부로 잔혹한 정책을 써서 동양 전체가 장차 멸망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슬프다. 천하대세를 멀리 걱겅하는 청년들이 어찌 팔짱만 끼고 아무런 방책도 없이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을까보냐. 그러므로 나는 생각다 못하여 하얼빈에서 총 한 방으로 만인이 보는 눈 앞에서 눍은 도적 이토의 죄악을 성토하여 뜻 있는 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한국인 안응칠 소회-
전시공간은 참배홀을 지나 지하1층 남쪽열 가운데 두개 Mass와 1층 남쪽열 3개 Mass 그리고 2층 남쪽과 북쪽열 3개 Mass에 있다. 각 층간 이동은 Escalator로 이루어지는데, 이동하면서 안중근의 좌상을 본다는 의도로 사선으로 벽을 도려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참배홀의 공간감이 좀 산만하다. 게다가 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선의 개구부를 통해 보여 더 그렇게 느껴진다. 건축가는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역시 전시관에는 깨알같은 글씨와 Mannequin들이 안중근의 생애를 재현하고 있다. 전시를 구현해내는 방식의 진부함이야 뭐 공공시설 한두 곳에서 느낀 건 아니기에 그렇다 치더라도 전체 투입 공사비(180억원)의 1/6이 전시시설에 투입된(30억원) 건축물 치고는 너무 뻔하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전시관 곳곳에 적힌 안중근의사의 어록들은 잠시의 집중력을 발휘에 읽어둘 필요가 있다(2009년 12월 '안중근의사 기념관 건립 전시물제작설치 제안요청서'에 전시면적 1,214㎡, 집회실 내부 397㎡의 전시 기본계획설계 제안과 전시연출계획 및 전시 Contents 구성을 통한 전시공간 창출계획 제안 등의 추정사업비는 30억원).
2층에서 ㄷ자로 이어진 전시동선이 끝나는 공간은 12개의 Mass중 남동쪽 Corner에, 이중 U-Glass로 마감된 다른 Mass와는 다르게 유일하게 THK28 복층유리로 마감된 Mass다. 아마도 건축가가 이 Mass만 투명한 유리로 마감한 이유는 관람을 끝낸 관람객이 이 Mass를 가득채운 계단을 내려오면서 기념관 주변 풍경을 감상하라는 의도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의도를 극대화하기 위해 건축가는 계단의 방향을 불규칙하게 꺾었으며 군데군데 의자도 두어 걸터앉아 풍경을 감상토록 했다. 실제 이 mass에서 남동쪽을 바라보면 남산의 상징 N Tower가 바로 보인다.
4x3 행렬로 배치된 12개의 Mass 중 마지막에 놓인 이 투명한 Mass는 분명 다른 11개의 Mass와 다르다. 애초 설계자가 파낸 땅을 채우고 세워진 12개의 기둥으로 단지동맹을 상징하려 했다면 기둥은 그 시작이 땅이기에 '무거움'의 속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내부가 아리아리하게 외부로 보이는 U-Glass로 Mass를 마감한 이유도 유리가 지닌 투명함 보다는 불투명함을 강조해 기둥이 솟아난 땅과의 연계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12개의 Mass 모두를 땅과의 연계성, 그럼으로서 갖는 무거움의 속성을 의도하지는 않았다. 마지막 Mass, 모든 관람 동선이 끝나 기념관을 나가기 직전 관람객이 지나쳐야 하는 Mass는 그 무거움과는 정반대의 '가벼움'으로 갔다. 그래서 투명한 유리로 마감했고 심지어 그 Mass 안에 놓여진 계단도 천정에서 달아매는 Suspension구조를 택했다.
조금더 내 나름대로 해석해보자면 마지막 유리마감 mass는 건축가가 의도한 '안중근과 현재 우리와의 관계의 공간'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과 폐쇄된 기념관에서 관람객이 그 기념관이 기념하고자 하는 대상만을 접하고 그 곳을 나와버린다면 마치 역사책 한권 읽고 끝나버리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기념관이 '기념공간'이자 '공공공간'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가지기에 기념관에서 기념하고자 하는 대상은 현재를 사는 우리 삶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살아있는 역사', '기념관이 기념하고자 하는 대상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Message'는 전시관의 깨알같은 글씨를 통해 관람객의 맘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기에 건축가는 관람을 마치고 아직 기념관이라는 공간 내부에 있을 때 기념하고자 하는 대상과 내가 사는 공간사이의 관계를 이 유리 Mass에서 찾기를 바랬던 것 같다. 그래서 유리 Box를 감싸고 있는 수공간은 '상징못'이고 그 상징못의 물은 비록 내외부 경계를 가르는 벽체로 나뉘어지기는 하지만 내부에서도 연속되는 것이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Holocaust 기념비 공원처럼, 공간 스스로 과거로부터의 Message를 전달하는 추모의 장소가 되고자 했습니다. 무표정한 반투명 유리 Box 열두 개가 이 공간의 전체적인얼개를 보여줍니다. 반투명 유리 Box 열두 개는 우열 없이 단지 동일한 크기와 위계로 하나의 사각형 Frame 안에 모여 있습니다. 이런 상징적인 배열은 아마도 의사 안중근과 피의 맹세를 했던 동의단지회 12위를 상징하려는 의도겠지요. 마치 그들 전체를 추모하는 비석처럼 보입니다. 아울러 건축가는 이 기념관이 단순히 안중근 개인을 신격화하는 공간이 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그와 같은 생각을 했던 동시대의 '또 다른 안중근들'을 함께 기억하자는 의미를 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그것이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통해 현재 우리가 느껴야 할 정신이라고 상상하면서 안중근이라는 인물에 대해 그리고 그가 관계했던 역사적 시간에 대해 좀더 밀도 있게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서울의 건축, 좋아하세요, 최준석-
건축가가 의도한 관람 동선은 마지막 유리마감 Mass에서 한 개층만 내려와 1층에서 기념관 동쪽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 Bridge를 통해 기념관을 나오면 관람객은 앞서 유리마감 mass에서 봤던 남산의 풍경을 마주한다. 그런데 역시도 기념관 관리 편의를 위해 이 출구는 막혀 있다. 관람객은 1층이 아닌 지하 1층으로 내려와 기념관 관람 시작때 마주했던 안중근 좌상 뒤를 보며 입구 반대편 화장실이 있는 출구를 통해 나가 계단을 휘감아 명상의 길 중간을 짤라 나가야 한다(기술해 놓고 봐도 뭔가 좀 복잡하고 찌글하다). 그래서 앞서 나처럼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마치 허를 찔린 듯 마주하는 안중근의 좌상을 접한 관람객들의 마음을 흩트린 것을 미안해 하듯 빠르게 참배홀을 지나쳐 나와야 한다. 관람을 마치고 참배홀을 지나쳐와야 기념관을 나올 수 있는 사람들까지 더해져 빈 기념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안중근과의 마주침'이라는 목적은 더 흐려진다.
안중근의사 기념관의 전면(Facade)은 북쪽에 놓인 네개 mass의 북쪽 입면이다. 이 입면 오른쪽(북서쪽 Corner에 놓인 mass상부) 상부에는 '安重根'이라는 한자어 세 개가 세로로 적혀 있다. U-Glass가 글씨를 흐리게 보이게 해서 일까? 아니면 한자어를 한 눈에 인식하기 어려워서 일까? 아니면 일반인들이 보기에 육면체 Mass를 나열한 기념관의 형태가 '안중근'이라는 Contents 이전에 '기념관'이라는 목적을 떠오르게 하지 않기 때문일까? 어떤 이유든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기념관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래서 들어가볼까라는 생각을 들게 하지 않는다. 기념관이기에 기념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도 개방될 필요가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안중근 기념관은 기념관이기 이전에 공공공간이기에 공공이 쉽게 찾지 않는다면 그 건립목적은 채워질 수 없다. 그렇다고 기념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관광Bus 대절해서 올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실 안중근의사 기념관의 형태는 -Scale에 따른 건축물이냐 조형물이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른 기념 조형물에서 몇번 시도된 형태다. 건축가 본인도 자신의 개념을 설명할때 인용한 Image인 Peter Eisenman이 Berlin에 설계한 '유대인 기념비'도 그렇고 역시 Berlin에 Daniel Libeskind가 설계한 'The Jewish Museum'에 있는 'Garden of Exile'도 육면체 기둥이 등간격으로 놓여 뭔가를 기념하는 공간을 이루고 있다. 육면체는 기하학 Mass로 태고부터 뭔가를 상징했으며, 게다가 무덤 앞에 놓이는 비석 그리고 죽은자를 담는 관을 상징하기에 '기념'을 위한 형태로는 아주 적절하다. 이런 상징성을 떠나서도 육면체 Mass는 우리가 흔히 보는 건축물 형태의 근간이기에 별 의도없이 -기념하고자 하는 의도 없이- 이 일대를 찾은 일반시민들을 끌어들이기에는 흡입력이 떨어진다.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념관의 위치가 더 눈에 띄어야 한다. Mass로 인한 흡입력이 아닌 기념관이 놓인 대지로 들어오고 나가는 주 동선의 흐름과 기념관으로의 진출입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즉, 기념관으로 들어오는 동선의 흡입력이 있어야 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신축건물의 위치가 기존건물 남쪽으로 30m 가량 이동되면서 주 흐름에서 빗겨나 버렸다.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있는 분수광장은 남산 정상에서 북서방향으로 산세가 내려가는 흐름에 조성된 세개의 광장 최상부에 있다. 아동광장-백범광장-분수광장으로 이루어진 세개의 단은 일제시대 일본이 조선신사를 지으면서 남산자락을 훼손한 것이다. 뭐 전적으로 일본이 훼손했다고 볼 수도 없는게 이 중 일부는 1950년대 말까지 스키장으로 쓰기도 했었고(남산에 스키장이라니... 참...) 1959년엔 남산 국회의사당 건립을 위한 평탄화 작업 중 옹벽을 만들기도 했었다(남산 국회의사당 현상설계를 통해 혜성처럼 등장한 건축가는 김수근).
어찌됐든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있는 분수광장내 주된 동선의 흐름은 북서쪽 백범광장과 남동쪽 남산 정상으로 오르는 북서-남동 방향이다(위 위성사진에서 빨간선). 분수를 초점으로 보이는 십자축이 이 방향에 정확히 맞춰져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1970년 이광노가 설계한 舊 남산어린이회관(18층, 연면적 12,238㎡)이 있다. 첫번째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舊 남산어린이회관 남쪽 55m 정도에 있었다. 비록 그 사이가 노상주차장이기는 해도 舊 남산어린이회관(N)-안중근의사 기념관(S)-중부푸른도시사업소와 분수대(E)가 둘러싸고 있는 영역(위 위성사진에서 진한 빨간색 영역, 55m x 90m)은 하나의 공간으로 한 번에 인식될 수 있었다. 게다가 북서쪽 백범광장 쪽으로 연결되는 계단이 舊 남산어린이회관 남쪽과 안중근의사 기념관 북쪽(진한 빨간색 영역의 남북변)을 지나는 길의 연장선 상에 있었기 때문에 영역의 경계는 더 명확했다. 그런데 기념관이 남쪽으로 30m가량 밀리면서 세 건물이 둘러싸는 영역이 넓어졌다(85m x 90m). 그럼으로서 넓어진 영역이 갖는 공간의 위요감이 흩어졌다(위 위성사진에서 옅은 빨간색 영역 추가). 더군다가 영역이 넓어지면서 동쪽에 있던 중부푸른도시사업소 건물(이 또한 Concrete 한옥 Style)이 영역 동쪽 가운데 놓여짐으로서 중심성도 사라져 버렸다.
사실 기념관의 주 접근로를 ㄷ자로 꺾어 Sunken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기념관이 기존 자리에 있었다고 해서 전면공간의 분주함과는 어느 정도 분리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건축적 처리 이전에 대지 자체가 남쪽으로 밀어져 정해짐으로써 기념관은 남산을 향한 북서-남동쪽으로 오르는 흐름에서 빗겨나게 됐다. 게다가 기념관 자체 Mass 형태도 앞서 서술했듯이 남산의 녹음에 묻힌 조용한 형태이기에 남산을 오르는 시민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게 됐다. 그리고 기념관 주변 분수광장 일대는 서울시립남산도서관을 포함하여 마치 문화적 Complex를 형성하고 있는 듯 하다. 그렇다고 완공된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옮길 수는 없다. 이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분수광장-백범광장-아동광장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 넣는 것이다.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두고 지금까지 전개한 얘기와는 조금 다른 얘기로 이 공간에 대한 내 생각을 마무리 해야겠다.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만들어진지 얼마 안되는 건축사무소가 첫번째로 수행한 현상설계에서 당선된 안으로서 '2010년 서울시 건축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DLIM이라는 건축사무소는 첫타석에 Grand Slam 정도는 아니어도 Three-run Homerun급을 날린 셈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보다는 기념관 개관식날 설계를 맡은 건축가의 자리가 없었다는 사실이 더 화제가 됐다. 누군가 Homerun을 쳤는데 Home plate에서 Ceremony 받는 선수는 없는 상황이다. 더 웃긴건 이런 Issue가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8년전 한일월드컵을 위한 경기장 중 우리나라에 지어진 경기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상암월드컵 경기장(설계 : 류춘수&이공건축) 개관때도 같은 일이 있었다.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변한게 없는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건축을 포함해서 공간의 가치를 무시하는 공공행정을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걸 비난하는 행위는 이미 8년전 상암월드컵 경기장때도 했었고 찾아보면 그 전에도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8년이란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인 건축가의 자리를 나아지게 할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한 건축가 집단이다. 아! 건축가 집단이라고 하면 '건축가협회'만 해당되고 그러면 '건축사협회'와 '새건축사협회'는 해당 안 된다고 주장할 수 있으니 '건축집단'이라고 해야 하나? 어찌됐든 건축이라는 영역을 두고 존재하는 전문가 집단은 셋이나 된다(아... 한국여성건축가협회도 있으니까 넷인가?). 셋이 됐든 넷이 됐든 8년동안 이들은 뭐했을까? 난 학교에서 어떤 분야가 됐든 전문가 집단이라 할 수 있는 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들어 집단적으로 의견을 표출하고 행동도 하며 정치적 Gesture도 취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배웠다. 그게 전문가 집단과 비전문가 집단의 차이점이기도 하다고... 그 행동이 극단에 달으면 노동쟁의(Strike)가 될 것이다.
그런데 건축분야의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회비 꼬박꼬박 내다 받치는 집단이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 주지 못하는데도 그냥 조용하다. 그 사이에 세 집단의 틈바구니에서 몇몇은 이익을 보기도 한다. 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자신들은 노동자(Worker)가 아니라 Designer라고. 그러니까 자신들은 공산품을 생산하는 일(Work)이 아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대단한(?) Creator라고. 그러므로 우린 노동쟁의도 노동조합도 필요 없다라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생각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라. 뭐 이런 일이 생길때마다 집단의 목소리는 고상하게 Symposium열고 토론회 하면서 과자에 생수 들이키면서 분개하면 되지 뭐... 지금처럼... 우린 Creative한 건축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