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로 자라나기
어떻게 해야 건축스케치를 잘 할 수 있을까요?
어떤 건축물들을 답사하면 좋을까요?
어떤 책을 읽으면 건축가가 되기 위해 도움이 될까요?
포털사이트에 파워블로거로 활동했었기에 건축학도들에게 이러한 질문메일을 자주 받는다. 조언을 해줄만한 소양이 충분하지는 않지만 가급적 적절한 답변을 해주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느껴서 언젠가부터 몇 가지 이야기를 덧붙인다. 건축스케치를 잘 하고자 하는 이유가 건축가의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려는 것이 아닌 이미지 몇 개를 포트폴리오에 삽입하려는 의도를 가지기도 하고, 건축답사나 책읽기가 공간감을 키우고 철학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닌 필수 교과를 빠뜨리지 않으려는 의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약간 조급해하며 눈앞의 문제만 해결하기보다는, 자신의 먼 미래 모습과 큰 그림을 먼저 그려보라고 말이다. 아래와 같은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자.
건축인으로서 어떤 모습으로 사회에 발을 들여놓을 것인가.
어떻게 성장하고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 것인가.
생의 마지막에 어떠한 것을 성취했을 것인가.
무엇이 나를 만들었나
학부시절 작업실 선배는 매일 한 장씩의 스케치를 요구했다. 단순히 스케치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트레이닝이라 생각했던 나는 열심히 잡지와 작품집에서 눈에 띄는 공간을 스케치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 공간을 왜 그리기로 마음먹게 되었는지, 이 공간의 어떠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는지, 이 공간이 왜 아름다운지’를 설명하는 것이 핵심이었고 스케치는 도구일 뿐이었다. 그제야 이미지 속 공간이 내 머리 속에서 진짜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어떤 건축적인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보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손으로 공간을 보는 습관이 공간의 부분과 전체를 살필 수 있게 해줬고, 수 십 권의 스케치북이라는 결과물도 남겼다.
또 다른 선배는 틈만 나면 건축답사를 함께 떠나자고 제안했다. 소쇄원에 가서 낮잠을 즐기기도 했고, 깜깜한 밤에 갑자기 선암사로 향해서 새벽예불을 지켜보기도 했다. 전통건축은 단순히 책속에 등장하는 분석으로는 설명되어지지 않았다. 그 안에 사람이 있고, 자연이 있고, 시간이 있었다. 모든 사람이 제 나름의 모습을 가지고 있듯이, 똑같은 나무와 흙으로 지었지만 천개가 넘는 문화재 한옥들은 각각의 다양성을 가지고 저마다의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잘 알려진, 유명한 한옥이 아니지만 굉장히 독특한 공간을 품고 있는 곳을 찾을 때면, 보물을 찾은 듯 전율을 느꼈다. 그렇게 시작한 한옥 답사가 십여 년간 이어져 많은 문화재 한옥들을 살펴봤다.
어쩌면 건축가에게 스케치는 머릿속의 공간을 보여주는 하나의 언어일 것이다. 또 훌륭한 공간을 경험하는 것은 꼭 필요한 배움이자 자극일 것이다. 그렇게 좋아하는 스케치와 건축답사를 꾸준히 이어오고 매체를 통해 꺼내놓다 보니, 사람들이 스케치하고 한옥 답사하는 것을 나의 특징으로 생각해줬다. 건축 스케치를 부탁하거나, 학술 논문에 한옥사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요청도 받게 된다. 한옥 설계 전문가들이 자신의 작업에 대해 비례와 공간구성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건축가로서의 윤리의식
온라인 매체가 없었으면 건축스케치나 건축답사기를 통해 여러 사람들과 소통할 기회를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매체를 통해 자신의 꾸준함을 보여주는 것도 건축가들에게 필요한 사항이 되었다. 쉽게 내용을 보여주고 대중과 소통하는 것은 클라이언트를 만날 기회를 만들어주는 등 다양한 관계맺음이 가능하게 한다. 여러 온라인 매체를 통해 많은 건축가들이 소통의 기회를 만들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간혹 이를 악용해 해외의 건축물 자료를 스크랩해 제목에 건축가에 대한 명확한 표기 없이 포스팅하여 마치 자기 작품인양 오해하도록 하며 자신을 알리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자기가 작품 도둑질하고 있는 것을 알고도 그러는 것일까.
유명 소설가의 작품도 표절시비가 붉어지고, 걸그룹의 노래들도 발표되기 무섭게 유사한 음원과 비교해 표절여부를 가늠해볼 수 있게 된다. 건축은 대지의 조건과 경제적 합리성 등에 의해 필연적으로 기존건축물들과 구성요소나 형태적 유사성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의식적인 베끼기는 건축가로서 자존심과 윤리를 스스로 저버리는 것이다.
때때로 건축주들은 법규를 위반해서라도 더 많은 수익을 남기도록 설계해달라고 요청한다. 불법으로 세대를 나누기도 하고, 필로티나 테라스에 벽을 세워 실내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법과 제도를 벗어나 건축물을 사용하려는 건축주의 요구를 묵인하기 어려운 경우가 생길 수도 있지만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최근 불법건축물들을 돈을 받고 준공시켜준 수많은 사용승인검사(특검)건축사들이 대거 적발되기도 했는데, 건축가들이 투철한 윤리의식을 가지고 이러한 일들이 없도록 해야 하며 준공 이후 꾸준히 건축물이 유지관리 되도록 하는 것도 건축가의 업무가 되어야 한다.
최근 젊은건축가상 수상자가 건축사 자격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지가 이슈가 되고 있는데,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건축가들이 건축사 자격제도에 대한 열띤 논의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최초에 논의가 시작된 것은 건축사 자격여부에도 있겠지만, 심사를 위해 제출된 작품들이 완성된 시점보다 회사에 늦게 합류한 인원이 상을 공동으로 수상한 점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같은 건축인으로서 누구하나 마음 상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논의가 시작되었으니 더욱 열띤 토론과 의견제기가 있길 바란다. 이를 통해 대중이 정규교육을 받고 자기 철학이 확고한 건축가와, 건축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집장사를 구분할 수 있도록 만드는 좋은 계기가 되어야 한다.
나만의 색을 찾아보자
2013년 젊은 건축가상을 수상한 ‘제이와이아키텍츠(JYA-RCHITECTS, 조장희, 원유민, 안현희 http://jyarchitects.com)‘는 해비타트 주관 소셜 하우징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SBS 사회공헌팀을 통해 강진 산내들 아동센터 건립을 진행했으며, 이로 인해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서 주관하는 저소득층 주거개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저소득층 주거개선 프로젝트는 일명 뽁뽁이라고 불리는 포장용 완충재를 사용해 채광과 단열성능을 확보하여 크게 주목을 받았다. 이들이 주목받게 된 것은 사회공헌 프로젝트 수행과정에서 적은 예산에도 불구하고 모금활동을 진행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더해 완성도 높은 결과물들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켜켜이 쌓여진 노력과 경험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적은 예산으로 이러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내용을 부각시킨 매체 기사들에 다른 건축가들이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많은 건축주들이 특정한 조건에서만 성립될 수 있는 예산대비 결과물을,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하여 면적과 공사비로만 판단의 근거를 삼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다른 건축가들이라면 진행하기를 고민했을만한 지역의 작은 대지위에, 꾸준히 사람을 생각하는 공간들을 만들어내는 모습에 감탄하게 된다.
어느날 후배건축가 한양규 소장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직장 동료들과 개업하기로 했는데 이름을 ‘푸하하하‘로 하기로 했어요. (푸하하하 프렌즈, 윤한진 한승재 한양규, http://fhhhfriends.com ) 독특한 성격인줄 알고 있었지만 이름부터 너무 파격이었다. 그렇게 독특함을 무기로 시작한 그들은 개성과 넘치는 아이디어로 해괴한 물건을 만들어 판다거나, 사무실 옥상에서 장난감 총싸움을 하는 동영상을 온라인에서 보여주는 등 계속 자신들만의 개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던 중 차곡차곡 완성되어간 김해의 흙담이라는 건축물은 그들의 열정과 개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다양한 형태로 쌓을 수 있는 콘크리트 블록을 직접 수천 개 만들기도 했고, 무근 콘크리트 타설 직후 찍힌 고양이의 발자국을 고스란히 도면에 옮겨서 마치 계획단계에서 의도된 것이었다는 양 역발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젊은 건축가의 고민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건물은 시 건축상 대상을 수상했다. 이렇게 기존의 관심사와 개성을 살려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어가는 모습도 많은 귀감이 된다.
꾸준함으로 넘나들다
10여년전 조성룡 건축가의 환갑을 기념하여 20여명의 건축가들이 ‘건축 사이로 넘나들다’라는 책을 엮어낸 적이 있었다. 각각의 주제는 자신이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와 건축 사이를 넘나드는 이야기이다. 영화, 자동차, 음악, 가구, 텍스트... 클래식 방송의 DJ를 했던 건축가도 있었고, 직접 단편영화를 만들고, 가구를 생산하는 건축가도 있었다. 건축가들이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전문가가 될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수많은 각자의 관심사와 건축 사이를 넘나들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 건축이란 수많은 사람과 이야기,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담아내는 것이니 건축가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관심사를 고민하고 깊이를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이다.
최근 발행된 한권의 책이 앞서 소개한 책을 떠올리게 했다. ‘건축, 경계를 넘나들다’는 건축가 세실 발몽(Cecil Balmond)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는 동시에, 예술, 디자인, 엔지니어링, 물리 생물 그리고 수학은 넘나들며 통합하는 것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어쩌면 책을 쓰는 것을 통해 책이라는 매체가 가지는 특징을 연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실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듯한 표지는 다양한 생각들이 얽히고 넘나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건축가로서 자신만의 색이 짙어지면, 건축이라는 거대한 울타리에 다양한 분야를 끼워넣어 넘나들 수 있게 되고 건축의 어느 한 부분에 대해 전문가라고 불릴 수 있다.
열정과 절박함
지금 우리는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고 있었다.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만들고, 꾸준함으로 그것을 이어나갈 것을 이야기 했다. 그렇게 학생으로서의 시간과 실무경험을 쌓으며 그 다음에 어떠한 모습이 될지 생각해본다. 독립된 건축가로서 자신의 사무실을 갖게 될 것인지, 회사에 소속된 건축가로서 자리 잡을 것인지, 아니면 다른 형태로 일하고 있을 것인지 말이다. 하지만 이때 절박할 정도의 열정, 내가 건축을 왜 하고 있는지, 한 프로젝트마다 쏟을 수 있는 열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건축가들이 프로젝트를 대할 때 돈으로만 계산하지는 않는다.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낼 때의 희열 때문에 건축을 계속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건축가는 처음 개업했을 때의 절박함을 되새기기 위해 한 달에 하루씩 날짜를 정해서 일이 없어도 회사에서 잠을 잔다고 하고, 어떤 건축가는 바쁜 일이 없더라도 주말에 회사에 들러 초심을 되새긴다고 한다.
유럽의 젊은 건축가들은 국내 건축가들이 한해에도 여러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일단 일이 그렇게 많지 않을뿐더러, 계약된 하나하나의 프로젝트에 최선을 다해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내 건축가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니며 다소 제도적인 차이도 있겠지만, 짧은 경력을 가진 나 스스로도 열정이 줄어든다고 느낄 때가 있어서 꾸준히 처음의 열정과 절박함을 되새기려 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고집
여러 건축가들이 설계한 작품을 건축주에게 인도하는 것을 ‘딸을 시집보내는 것’에 비유하곤 한다. 서글픈 우스갯소리이지만, 딸은 잠들어있는 것만 봤고(매일 야근), 건축은 적어도 수개월 혹은 수년간 이곳저곳을 도면으로 그리고, 처음부터 끝가지 만들어지는 것을 봐왔을 테니 사랑스럽게 오랜 시간동안 키운 딸에 비유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을 것이다.
미래를 그려보는 것에서 자신만의 색깔, 꾸준함, 열정이 꼭 필요한 조건이라면,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건축가로서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다. 간혹 예산이 적거나, 건축주의 의지에 따라야 하는 경우 등 건축가의 의도와 다르게 결정되는 사항이 있을 수도 있지만, 어떻게 계획하는 것이 더 아름다울지에 대해서는 건축가가 명확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벽을 만들고 창을 뚫어도 어떻게 선을 그려야 보다 아름다운 결과물이 될 것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다양한 설계공모를 통해 건축가들끼리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어쩌면 건축가는 스스로와 싸우는 것일지 모른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공부하고 아름다움에 대해 질문해야 하며 결정하고 책임져야 한다. 건축을 하기로 생각한 순간부터 시작된 미래를 그려보는 것은, 어쩌면 건축을 하고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 되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