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에 대한 책을 접하기 시작했을때 처음으로 알게 된 건축가가 Le Corbusier, Frank Lloyd Wright 그리고 Mies van der Rohe였다. 근대건축 삼대장으로 불리는 이 세 사람은 근대건축을 각각 다른 시선으로 봤고 다른 설계언어로 자신만의 작업을 만들어냈다. 각 건축가가 활동한 국가도 프랑스(Le Corbusier의 원래 출생지는 스위스다), 독일, 미국으로 누가 삼대장을 뽑았는지 알 수 없지만 참 적절하게 안분됐다. 이 세 건축가 중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건축가가 Mies van der Rohe다. 올(2016년) 8월 17일은 그가 세상을 뜬지 47주기가 되는 해다(1886년 3월 27일 생). 독일 문명의 최고 중심지인 아헨(Achen)에서 성장한 Mies는 1908년~1911년 동안 Peter Behrens에게서 건축을 사사받았다. 그의 초기 작업 중에서 그 스스로 '빛나는 순간(Brilliant moment)'이었다고 생각하는 건축물이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이다(-Words from Mies van der Rohe: European Works, Frank Russell, ed-).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은 건축물이라기 보다는 기념비적인 오브제(Objet)에 가깝다. 이 건물은 몬쥬익(Montjuic) 공원내 카탈루냐 국립미술관 서쪽, 스페인 마을(Poble Espanyol) 맞은편에 전혀 다른 느낌과 공간을 품고 있다. 1929년 건립당시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은 바르셀로나 국제박람회에서 스페인 국왕부부의 접대를 위한 공간이라는 용도 외 별다른 기능은 없었다. 그리고 건립 당시 계획대로 박람회가 끝난뒤 철거됐다. 그러나 1983년 당시 바르셀로나 시의회 도시계획부 부장이었던 Oriol Bohigas는 복원 후 재개장을 결정했고 Ignasi de Sola-Morales, Cristian Cirici, Fernando Ramos에게 작업을 맡겼다. 건축사에서 파빌리온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중요성과 모더니즘 건축의 아이콘으로서의 상징성이 57년만에 건물을 부활시켰다. 현재는 미스 반데 로에 재단이 사용하고 있다.
파빌리온은 8개의 철제기둥, 평지붕, 유리 커튼월, 칸막이 벽으로 구성돼 있다. 파빌리온에는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고려된 기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다른 어떤 기능을 담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봐도 개방성과 비영역성으로 인해 상당히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파빌리온이 모더니즘 건축의 아이콘으로 부활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자체가 보여주는 오브제로서의 건축, 지금가지 건물이 보여주지 못한 간결함 그리고 그것을 통한 막힘없는 움직임, 더 나아가 공간이 담을 수 있는 다양한 기능의 가능성이라는 상징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상징을 건물을 둘러보면서 이해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파빌리온에서 유일하게 구획된 공간은 북쪽에 있다. 그리고 그 공간의 작은 연못 가운데에 'Morning'이라는 작품제목의 Georg Kolbe의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은 연못과 벽체에 반사되어 파빌리온 내에서 여러개로 보인다. 또한, 이 동상은 공간을 구획하고 있는 대리석 벽체의 레이어(Layer) 사이사이를 이동하는 관찰자에게 여러번 노출되는 위치에 있다.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은 Mies가 줄기차게 주장했던 최소부재 만큼이나 적은 종류인 유리, 트래버틴(Travertine) 그리고 몇 가지의 대리석을 이용해서 지어졌다. 이 중 Mies는 그때까지 건축재료로는 사용되지 않았던 마노(瑪瑙; Onyx)라는 재료를 통해 다른 부재에 의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지지되는 벽체를 만들었다. 아래 Mies가 마노라는 재료를 사용하게 된 에피소드를 직접 소개하고 있다.
"Right from the beginning I had a clear idea of what to do with that pavilion. But nothing was fixed yet, it was still a bit hazy. But then when I visited the showrooms of a marble firm at Hamburg, I said: "Tell me, haven't you got something else, something really beautiful?" I thought of that freestanding wall I had, and so they said: "Well, we have a big block of onyx. But that block is sold—to the North German Lloyd." They want to make big vases from it for the dining room in a new steamer. So I said: 'Listen, let me see it,' and they at once shouted: 'No, no, no, that can't be done, for Heaven's sake you mustn't touch that marvellous piece." But I said: "Just give me a hammer, will you, and I'll show you how we used to do that at home." So reluctantly they brought a hammer, and they were curious whether I would want to chip away a corner. But no, I hit the block hard just once right in the middle, and off came a thin slab the size of my hand. 'Now go and polish it at once so that I can see it." And so we decided to use onyx. We fixed the quantities and brought the stone."
-Words from Mies van der Rohe, David Spaeth-
Mies하면 떠오르는 문구가 있다. 바로 'Less is more!'다. 이 문구는 현재 모더니즘의 선언문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Less is More'는 건축을 구성하는 부재를 통해, 혹은 기능을 담는데 제약이 되는 요소를 없애면서 실현된다. 바르셀로나 파빌리온 또한 그것을 구성하는 부재를 최소화(Less)시킴으로서 더 많은(More) 기능을, 더 많은(More) 의미를 담으려는, 그것도 안되면 최소한 그런 최소(Less)의 부재가 건축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아이콘이다. Mies는 그것을 바랬다. 하지만 결국 눈에 보이는 요소가 숨겨졌을뿐 건물을 만들어내는데 필요한 요소들은 어딘가에는 존재하고 또 파빌리온이 담아낼 수 있는 기능 역시 여러가지가 가능할 수는 있지만 만족스럽게 담아내지는 못한다는 한계도 동시에 갖는다. 예로 독립적으로 지지되는 벽체를 들 수 있다. 이 벽체는 칸막이 벽이기도 하고 평지붕을 지지해야 하는 구조체이기 하다. 그래서 8개의 철제기둥 외에 벽체에 숨겨진 작은 기둥들로 보강작업을 해야 했다. 물론 겉으로 볼 때는 독립적으로 지지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래서 Frank Russell은 'In reality, the Barcelona Pavilion was a patch-up structure'라고 설명했다(-Mies van der Rohe: European Works, Frank Russell, ed-).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은 건축물이라기 보다는 오브제다. 그 오브제가 그곳에 사용된 재료에 대한 홍보인지 아니면 더 높은 정신적 차원의 모더니즘 이상인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의 시선으로 봤을때 모든 절충적인 장식과 표현이 배제됐음에도 의도한 바를 드러낼 수 있다는 Mies만의 또 다른 표현방식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Robert Venturi의 지적대로 Mies가 'Less'가 되기 위해 제거하고 제거한 것들이 전체적으로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상징만큼은 'Less' 시키지 못한 것 같다. 결국 Mies가 제거하지 못한 -어쩌면 그것만큼은 건축이라는 영역에서는 제거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More'가 되기 위한 가능성을 제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던 아키텍처(Modern architecture)가 절충주의를 버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상징성도 함께 사라졌다. 대신 건축적 요소 그 자체의 표현 즉 구조와 기능의 표현에 관심을 집중하는 표현주의를 촉진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건물의 이미지를 통하여 실제로는 좀처럼 실현 불가능한 개혁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사회적, 공업적 목표를 암시하였던 것이다. 스페이스, 구조, 그리고 평면이라는 순수 건축적 요소에 대한 짜증스런 분절화에 자신을 속박함으로써 Modern architecture의 표현주의는 건조한 표현주의로 전락하고 공허하며, 지루하게 되어 결국에는 무책임하게 되어 버렸다. 역설적으로 오늘날의 근대건축은 명확한 상징성 및 경박한 아플리케(Applique) 장식을 거부한 반면 건물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장식으로 만들어 버렸다. 장식대신 분절화를 채택함으로써 덕(Duck)이 되어버린 것이다. ...(중략)... Modern architects는 뒷면에 있던 것을 전면으로 갖다 놓고, 자기들의 건축을 위한 어휘를 강조하기 위하여 쉐드(Shed)의 구성을 상징화하기 시작하였다."
-Learning from Las Vegas, Robert Venturi-
Mies의 작업 중 Robert Venturi가 얘기한 상징화한 쉐드의 구성이 정점에 달한 작업이 시그램 빌딩(Seagram Building)이다. 시그램 빌딩은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이 완공 후 30년이 지난 1958년에 준공됐다. Mies의 나이도 43세에서 72세가 됐다. 1937년 Mies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독일을 떠나 미국에 정착했다. 당시 Mies의 도미와 미국 정착을 전적으로 도운 사람이 Philip Johnson이다. Mies는 1921년 Friedrichstrasse Skyscraper 계획안(아래사진)을 작성했다. 이 계획안은 초기 그가 주장한 개념 중 유리 커튼월로 감싸인 구조적으로 가벼운 초고층 건물의 이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Mies는 이 개념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계획안이 발표되고 37년이 지난 1958년 Mies는 비로소 고층건물을 설계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 기회를 Mies에게 준 인물도 Philip Johnson이었다.
1953년 캐나다 주류회사인 Seagram Liquor Company는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뉴욕에 사옥을 짓기로 결정했다. 대지는 맨하튼 E 53rd st과 E 52nd st사이, Park ave 동쪽이었다. 초기 설계는 Charles Luckman이 맡았다. 하지만 회사 소유주의 딸이었던 Phyllis Lambert는 평범한 Luckman의 설계가 맘에 들지 않았고 그 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Philip Johnson의 추천을 받아 1954년 Mies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시그램 빌딩이 고층건물 역사에서 중요한 아이콘으로 남게 된 배경에는 이 건물이 인터내셔널 양식(International Style)으로 설계됐다는 사실보다는 당시 시대를 풍미했던 산업화, 그로서 등장한 산업재료를 미적 관점으로 풀어냈다는데 있다. 실제 인터내셔널 양식으로 설계된 최초의 건물은 시그램 빌딩이 아닌 이보다 6년 먼저 완공된 레버 하우스(Lever House)다. 당시 SOM을 이끌었던 Gordon Bunshaft가 설계한 레버 하우스는 시그램 빌딩 북서쪽 블럭에 인접해 있다. 그런데 레버 하우스는 산업화 재료를 사용해서 지어졌다는 의미만 있을 뿐 거기서 어떤 미적가치를 끄집어 내지는 못했다. 반면, 시그램 빌딩은 뉴욕 뿐만 아니라 미국 그리고 거의 전세계에 뒤이어 등장하는 마천루 디자인의 모델이 됐다. 로우(Lower) 맨하튼의 HSBC Bank Building(SOM설계, 1967, 아래 좌측사진)과 One Liberty Plaza(SOM설계, 1973)를 비롯하여 시카고, 샌프란시스코까지 1960년대와 1970년대 건설된 왠만한 고층건물 디자인 원형은 시그램 빌딩에 있다. 심지어 16년간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지위를 유지했던 김중업 설계의 삼일빌딩(1969, 31층, 110m, 아래 우측사진)의 모델이기도 하다. 시그램 빌딩의 영향력은 197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고 확실한 대항마(?)를 찾은건 1980년 Michael Graves가 설계한 포틀랜드 빌딩이었다.
시그램 빌딩은 연면적 46,000㎡로 남북43m x 동서26m 크기를 바탕으로 평면은 8.5m 그리드를 규준선으로 설계되었다. 하지만 이런 보이지 않는 수치보다 이 건물을 논쟁의 중심으로 더 몰아넣은 요소는 건물 입면에 붙은 I자 빔이었다(아래사진). Mies는 최초 시그램 빌딩을 건물의 구조체인 철골이 그대로 드러나는 건축물로 설계하고 싶었다. 철골로 골격을 잡고 그 외피를 유리로 감싼 고층건물이야 말로 그가 생각한 그 시대를 대표하는 표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의 건축법규상 모든 구조적 부재로서 철골은 불연성 재료로 덮혀 있어야 했고 이 때문에 Mies는 건물을 실제로 지지하는 철골구조를 콘크리트로 감싸고 그 외부에 I자 빔을 붙여 그의 의지를 대신 표현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는 분명 Mies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자 모더니즘 슬로건 중 하나인 'Less is More'와 상반되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I자 빔을 건물 입면에서 제거한다고 해서 건물을 구성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I자 빔은 산업시대를 대표하는 장식의 다른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래서 Robert Venturi는 앞서 '상징화하기 시작한 쉐드의 구성'이라 설명했다.
"Mies에게 건축의 표상은 재료와 기술의 효용성과 경제성, 장소의 영향 등 시공의 필연적 사실들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기술과 건축(Architecture and Technology)'에서 그는 '기술이 진정한 완성의 경지에 다다를 때 건축으로 승화한다'고 하면서 '건축은 분명히 사실에 의존하지만, 건축 고유의 작용 영역은 표현의 영역이다'라고 말했다. '실제성'과 함께 '표상성'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의미는 좀더 분명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Mies에게 건축은 당대의 시공 기술과 재료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의 시대에 기술이 산업화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표상' 역시 산업화되었을 것이며, 이는 산업화된 형태를 선호해서가 아니라 시대 자체가 산업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표면으로 읽는 건축, David Leatherbarrow & Mohsen Mostafavi-
Mies는 그의 신념을 현실화 시키기 위해 건물 입면에 붙은 I자 빔보다 더 큰 제약조건을 이겨내야만 했다. Mies가 시그램 빌딩을 설계하기 시작했을 무렵 맨하튼의 고층건물 대부분은 가로에 최대한 붙어서 한 줄로 나란히 늘어서 있었고 최대한의 이익을 얻기 위한 최대용적 확보를 위해 웨딩 케잌(Wedding Cake)형태로 지어졌다. 이는 조닝1916(Zoning1916)에 의해 '건물 높이가 높아질수록 가로에 햇빛을 드리우기 위해 후퇴해야 한다'는 규정에 의한 결과였다. 이런 제약조건으로 인해 나온 웨딩 케잌 같은 매스의 형태는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Mies에게는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서 Mies는 건물을 Park ave에서 27m 후퇴(Set-Back) 시켰다. 즉, 그는 Park ave에 면한 웨딩 케잌을 단칼에 잘라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Mies는 남쪽과 북쪽에 잔잔한 수변공간을 둔 빈 접시 같은 광장을 만들었다.
다분히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을 연상시키는 이 광장은 건물 입면에 I자 빔까지 붙여가면서 Mies가 강조하고자 했던 직선으로 힘있게 솟아오르는 마천루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한 빈 공간이었다. Mies의 개인적 취향과 의도를 위해 건물 설계를 의뢰했던 Joseph Seagram과 그의 아들은 지금도 비싸지만 당시에도 세계 최고의 지가를 자랑했던 맨하튼 내에서 건물이 들어설 대지의 절반 정도를 비워야 했고 동시에 그들이 필요로 했던 연면적을 확보하기 위해 대지 뒤쪽의 땅을 추가로 사들여야 했다(아래사진). 결국 시그램 빌딩의 공사비용으로 $36,000,000가 투입됐고 이로서 완공과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비싼 건축물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참고로 당시 비슷한 규모의 건축물을 짓는 비용보다 두배 정도가 더 들었다고 한다.
바르셀로나 파빌리온과 시그램 빌딩에서 Mies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위해 다른 것을 배제시켰다. 그렇게 'Less is more'는 정당화 됐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Mies는 어떤 문제를 풀 것인가에만 초점을 맞췄다. 그 결과 문제의 해결방법을 결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고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건축은 Mies가 주장하는 바를 함축한 오브제로서의 가치는 인정받지만 건축물로서는 많은 한계를 드러낸다. 그런데 오브제로서의 가치와 건축물로서의 한계 외에 그의 작업들을 평가할 요소들이 더 많다. 그 중 하나가 시그램 빌딩의 광장이 그동안 맨하튼 고층건물 형태를 만들어낸 조닝1916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Mies 자신도 그 공허한 공간에 사람들이 몰려든다는 말에 놀랐을 정도로 시그램 빌딩 전면 광장은 완공과 동시에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앉을 자리 조차 없을 만큼 변변한 가로 시설물(Street Furniture)도 없던 광장에 사람들은 Park ave에서 광장으로 이르는 몇 개의 계단, 보도에서 약간 올라온 가장자리 턱 등에 앉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을 보고 William H.Whyte라는 교수는 타임 랩스 카메라(Time-Lapse Camera)를 통해 광장에서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한 뒤 '가장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모으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라는 당연한(?) 결론을 도출하기도 했다. 그의 결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시그램 빌딩 광장처럼 세 면에 둘러싸이고 한쪽이 터진 장소에서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어찌됐든 이런 우연한(?) 성공을 본 뉴욕시 당국은 '개인이 소유한 공공공간(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개념을 '공개공지'라 부른다)'이라는 개념이 들어간 새로운 개발제한법, '1961 Zoning Resolution'을 만든다.
1961 Zoning Resolution에서는 시그램 빌딩 광장처럼 개인 소유 대지를 공공의 공간으로 내어줄 경우 그 보상으로 법률로 정해진 높이보다 높게 짓거나 용적율 보너스를 주는 등의 인센티브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건 이런 규제조차 없을 때 만들어진 시그램 빌딩 광장을 제외하고는 이런 규제에 의해 만들어진 대부분 공개공지들은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이 규제가 만들어낸 공허한 오픈 스페이스와 그 가운데 놓여진 건축물을 일컫는 'Building in Park'라는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시그램 빌딩이 사례로 오르내린다는 점이다. Mies 입장에서는 억울한 노릇이다. 그런데 이 또한 Mies의 작업이 갖는 'Mies가 주장하는 바를 함축한 오브제로서의 가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맨하튼 어디에 별로 유명하지 않은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을 사례로 들기 보다는 시그램 빌딩을 언급하는게 더 쉽게 설명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