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중독
Addicted to Architecture
진로를 결정할 시기의 학생들로부터 종종 메일을 받는다. 내용 중 항상 포함된 것은 ‘건축은 경기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아서 전망이 좋지 못하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라는 것이다. 어느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든지 경쟁도 없고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경우는 없을 것인데, 다른 직업군과 비교해서 표면적인 단점이 많다고 느껴진다는 뜻으로 느껴진다. 이런 질문에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언급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 좋으나, 적극적으로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는 건축가에 대한 큰 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응원의 말을 덧붙이곤 한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전망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는 건축을 우리는 왜 하고 있는 것일까에 대해 묻게 된다.
나의 결론은 우리가 건축에 중독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야근과 주말근무를 할 때마다 건축을 떠나 다른 일을 할까 고민하면서도, 자신이 만들어낸 도면으로부터 골조가 세워지고 마감이 붙고 완성되어 실제로 사용되는 모습을 볼 때의 감동 때문에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화가가 하나의 캔버스를 그림으로 채워낸 후 느끼는 만족감이 2D라면, 건축가가 완성된 건축물에서 느끼는 만족감은 3D를 넘어서는 그동안의 시간과 노력을 보상해주는 순간이 되며, 몇 차례 반복되다보면 중독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꿈속에 등장할 듯 독특한 모습의 가우디의 건축은 주로 자연의 형상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한다. 필자 스케치>
사랑에 빠지면 꿈속에서도 그 대상을 그리워하듯이 건축에 중독된 이들에게는 세상 모든 것들이 건축과 관계된 것으로 느껴진다. 때로는 종이 위에서, 때로는 머릿속에서 수많은 건물들이 만들어진다. 손에 만져지는 모든 것을 건축의 재료로 적용해보고, 수많은 형태와 공간들이 가상의 공간에 만들어진다. 이런 상상의 건축은 공사비도 들지 않고 법규를 완벽하게 지켜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마음껏 창의력을 더한다. 얼마나 건축에 빠져있으면 건축가 가우디는 꿈에 본 형상을 구체화 했을까. 실제로 식사 중에 떠오른 영감을 냅킨 위에 표현하거나, 비행기 탑승 중에 떠오른 영감을 여권에 스케치 하는 등, 건축가의 중요한 영감을 담은 스케치가 그 순간 손에 잡히는 종이에 즉흥적으로 담겨지는 경우를 종종 보았을 것이다.
<건축가의 냅킨 스케치 – 좌측상단부터 Bjarke-ingels / Massimiliano_Fuksas / Robert_Van_Berkel / Wolf-Prix_Coop-Himmelblau>
건축적 깨달음
필자는 몇몇 악기로 오케스트라에 참여했다. 악기연주가 익숙해지다 보면 인상적인 순간을 지나게 되는데, 음표 하나하나를 인지하고 연주하기에 급급한 실력에서 계속 연습을 하다보면 많은 음표들로 가득한 악보가 커다란 흐름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음표들의 길이와 높낮이를 뇌에서 완벽하게 인지하기 이전에, 손가락과 몸동작이 악기를 연주하기 위해 먼저 움직이고 있는 순간이 자신도 모르게 찾아온다. 악기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순간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놀라운 순간이다.
이탈리아 건축가 지오 폰티 Gio Ponti 는 건축가는 신이 내린 천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숙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모차르트나 피카소처럼 어린 시절부터 훌륭한 곡을 작곡하고, 세기의 걸작을 그려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건축적인 깨달음의 순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의 깨달음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인지하고 ‘이를 표현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 주와 부가 어떻게 관계 맺고 표현될 때 아름다움이 표현되는지를 일찍 깨닫는 경우에는 학생시절부터 주목받는 작업을 진행하게 된다. 그만큼 건축에 흥미를 가지고 많은 작업을 할 수 있다. 두 번째의 깨달음은 실무과정에서 다양한 현실적인 요인과 사용자의 요구조건에 디자인을 더한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온다 하기보다, 여러 차례 설계를 경험하며 조금씩 쌓여가는 것이다. 세 번째 깨달음은 정말 아름다운 선과 형태를 빠르게 찾아내는 것으로 이 단계를 넘어선 건축가들을 대가 또는 거장이라고 칭하곤 한다.
깨달음이라는 표현이 불가에서의 성찰과 동일한 표현은 아니지만, 건축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유사한 단계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에게는 첫 번째의 것을 전해주기 위해 노력해야하며, 실무단계의 건축가들은 두 번째의 것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세 번째 단계를 넘어선 분들에게는 존경을 표하고 그 작업들을 귀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것들을 깨달을 수 있을까. 그 방법은 건축에 중독되었다고 할 만큼의 애정과 관심에 있을 것이다. 일상 그리고 여행과 답사에서 관찰력을 가지고 많은 것들을 보고 경험하며, 자신의 방식으로 경험을 켜켜이 쌓아가면 어느 순간 성장해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스케치이든 도면이든 사진, 모형, 텍스트이든 자신이 능숙한 방법이라면 어느 것이든 상관없을 것이다. 가끔 설계하는 것이 고난도의 IQ퍼즐처럼 느껴진다. 정답은 없지만 다양한 요구조건들을 충족시키면서 공간적인 의미를 가지는 대안을 만들어내는 것에 커다란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아! 설계하고 싶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새로운 대지와 만나고 새로운 요구조건들을 분석해보는 것이 기다려져야 한다.
<봉정사 영산암, 정림사지 5층 석탑, 한두 번 답사할 때까지 왜 선배 건축가들이 이곳을 답사지로 추천하는지 절감하지 못했다. 수차례 답사해보니, 공간이 흐르고 자연과 관계 맺고 있는 모습, 전체와 부분의 아름다운 비례가 느껴졌다. 필자 스케치>
칼의 흔적으로 칼솜씨를 알아본다
일본의 역사 소설가 ‘요시가와 에이지’의 당대 검객의 이야기를 담은 ‘미야모토 무사시’에는 다른 검객이 꽃나무 가지를 칼로 베어낸 자리를 보고 그의 칼솜씨를 알아보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건축에서는 건축가의 대단한 작품 전체를 보기 이전에 도면 한 장, 선 하나에서도 그의 내공이나 역량을 알아볼 수 있는 경우에 비할 수 있겠다.
건축가는 팔방미인이어야 한다. 이것이 다른 직업에 비해 건축가가 되는 것이 어렵게 만든다. 몇몇 큰 규모의 사무실이나, 업무를 분담하는 경우를 제외한 대부분 건축가의 사무실에서 건축가는 설계 뿐 아니라 경영과 수주, 건축주 대응, 대관업무 등 모든 일들을 관여해야 한다. 또한 다른 직업은 일에 익숙해지면 유사한 업무를 반복하면 되지만, 건축의 경우 항상 새로운 사람과 대지를 만나 공간을 계획해야 한다. 설계에만 매진할 수는 없을까라는 고민부터, 여러 일들에 관여하는 만큼 사회적인 인식도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갖게 된다.
필자는 운전 중에 떠오른 생각들도 (정차시에) 쉽게 메모할 수 있게 준비해둘 정도로 건축에 깊게 중독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충분한 깨달음을 경험한 단계는 아니지만, 조금 더 꽃나무가지를 잘 자르고자 노력하고, 그 베어낸 자리를 많은 이들이 살펴보기를 바라고 있다. 단, 다른 검객과 겨루기 위함이 아니고, 더 좋은 건축을 만들며 함께 성장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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