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정동 일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김진애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컬럼Column이었다. 연재가 끝난 뒤 김진애는 컬럼의 글을 묶어 '우리도시 예찬(안그라픽스)'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당시 정동에 대해 쓴 글에는 하얀색 건물 사진이 삽입돼 있었다. 주변에 다른 건물은 없었고 파란 하늘에 백설기 마냥 하얀색의 탑이 외로워 보였다. 얼핏 보면 서울이 아닌 지방 어딘가에 있는 근대시대 건축물 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진의 주인공은 舊 러시아공사관. 舊 러시아공사관은 이화여고100주년 기념관(이종호&Studio Metaa, 2004)과 마주보고 있는 캐나다대사관(Zeidler Partnership+신예건축, 2007)을 왼쪽에 두고 오르막 길 끝에 있다. 언덕 위에 올려져 있는 이 하얀색 탑은 舊 러시아공사관 건물의 일부로, 남쪽에는 심한 단차를 두고 정동공원이 배치돼 있다. 그래서 건축물이라기 보다는 마치 기념비같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舊 러시아공사관의 탑은 1973년 박정희 정권때 복원됐다. 철저한 고증 작업은 없었다. 그래서 -사진의 비율이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과거 舊 러시아공사관을 찍은 사진(위 사진)에 나와 있는 탑의 비례와 맞지 않는다. 탑과 지하 일부를 제외한 기존 공사관 건물은 한국전쟁 큰 피해를 입었다. 이 땅(대지면적 22,500㎡)에 러시아공사관 건물이 세워진 시기는 1890년이다. 이보다 앞선 1885년 7월에 조선과 러시아간의 수호조약이 비준됐고 후속조치로 러시아 임시대리공사 Karl Waber가 입국하여 공사관을 개설했다(1885년 10월 14일). 1888년 8월 20일, 조러통상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공사관과 러시아 정교회 건립 부지로 정동 상림원 일대의 땅을 확보했다. 상림원은 경운궁의 후원後園이다. 이순우의 책(정동과 각국공사관, 하늘재)에 따르면 "러시아 공사관의 건축시기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지만 1897년 7월에 주한미국공사를 지낸 Horace Newton Allen이 정리한 '외교사연표'에는 '현 러시아공사관의 정초석을 놓은 것은 1890년 8월 30일'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쪽의 얘기가 훨씬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라고 건립시기를 밝히고 있다.
舊 러시아공사관을 설계한 사람은 우리나라의 근대 건축을 이야기할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Afanasij Ivanobich Seredin Sabatin(이하 Sabatin, 위 사진)이다. Sabatin 개인적으로도 舊 러시아공사관 설계는 꽤 의미있는 일이었다. 1883년 입국하여 1904년 노일전쟁 발발까지 20여년간 우리나라에 머문 Sabatin은 舊 러시아공사관 설계를 통해 한양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구한말 서울 정동의 러시아공사관에 대한 복원적 연구(김정신+발레리 알렉사드로비치 사보스텐코, 건축역사연구 제19권6호 통권73호, 2010년 12월)'에 따르면 Sabatin이 舊 러시아공사관 설계에 관여하기 전 Karl Waber공사가 1886년~1887년에 일본인 건축가 쪼고Tego를 초빙해서 설계도를 작성토록 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사 착공은 재원부족으로 연기됐고 1890년 7월 재설계를 완성한 사람이 Sabatin이라는 것이다.
1895년 Sabatin이 주도한 1차 수리공사 후 1899년 기준으로 공사관 건물의 연면적만 750㎡에 이를 만큼 舊 러시아공사관의 위용은 대단했다. 실제 舊 러시아공사관은 당시 지어진 외국 공사관 중 가장 큰 규모였다고 한다(그 다음은 영국공사관). 더군다나 現 예원중학교와 캐나다대사관 사이에 개선문 형태의 러시아공사관 정문(위 사진 아래)이 있었고 공사관 건물은 이 보다 17m 정도 높은 곳에 있었으니 시각적으로도 꽤 눈에 띄였을 것 같다. 반대로 舊 러시아공사관에서는 정동 일대의 움직임을 한 눈에 살필 수 있었다(3층 높이의 탑까지 있었으니). 舊 러시아공사관은 1896년 2월 11일~1987년 2월 20일까지 고종과 왕세자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할 만한 규모와 위치였다(아래사진은 아관파천 당시의 모습).
"아관파천은 그 동안 우리 역사에서 매우 부정적 시각으로 평가되었다. 아관파천은 한 나라의 왕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외국 공사관에 몸을 의탁한 굴욕적인 사건으로 묘사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왕의 안위'가 곧 '국가의 안위'로 직결되던 왕조 국가 시절에 자신을 압박하는 외국의 압력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압박하던 세력에 견줄 수 있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것이라는 국제 관계의 기본 틀을 도외시한 것이다. 즉,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던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일본의 대륙 진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가장 높게 평가하고 있던 나라의 지원을 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택된 나라가 러시아였다. ...(중략)...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당시 조선의 국력과 조선에서의 국제적인 역학 관계를 감안할 때 일본을 가장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정치적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덕수궁: 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 안창모, 동녘-
舊 러시아공사관은 남쪽으로 장변을 둔 └┘자 평면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탑은 └┘자 평면 북동쪽 코너Corner에 있었다. 그러니까 현재 배치를 기준으로 정동 상림원 아파트 입구쪽에 공사관 건물이 있었다는 얘기다(위 도면과 아래 3D-모델링의 출처는 김정신+발레리 알렉사드로비치 사보스텐코의 논문). 건물 전체적으로는 제정 러시아 르네상스 양식으로 북측 입면을 제외한 남,동,서측 입면에는 연속된 아치 아케이드가 발코니를 이루고 있었다. 입면은 현재 남아 있는 탑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하얀색 회반죽으로 마감돼 있었지만 구조는 적벽돌 조적이었다. 하지만 지붕은 한옥 기와를 올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전통양식을 의도적으로 절충하려 한 것 같지는 않고 아마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한 듯 하다. 지붕의 형태는 우진각지붕과 형태적으로 유사한 힙Hip 형태에 정면 입구 상부에 있는 페디먼트Pediment가 합쳐진 인터섹션Intersection이다.
1981년에 서울시와 문화재 관리국 공동으로 舊 러시아공사관 유적에 대한 발굴작업을 진행했다. 이때 동북쪽 20m 거리 지하3m 지점에서 지하밀실과 지하통로가 발견됐다. 지하밀실은 7m x 4m 크기였고 지하통로의 길이는 20.3m였다. 지하통로의 폭은 하부 45cm, 상부 100cm로 단면이 V자 형태다. 통로 중간지점에는 폭50cm, 길이5m로 확장돼 있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는 통행인이 급히 왕래할 때 대기할 수 있는 공간으로 추정됐다. 이 외 탑 서측 약5m와 동측 약5m x 10m의 부속건물 외벽체 하부 줄기초 유구(화강석 지대석)도 발견됐다. 이 지하밀실과 지하통로를 두고 덕수궁까지 연결돼 있어서 이를 통해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을 오갔을 것이라는 추측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김정신+발레리 알렉사드로비치 사보스텐코는 논문에서 "이 설은 주변을 모두 발굴 조사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빙성이 떨어지며 아관파천시 상황과 지형상태로 볼 때 경운궁과 연결된 통로로 보기에는 무리다. 왜냐하면 여기서부터 경운궁 쪽은 사방으로 10여미터 떨어지는 급경사이며, 경운궁과는 미국공사관 구역을 거쳐 250여 미터나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고종이 세자와 함께 노老대비를 예방하기 위해 몰래 경운궁에 드나들었던 통로는 공사관 동북쪽 후문에서 덕수궁으로 이어진 돌담길(현재 미대사관저와 부대사관저 사이의 소로)이 아닌가 한다. 이 길은 북쪽으로 계속 가면 새문안로 위에 가설된 경희궁 연결의 운교와 연결되었을 것이다."라고 반론을 제기했다(아래사진 참고). 즉, 이 지하밀실과 통로는 러시아공사관 건물과 호위대 막사를 연결하는 지하비밀 통로라는 것이다.
舊 러시아공사관은 우리나라에 자국의 양식으로 지어진 최초의 외교건축이다. 당시는 냉전시대도 아니었기 때문에 미국이 우리나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오히려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는 쪽은 영국이었다. 영국의 이러한 의도는 공사관의 위치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데, 1884년 4월 개설된 영국공사관은 舊 러시아 공사관에서 동쪽을 300m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있다. 영국 제국주의 식민지 양식Colonial Style으로 지어진 영국공사관 건물은 1890년 5월 착공하여 1891년 5월에 준공됐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舊 러시아공사관은 정동에 외교가가 형성되는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러시아가 정동에 자국의 양식으로 공사관 건물을 지은 이유도 분명했다. 이순우는 '정동과 각국공사관(하늘재)'에서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요인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정동지역은 서울 도성의 서쪽 끝에 해당하는 위치에 자리하는 동시에 인천으로 이어지는 마포와 양화진 진입로 역할을 하는 지리적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둘째, 정동지역은 바로 뒤편으로 서울 성벽이 둘러치고 남대문, 서대문, 서소문과 가까워서 진출입이 자유로운 편으로 비상시에 방어와 퇴각이 용이한 측면이 있었다.
셋째, 정동지역은 도성 안쪽에 자리하였으나 상대적으로 외진 곳이고 빈터도 많이 남아 있었으므로, 그로 인하여 현실적으로 토지와 가옥의 매입이 쉬웠던 탓도 작용했으리라 보인다.
넷째, 각국공사관에 의해 의뢰된 부지선정 건에 대하여 조선정부는 대부분 정동지역의 토지와 가옥을 선호하여 매매알선을 하여주었는데, 여기에는 외교공관이 특정지역에 모여들게 함으로써 일반백성과 격리하는 효과도 고려한 듯하다.
다섯째, 이는 약간 결과론적인 풀이이긴 하지만,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경운궁이 재건됨에 따라 궁궐과 가까운 곳에 자국의 외교공간을 두려는 의도가 표출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동과 각국공사관, 이순우, 하늘재-
현재 러시아대사관은 舊 러시아공사관에서 남쪽으로 350m 가량 떨어진 대지(대지면적 8,260㎡)에 들어서 있다. 정동 영역을 X자로 가르는 정동길과 덕수궁길이 교차하는 작은 로터리에서 정동제일교회(吉澤友太郞+심의석, 1898)를 바라봤을때 목가적인 풍경에서나 세워질 법한 벧엘예배당과 경직된 사회의 도심에서나 볼 법한 모뉴멘트Monument가 한 프레임Frame 안에 들어오는데(위 사진), 그 모뉴멘트 같은 건물이 러시아대사관이다. 벧엘예배당과 러시아대사관의 모습이 지나치게 상반돼서 두 건물 간의 물리적인 거리도 꽤 있을 것 같은데, 실제는 바로 붙어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패배한뒤 러시아는 우리나라에서 철수했다. 그리고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소련이 세워지면서 舊 러시아공사관은 1925년 9월 24일 '소련 총영사관'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냉전시대 동안 소련이라는 나라는 우리나라에 들어올 수 없었다. 1990년 9월 30일, 한국과 소련은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이후 1991년 소련은 해체됐지만 이듬해(1992년) Boris Yeltsin 대통령이 공식 방한해 '한러기본관계조약'에 서명함으로서 양국 관계는 확대됐다.
한국과의 외교관계가 다시 설정됨에 따라 러시아는 대사관 건물을 새로 지을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이 때 러시아는 대한민국정부에 舊 러시아공사관 터 24,770㎡를 반환해 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 증거물은 고종이 서명한 서류들이었다. 청구 당시 가치로 3,000억원에 해당되는 규모였다. 하지만 서울시는 이미 9,900㎡ 가량은 매각했고 14,870㎡ 정도에는 정동공원을 조성했다. 그런 사유가 아니더라도 아마 대한민국 정부가 그 땅을 러시아에 반환할 수는 없었을 것같다. 아무리 냉전이 끝났다 하더라도 미대사관저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러시아대사관 건물이 올라가는 걸 미국이 지켜볼리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러시아와의 협상은 시작됐다. 그리고 그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아 6년이라는 시간을 흘러보냈다. 협상의 내용은 러시아 대사관 신축 부지의 위치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보상 금액이었다. 결국 정부는 200억원(USD 18,500,000)에 합의를 본다. 다음 이슈는 대사관의 위치였다. 1999년 7월, 한국과 러시아간에 양국이 장기 임대 형식으로 대사관을 지을 땅을 서로 빌려주는데, 그 땅의 면적 뿐만 아니라 위치도 비슷해야 한다는 내용의 '공관부지 교환협정'이 체결됐다. 위치에 대한 조건은 상대국 외무성으로부터 5분 거리 내외. 이 조건을 만족하는 대지는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비어있던 배재학당 운동장(면적 8,260㎡) 밖에 없었다. 당시 소유자가 토지개발공사였기 때문에 매입에 걸림돌도 없었다.
러시아측에서 설계자 김원&광장건축(이하 김원)에게 가장 크게 요구했던 사항은 '보안'이었다. 냉전이 끝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러시아쪽에서는 미국과의 첩보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러시아의 일처리 방식은 KGB 스타일이었다. 발주처의 문화적 특성이나 외교건축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김원은 건축주에게 벤치마킹Benchmarking 할 수 있는 공관을 추천해 달라고 요구했고 발주처는 동경주재 러시아대사관을 언급했다(위 구글 스트리트뷰). 동경주재 러시아대사관을 둘러본 김원은 건축주에게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개혁정책) 이후 처음 세워지는 해외 공관인 만큼 대외적인 개방이미지를 높여야 한다고 설득했다. 아래 모델링 사진은 이런 생각하에 설계된 김원의 초기안이다.
하지만 러시아대사관이 들어설 땅이 배재학교 이전적지라 건폐율은 33%를 넘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정동제일교회가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문화재 앙각사선제한을 지켜야 했다. 이에 따라 대지에 지을 수 있는 최대 높이는 41.4m(12층)로 정해졌다. 설계자는 이러한 여건을 반영하여 동에서 서로 점차 높아지는, 정동제일교회를 기준으로 셋백Set-back되는 매스를 제안했다. 초기안을 기준으로 3층 높이의 기단에 4개층이 올려져 있는데, 그 가운데에 기둥만 있는 공간을 두었다. 옥탑부분은 일부에만 11층 높이로 설계했다. 가운데 6m 간격으로 기둥만 박혀있는 공간은 나중에 어떤 형태의 기능으로도 사용될 수 있게끔 했다. 최종적으로는 동쪽 매스(본청)는 6층, 서쪽 매스(학교, 병원 등)는 12층으로 지어졌다(아래사진, 전체 연면적은 12,000㎡).
김원의 초기안은 설계가 진행되면서 상당 부분 바뀌었다. 무엇보다 러시아측의 보안 심의에서 많이 걸러졌다고 하는데, 설계자에 의하면 건축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수정사항을 요구하기도 했단다. 무엇보다 초기안에 비해 외부의 모습이 크게 달라졌다. 외교건축의 폐쇄적인 특성, 거기에 정동이라는 컨텍스트와 러시아측에서 요구하는 규모가 크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정동내 다른 어떤 외교건물 보다 러시아대사관의 설계, 그 중에서도 입면설계는 중요했다. 외부에서 보이는 모습이 중요한 위치, 크기 그리고 기능이었기 때문이다. 초기안에서 김원이 제안한 입면은 개방적이고 현대적인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60cm 두께의 알루미늄Aluminium 판에 동그란 창문을 불규칙하게 뚫는 것이었다. "창이 많으면서도 시선을 가릴 수 있고, 위치변경이 자유자재일 수 있도록, 둥근 창으로 하면서, 펀치카드Punch Card처럼 현대적인 표현을 하려고 한" 의도였다. 김원이 불규칙하게 뚫은 동그란 창문은 현재 오와 열을 맞춘 작은 창으로 바뀌었다. 건물의 매스도 모서리 부분이 둥글게 굴려져서 차가운 느낌 보다는 부드럽게 다가온다.
2002년 러시아대사관 완공을 앞두고 언론에서 말이 나왔다. 건물 옥탑에 설치된 금속 구체를 두고 크렘린 Kremlin 궁을 연상시킨다는 의견도 있었고 '현대의 실수'라는 표현을 쓰면서 설계 자체에 대한 비판도 일었다. 건설 중에 발견된 서울성곽 유적이 완공 후 사라졌다는 고발에서 부터 시작해 그 땅이 정동이었기 때문에 그 말은 더 뜨거워졌고 결국 설계자인 김원도 자신의 생각을 지면에 공개해야 했다. 러시아대사관에 대한 비판에 대해 설계자 김원은 우리나라 문화재법의 미비와 고도보존법의 부재를 꼽았다. 설계자가 최종적으로 지어진 건물의 모습에 대해 '발주처가 자신의 의도를 바꿨다'라는 얘기로 어느 정도의 책임을 피할 수는 있다. 모든 설계자가 자신의 의도와 상반되는 발주처의 요구에 대해 작가적 신념으로 대응할 수 없고 또 그렇게 하는게 설계자의 바람직한 자세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가능한 반영된 초기안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러시아대사관이 정동이라는 컨텍스트에 어울리느냐 그렇지 않느냐 라는 문제도 설계자의 의도 그리고 의도가 반영된 건축물의 디자인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면, 지금의 모습이 아닌 초기안을 들여다 보야 한다.
그런데 김원의 초기안을 러시아대사관 부지에 놓는다 하더라도 지금과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붉은 벽돌 재료가 주재료인 정동에 알루미늄이라는 재료(초기안)가 화강석 석재(현재 모습) 보다 더 이질적으로 보였을 듯 하다. 정동의 분위기와 역사적 건축물이 지니는 붉은벽돌 조적구조는 건물을 짓는 인간의 노동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재료다. 벽돌이라는 재료 자체가 가장 맨-메이드Man-made하고 그것을 쌓는 과정에서 벽돌 하나하나와 그 사이의 줄눈에 노동의 흔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적구조로 지어진 옛 건물과 어울려 보이는 새로운 건물은 역시 조적구조로 짓거나 아니면 입면을 이루는 요소를 잘게 쪼개서 디테일이 드러나도록 한다. 벽돌을 쌓는 과정이 아닌 디테일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노동의 흔적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러시아대사관 초기안에서는 둥근 창이 불규칙하게 뚫리는 것 외에 입면의 디자인은 모두 동일하다. 디자인에 디테일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없는 것이다. 설계자 스스로도 '현대적인 이미지 표현을 지향했다'고 밝혔다.
또 하나 생각해 볼 사항은 러시아대사관 초기안은 정동이라는 컨텍스트보다는 김원이라는 건축가의 설계 당시 디자인 언어가 더 강하게 반영된 설계라는 것이다. 광장건축 홈페이지를 보면 러시아대사관은 1995년으로 분류돼 있다. 비슷한 시기의 작업 중 러시아대사관과 같은 업무시설에서 광주은행 학동지점(1991~1995, 위 사진)과 삼성동 KM빌딩(1990~1994, 아래사진)을 보면 외부마감이 모두 러시아대사관 초기안의 외부마감과 같은 알루미늄 복합 패널이다. 두 작업 모두 날카로운 선의 강조를 통해 현대적인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러시아대사관 초기안은 이런 김원의 작업흐름의 연장선에 있는 작업이다. 설계자가 둥근창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펀치카드는 인간이 아닌 기계가 생산한 결과물을 연상시킨다. 인간의 노동을 드러내는 조적구조와 기계가 생산한 듯한 펀치카드의 병치는 어울리기 힘든 이미지다. 그렇다면 정동이라는 컨텍스트와 초기안이 추구한 현대적인 이미지의 표현이 과연 어울리는 걸까? 어우릴고 안 어울리고를 논하기 이전에 김원은 그에 대한 자신의 설명을 충분히 했는가? 김원의 초기안도 우리나라의 문화재법과 앙각규제를 위반하지 않았다. 그럼 그 다음은 설계자의 의식 문제다. 그렇다고 그 다음 과정에 대해서도 법이 규제할 수는 없지 않은가? 김원은 같은 정동 지역임에도 역사적 건물이 있었던 자리 -성공회 서울대성당(1996)과 이화여고100주년 기념관 지명설계(2002)- 에서는 철저히 역사적 건물의 질서를 따르는 방식(복원)을 택했다.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기본설계에서는 그렇지 않은 상황이지만 정동이라는 컨텍스트를 상당히 고려했다.
하지만 러시아대사관에서 만큼은 완전히 상반된 접근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안을 놓고 보면 김원이 우리나라 문화재법의 미비와 고도보존법의 부재를 꼽는 주장은 면피를 위한 비빌 언덕을 찾는 것 같다. '애초 러사이대사관이 그 땅에 그 정도 규모로 지어질 수 없는 법이 있었다면 높거나 거대해 보인다는 비판이 나오지도 않았을꺼 아니야!'라는 식의 주장은 솔직히 설계자로서 면피다. 오히려 다른 건축가도 아닌 김원이라면 자신의 초기안에 대해 '정동이라는 컨텍스트에 초기안이 이런 이런 면에서는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라던가 아니면 '굳이 정동이라는 컨텍스트를 따른 필요가 있느냐'라는 식의 주장이 더 자신감있어 보인다. 어차피 건축가는 땅과 용도를 이길 수 없다. 특히 용도는 발주처의 의사결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다면 건축가는 땅이 갖는 특징에 대한 자신의 해석 만큼은 확실히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법은 지켰다'라는 준법정신만으로 러시아대사관 설계안을 설명하기에는 이 땅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설계자가 특혜를 받아 지었다는 캐나다대사관이 법을 잘 지킨 러시아대사관 보다 정동이라는 장소에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물론 설계자가 초기안에서 제안한 조각공원이나 문화시설과 같은 대외개방적인 시설이 발주처의 보안이라는 이유로 사라진 것도 원인이 될 수 있다. 캐나다대사관처럼 주변과의 관계를 촉진시킬 만한 시설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혜를 받았든 법을 지켰든 도시가 기본적으로는 시민들이 향유해야 하는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봤을때, 더군다나 그곳이 정동이라면 그 지역에 들어서야할 건축물은 캐나다대사관과 같이 주변과 더 어울리려는 시도가 있었어야 했다. 여러모로 러시아대사관 건물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