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유럽의 현대미술을 소개한 아모리쇼Armory Show는 당시 유럽의 고전미술과 사실주의미술을 진정한 예술로 여겼던 뉴욕 예술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위 이미지). 아모리쇼 이후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지 않았던 현대미술, 특히 미국작가의 작품들은 경제적 주도권을 쥐고 있던 남성이 아닌 여성 컬렉터Collector들의 수집 목록에 올랐다. MoMAMuseum of Modern Art의 주요 소장품의 기반이 된 작품들 또한 에비 록펠러Abby Rockefeller와 그녀의 절친이었던 릴리 블리스Lillie Bliss, 메리 퀸 설리반Marry Quinn Sullivan의 소장품이었다. 그녀들(아래 이미지)은 자신들의 소장품과 현대미술을 전시할 수 있는 상설전시관의 필요성을 느꼈고 1929년 11월 7일 MoMA를 설립했다.
그녀들이 선임한 초대 관장은 당시 27세였던 알프레드 바Alfred Barr였다(위 사진). 30세도 안된 인물이 미술관 관장에 선임됐다는 사실은 MoMA가 일으킨 첫 번쩨 센세이션Sensation이었다. 알프레드 바는 모마가 탄생되기 두달 전에 승인된 미술관 규정 조항에서 미술관의 미션Mission을 "미술이론을 실용적인 삶에 적용하는 것을 적극 장려하고 대중에 대한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다"이라고 규정했다. 미술관은 더 이상 작품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니고 미술의 실용성과 상품성, 대중성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선언한 셈이다.
초대 관장 선임 후 해결해야 할 일은 전용관 건립이었다. 이는 많은 예산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MoMA가 설립되기 전달인 1929년 10월 29일 '검은 화요일Black Tuesday'로 기억되는 주식시장의 대폭락 'The Great Crash' 이 일어났다. 세계 경제 대공항으로 MoMA 전용관 건립 사업은 지연됐고 임시로 핵셔빌딩Heckscher Building 12층 6개 방을 빌려 전시회를 열었다.
전용관은 없었지만 알프레드 바는 1936년부터 회화 뿐만 아니라 판화, 사진, 산업디자인, 건축, 무대디자인 등을 MoMA의 프로그램에 포함시키는 계획을 수립했고 구체적인 행동을 시작했다. MoMA 전까지 뮤지엄의 전시대상은 회화나 조각에 한정돼 있었다. 하지만 알프레드 바는 예술품이 만들어지는 그 시대 정신과 당시 통용됐던 미적가치는 다양한 분야에 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그 각각은 그 시대의 문화적, 역사적 관계를 갖기 때문에 뮤지엄이 담아내야 하는 대상이라 여겼다. 나는 알프레드 바의 이런 철학이 MoMA를 가장 뉴욕 답고 가장 미국적인 뮤지엄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27세의 관장, 소장품과 전시대상의 범위 설정에 이어 MoMA가 일으킨 세 번째 센세이션은 1930년 당시 24세였던 필립 존슨Philip Johnson을 MoMA건축부장에 임명한 일이었다. 1932년 존슨은 알프레드 바와 건축역사가인 헨리 러쎌 히치콕Henry Russell Hitchcock과의 기획 아래 라는 건축전을 개최했다(위 사진). 이 전시회에는 Frank Lloyd Wright를 포함한 미국 현대건축가들의 작품도 전시됐지만 초점은 르 꼬르뷔제Le Corbusier와 미스 반데 로에Mies Van der Rohe를 비롯한 유럽 건축가들의 작품에 맞춰져 있었다.
전용관 건립을 위해 에비 록펠러는 자신의 남편 존 D.록펠러 2세John D Rockefeller II와 결혼 직후 생활했던 현재 부지를 기부했다. 다음 순서는 건축가 선정이었는데, 알프레드 바는 모더니즘Modernism을 선도해 온 유럽 건축가들을 염두해 두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예술계의 큰 자금줄이었던 사람들은 알프레드 바를 지지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보수적이었고 에비 록펠러의 아들로 구성된 건축위원회는 설계 총 책임자로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 출신의 건축가 필립 굿윈Philip Goodwin을 선정했다. 이는 명백히 알프레드 바의 생각과는 어긋나는 부분이었다.
알브레드 바의 대응은 미스 반데 로에와 접촉하는 것이었지만 건축위원회는 굿윈을 도울 건축가로 에드워드 두렐 스톤Edward Durell Stone을 선정했다. 관장과 위원회 사이의 파워 게임에서 위원회로 균형이 기울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MoMA전용관은 1939년 인터내셔널 양식International Style으로는 한번도 설계해 본적 없는 굿윈의 디자인으로 완공됐고 1943년 알프레드 바는 관장직에서 해고됐다(위 사진에서 검은색 외관 사이의 흰색 입면 건물).
이 과정에서 뭔가 깨달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신념 때문이었는지 뮤지엄 건물은 인터내셔널 양식으로 지어야 한다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친 필립 존슨도 1936년 MoMA를 떠나 예술과는 상관없는 정치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940년 필립존슨은 히틀러가 자신이 원하던 영웅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34살의 나이에 하버드 대학원에 진학한다. 그리고 1946년 건축부장직으로 다시 MoMA에 돌아왔다.
존슨은 MoMA 복귀 후 <미스 반데 로에 건축전>을 처음으로 기획했다. 그리고 1950년부터 열렬한 미스의 추종자가 됐다. 1954년 존슨은 MoMA 건축부장직을 그만두기 전까지 MoMA의 몇차례 증개축에 영향을 미쳤고 에비 앨드리치 록펠러 조각 정원Abby Aldrich Rockefeller Sculpture Garden(1953, 위 사진)과 그레이스 레이니 로저스 별관Grace Rainey Rogers Annex(1951)을 설계했다. 특히 에비 앨드리치 록펠러 조각 정원은 존슨의 초기 설계 이후 몇 명에 의해 수정되기는 했지만 MoMA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도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존슨이 다시 떠나고 2년 뒤인 1956년 MoMA는 W53rd st 23번가 건물을 사들였다. 그리고 1963년 당시 휘트니 미술관Whitney Museum이 있었던 W54th st 20번지도 사들였다. 모두 굿윈이 설계한 최초 MoMA건물의 동쪽에 있다. 존슨이 MoMA를 떠났지만 그의 영향력은 유효했기에 1964년 존슨은 이 부지에 조각정원을 동쪽으로 조금 확장하고 동관East Wing을 신축했다.
굿윈 설계의 건물을 기준으로 했을 때 서쪽으로 확장된 시기는 1984년이었다. 당시 존슨이 꽂혀 있었던 취향이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이었기 때문이었는지 MoMA는 존슨이 아닌 시저 펠리Cesar Pelli에게 53층 높이의 주거타워(MoMA전시층을 포함하여 전체층수는 58층)가 포함된 서동West Wing설계를 MoMA설립 50주년이 되는 1979년에 발표했다. 기존 전시면적의 두 배, 그 외 공간 규모 30%가 증가하는 시저 펠리의 안을 실현하기 위해 1951년 존슨이 설계한 그레이스 별관을 허물고 주변 MoMA소유대지의 공중권을 한군데 끌어 모아야했다.
1988년 존슨의 기획으로 개최된 <해체주의Deconstructivism 건축전>은 여전히 MoMA가 건축 트렌드를 이끄는 선구적인 뮤지엄이라는 것과 존슨의 영향력을 확인시켜 줬다. 1984년 시저 펠리의 대규모 증축안이 완공되었음에도 1990년대 MoMA의 양적, 질적 성장은 계속됐다. 1996년에는 소장품이 120,000점, 관련서적이 150,000권에 달하자 인접한 도싯 호텔Dorset Hotel과 주택 주거건물 두 동을 사들이고 1조원이라는 거금이 투입되는 확장계획안을 발표했다. 그리고 1997년 10명의 건축가가 출품한 확장계획안에 대한 설명회를 가졌다. 당시 계획안을 제출한 건축가들 10명은 스티븐 홀Steven Holl, 렘 쿨하스Rem Koolhaas(위 모형 사진), 도요 이토Toyo Ito, 베르나드 츄미Bernard Tschumi(아래 이미지), 라파엘 비뇰리Rafael Vinoly, 도미니크 페로Dominique Perrault, 헤르조그 앤 드 뮤롱Herzog & de Mueron, 토드 윌리엄스Todd Williams 그리고 요시오 타니구치Yoshio Taniguchi였다.
이 가운데 츄미, 헤르조그 그리고 요시오 타니구치의 안이 결선에 올랐고 같은해 12월 8일 MoMA 건축위원회는 최종 당선자로 그때까지 일본 이외 지역에서는 프로젝트를 수행해 본 경험이 없었던 타니구치의 안을 선정했다. MoMA가 그때까지 예술계에 일으킨 센세이션에 또 하나의 파격을 더한듯 했지만 사실 타니구치의 안은 지금까지 MoMA가 그들의 공간으로 추구해온 국제주의 양식의 연장선 상에 있었다.
일본식으로 옻칠한 상자에 설계 도면을 곱게 담아 주최 측에 제출했다는 타니구치는 일본적인 요소와 서양적인 요소를 계획안에서 교묘하게 결합시켰다. 그의 설계안에는 디테일도 그렇다고 곡선의 건축어휘도 없었다. 타니구치는 최종 설계자로 선정되자 설계비를 많이 주면 건축물을 사라지게 해줄 수도 있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 코멘트Comment에는 자신의 안이 MoMA의 소장품들을 들어내기 위해 건축은 있는 듯 없는 듯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개념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1930년대 모던 스타일Modern Style이었던 국제주의 양식을 2000년이 다된 시점에도 고수하는 것이 모던이 아닐 수도 있고 박제된 모더니즘Modernism의 고집일 수도 있겠지만 타니구치의 안은 인터내셔널 양식을 동시대Contemporary 관점에서 해석한 의미를 포함한 모던을 공간적으로 전개했다고 볼 수도 있다. 더불어 타니구치는 73년 동안 MoMA가 몇 사람의 건축가에 의해 증축돼 왔음에도 가장 가치있는 공간은 여전히 에비 앨드리치 조각정원에 있음을 염두해 두었다. 이런 그의 의도는 맨해튼의 가로가 건물 내부로 연장된 듯한 로비Lobby로 들어서면 조각 정원이 마치 하나의 공간처럼 인식되도록 처리한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실제 타니구치는 본격적인 설계작업 전에 존슨을 만나기 위해 글래스 하우스Glass House를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시저 펠리가 설계한 건물 저층부 여섯개 층과 연계하여 기존 전시공간을 두 배로 확장한 더 페기 앤 데이비드 록펠러 빌딩The Peggy and David Rockefeller Building은 2002년 5월 공사를 시작하여 MoMA개관 75주년이 되는 2004년 9월 마무리 됐다. 타니구치는 뮤지엄 타워 저층부와 동일한 검은색으로 입면을 통일시켰다. 하지만 유리의 반짝거림을 최대한 살려 차별성을 두었는데 이는 W53rd st을 따라 130m 길이에 이르는 MoMA의 전면을 동쪽에서부터 필립 존슨-필립 굿윈-시저 펠리-요시오 타니구치가 설계한 입면으로 각각 구분시킴으로서 가로경관의 지루함을 없애려는 의도였다.
조각 정원 동쪽, W54th st에 면한 더 루위스 앤 도로시 컬먼 교육연구빌딩The Lewis B. and Dorothy Cullman Education and Research Building은 2006년 11월, 8층 규모로 완공되었다. 현재 MoMA의 소장품은 150,000점이고 필름만 22,000점이라고 한다. 또한 70,000명 이상의 예술가들에 대한 300,000권 이상의 관련서적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MoMA는 90주년이 되는 2019년, 딜러 스코피디오+렌프로Diller Scofidio+Renfro가 설계한 뮤지엄과 장 누벨Jean Nouvel이 설계한 53W53이 준공되었다(위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