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릉(조선왕릉 40기)은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2009년 지정
선정릉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199호로 1970년 지정
회사와 집이 가까이 있어서 선선한 날이면 가끔 한 바퀴 산책하기도 하는 곳이다. 선정릉을 시작으로 조선 왕릉을 답사한 내용을 포스팅하도록 할텐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 전 왕릉의 형식과 형태에 재미를 느끼게 되어 '조선왕릉 답사수첩'이라는 수첩 같은 책을 구입하여 답사하기 시작했다. 조선왕릉은 선정릉을 비롯해 대부분이 서울 경기 지역에 많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러한 왕릉은 그 자체도 의미가 있겠지만 도심 속에 녹지와 공원을 제공해주는 의미 또한 크다고 생각한다. 재실은 비교적 형식에 충실하며 간결한 구성을 하고 있다.
선릉은 9대 성종과 부인 정현왕후의 무덤이다.
성종은 유교사상을 정착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사림을 성장시켜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정치기반을 조성함으로써 조선 초기의 전반적인 체제를 안정시켰다.
선릉은 왕릉과 비릉이 각각 다른 산등성이에 있는 동원이강의 형식으로 왼쪽 등성이의 비릉에는 병석을 세우지 않았고, 다른 석물들은 왕릉과 같으며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왕릉에는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그 안에 동물의 머리에 사람의 모습을 한 십이지신상을 새겼으며, 세조의 광릉 이후 세우지 않았던 병석을 성종의 선릉부터 다시 세웠다. 난간석은 12칸이며 그 밖에 양석·호석·망주석·문인석 등의 석물이 있다. 문·무인석의 얼굴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나 몸통은 입체감이 없다.
정릉은 11대 중종의 무덤이다.
중종은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기위해 노력하였으나, 개혁파와 공신파의 정치적 논쟁이 끊이지 않아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정릉은 원래 중종 제1계비인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의 오른쪽 언덕에 있었으나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고 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선릉의 석물제도를 본떴다. 조선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고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다.
임진왜란 때는 선·정릉의 양릉이 훼손되는 변을 겪게 된다. 제사를 지내는 방은 양릉의 사이에 있으며, 여름철의 침수를 피하기 위해 층단에 지었는데 이러한 예는 선릉·정릉뿐이다.
성종은 유교사상을 정착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사림을 성장시켜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정치기반을 조성함으로써 조선 초기의 전반적인 체제를 안정시켰다. 선릉은 왕릉과 비릉이 각각 다른 산등성이에 있는 동원이강의 형식으로 왼쪽 등성이의 비릉에는 병석을 세우지 않았고, 다른 석물들은 왕릉과 같으며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진입방향과 왕릉의 위치가 일직선에 위치하고 있지 않아서 일반인들이 간혹 왕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기도 한다. 주변의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신도와 어도가 시작되는 홍살문이 도로와 가까운 모퉁이에 위치하게 되었다. 왕릉의 영역을 도로가 침범한 것은 아니지만, 관람자가 왕릉 전체의 측면으로 진입하게 되어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성종의 무덤과 정현왕후의 무덤은 비교적 거리를 두고 있어서 그 사이에 산책로들이 만들어져 있다. 왕릉에는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그 안에 동물의 머리에 사람의 모습을 한 십이지신상을 새겼으며, 세조의 광릉 이후 세우지 않았던 병석을 성종의 선릉부터 다시 세웠다. 난간석은 12칸이며 그 밖에 양석·호석·망주석·문인석 등의 석물이 있다. 문·무인석의 얼굴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나 몸통은 입체감이 없다.
중종은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기위해 노력하였으나, 개혁파와 공신파의 정치적 논쟁이 끊이지 않아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정릉은 원래 중종 제1계비인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의 오른쪽 언덕에 있었으나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고 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홍살문으로부터 신도, 어도와 정자각, 왕릉이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어 가장 정석적인 배치로 생각된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선릉의 석물제도를 본떴다. 조선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고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다. 테헤란로의 이면에서 빌딩들로 둘러쌓여 도심의 숨구멍 역할을 하고 있는데, 빌딩숲과 소나무 숲이 오버랩 되는 그 풍경이 이채롭다.
임진왜란 때는 선·정릉의 양릉이 훼손되는 변을 겪게 된다. 제사를 지내는 방은 양릉의 사이에 있으며, 여름철의 침수를 피하기 위해 층단에 지었는데 이러한 예는 선릉·정릉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