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이데일리에 기재된 글입니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 일대. 낡고 허름한 구두 공방, 오래된 공장들이 즐비한 동네로 알려진 곳이지만, 이러한 공간들 사이로 근사한 문화공간과 카페, 레스토랑이 들어서고 뒤따라 다양한 분야의 아틀리에와 소셜 벤처 사무실들이 입주하며 계속해서 분위기가 바뀌고 있는 곳이다.
성수동의 변화는 단순히 맛집과 유흥가가 즐비한 ‘핫플레이스’로의 변화가 아닌 일자리에 민감한 젊은이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그들의 잠재력을 펼쳐 보일 수 있는 장이 형성돼 가고 있다. 게다가 그러한 변화가 정부의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아닌 자생적으로 재생된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큰 의미가 있다. 성수동에서 주목받는 공간들은 대부분 오래된 건물의 외관은 유지한 채 내부를 트렌디하게 바꾸어 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도들은 원 도심의 풍경은 유지한 채로 지역의 활성화를 촉발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 도시재생의 모범사례로 해석되기도 한다.
△ 성수동 연무장길에 위치한 H2L의 잭슨카멜레온 쇼룸, 카페컨템포 (ⓒ사진. 이남선)
‘낡음 안의 세련됨’이라는 역설.
성수동의 공간적 변화가 갖는 매력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와 같은 것이다. 상충되는 두 가치가 하나의 공간에 담길 때 발생하는 매력, 낡은 공간에서 세련된 공간으로 넘어가는 순간 느껴지는 낯선 이질감은 이 동네를 지탱하는 힘이 됐다. 실제로 성수동은 서울 내 다른 ‘뜨는 동네’에 비해 도시의 본래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는데 이는 오래된 공간에 대한 해석의 폭이 넓어졌음을 뜻하는 긍정적 변화 중 하나다.
성수동이 보여주는 이 같은 ‘역설(paradox)’은 지난 시간 동안 우리의 도시공간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이 과연 바람직한 것이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어쩌면 급격한 발전에 익숙한 우리에게 ‘낡음’은 그저 하루빨리 ‘새로움’으로 대체돼야 할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것은 아닐까. 특히 건축 그리고 그 집합체인 도시공간에 대해 ‘우리의 것’은 구시대의 유물로, ‘서구의 것’은 시급히 도입해야 할 선진 디자인으로 대하는 분위기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국내 주요 공공기관, 기업체의 랜드마크적 건축물들의 설계를 해외 건축가가 독점하다시피 해 왔음은 이러한 경향의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 도시 풍경에 대한 열등감의 팽배 속에서 피어난 성수동의 많은 장소들은 분명히 ‘낡음’의 다른 의미를 찾고 있다. 우리 도시가 기록한 역사를 마주 대하고 현대적 DNA를 이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러한 행보가 건축·경제학적 측면과 지역 활성화에도 성공적인 접근이었음을 성수동은 증명하고 있다.
이처럼 한 도시의 유구한 건축적 풍경이 가지는 가치를 보존하는 일은 이미 건축 선진국들 사이에선 다양한 정부 정책과 교육으로 연계되고 있다. 실제로 영국의 경우 런던의 상징인 리젠트 거리(Regent Street)를 형성하는 오랜 건물들의 외관을 바꾸려면 엄격한 심의를 거친다. 오랜 시간 그 거리의 인상을 형성한 백색 화강암을 다른 재료로 대체할 경우 도시의 역사적 풍경이 훼손될 수 있음을 우려하는 것이다. 또 스페인의 경우 역사적인 도시에 소재한 대학들을 중심으로 건축물의 외피를 유지한 채 내부를 현대적으로 리모델링하는 ‘건축재생학과’들이 속속 개설되고 있기도 하다.
△ 영국 런던의 상징인 리젠트 거리(Regent Street)
건축은 인간이 만든 건조물이기에 반드시 낡고 허름해지지만 역시 인간이 만든 현존하는 역사 그 자체다. 우리가 어른들의 지혜를 귀히 여기듯 오래된 도시의 모습들을 존중하고 보존하는 것은 도시에 깊이를 더하고 문화적 잠재력을 키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 도시의 ‘낡음’을 견디지 못한다면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역사’란 언제까지나 고궁과 한옥뿐일 것이다. 훗날 시대의 발자취를 오롯이 품고 있는 ‘멋지게 낡은’ 도시를 만날 수 있을까. 우리의 낡음도 역사가 될 수 있다는 희망, 성수동이 보여주는 재생과 변화가 반가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