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월간 전원생활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어쩌다 보니 단독주택 설계를 주로 많이 하는 건축가로 활동하고 있다. 집을 짓기 위해 처음 만나 새로운 집에 대한 꿈을 이야기하는 시간은 늘 즐겁고 흥미진진하다. 그리고 모두 각자의 작고 큰 꿈을 담은 집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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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위한 대화
건축가와 건축주가 만나 나누는 대화는 어떤 면에서는 연애와 비슷하다. 처음에는 방 몇 개, 주방, 창고, 차고, 예산 등 딱딱한 이야기만 하지만,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서로에게 마음을 조금씩 열어가며 진짜 속내를 이야기하게 된다. 내가, 내 아내가, 내 아이가 꾸는 꿈은 무엇인지, 내가 가족들에게 바라는 모습은 무엇인지, 사실 진짜 갖고 싶은 공간은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그때가 이 집의 특별한 모습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들과 그렇게 지어진 집들을 조금 소개해본다.
달이 뜨는 집
십수 년 전이다. 단독주택의 설계를 위한 첫 만남에서 노부부는 포스트잇을 붙여둔 산더미 같은 건축잡지와 모눈종이에 직접 그린 도면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자료보다, 남편이 부인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이야기가 더 크게 다가왔다. 그리고 노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방에 앉아 달이 뜨는 것을 보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는 이야기, 다도를 즐긴다는 이야기, 성당 중창단 활동을 하고 있어 그들과 함께 집에서 작은 음악회를 즐기고 싶다는 이야기들을 반복된 만남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비교적 넓은 땅에 예산도 부족하지 않아 많은 부분 반영하여 집을 설계하고 지었다. 좌식생활이 익숙한 세대이므로 안방은 좌식 공간으로 계획했고, 남쪽과 동쪽으로 연결된 모서리 창을 두었다. 창턱의 높이는 바닥에 앉아 찻잔 하나 얹어두거나 팔을 걸쳐놓고 달을 볼 수 있도록 낮게 두었다. 다도를 위한 별채도 따로 두어, 손님들과 다도를 즐길 수 있도록 했고 한쪽 벽의 낮은 창 바깥에는 작은 수공간을 두어 물그림자가 공간 안으로 드리울 수 있도록 했다. 작은 음악회를 할 수 있도록 거실의 한쪽은 한 단을 올려 미니 그랜드 피아노를 두었고, 적절히 조명도 설치하였다. 집을 지은 후 퍽 행복해하셨는데, 다도와 음악을 즐기며, 달을 보는 생활을 여전히 하고 계시는지 궁금하다.
함께 사는 각자의 집
△ 현관만 같이 쓰고, 나머지 공간은 모두 분리되어 있는 아들 가족의 집과 부모닙 집을 연결하는 2층 중간 통로
(ⓒ설계/사진. 디자인랩소소 건축사사무소)
한정된 예산에 한정된 땅, 거기에 부모님과 아들의 가족이 함께 살 집을 짓기로 했다며 대화를 시작한 건축주가 있었다. 두 쌍의 부부와 천방지축 남자아이 둘, 총 두 가족 여섯 명이 살 집이었다. 두 가족은 함께 살지만 각자 사는 집을 원했다. 그거야 그리 특별한 요구가 아니었지만, 여섯 명 모두가 각자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점은 이 땅과 예산에서는 조금은 특별한 희망사항이었다.
한 부부는 서로 너무 다른 취향과 생활패턴을 갖고 있고, 소음의 문제가 있어 각자의 방이 최대한 멀리 위치하기를 원했다. TV 시청을 즐기는 남편의 방은 길쭉하게 만들어 TV를 보기에 적합하도록 했고, 1층에 두었다. 아내는 방에서 기타를 치고, 글을 쓰고, 가끔 친구들과 차를 마시며 잠도 잔다. 그래서 아내의 방은 2층에 두어 방에서 나갈 수 있는 작은 외부 베란다를 만들고, 방에 가벽을 설치해 방 안에서도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을 나누었다.
다른 부부에게는 아이들이 있다. 지금은 같이 쓰지만, 아이들이 크면 나눌 수 있는 방을 원해 나중에 똑같이 나눌 수 있도록 큰 방을 두었고, 방을 나누어도 형제가 여전히 함께 쓸 수 있는 다락을 만들었다. 만남의 시간 동안 잠시도 가만있지 않았던 장난꾸러기 아이들에게는 다락의 독특하고 재미난 천장과 숨겨진 쪽창, 경쾌한 계단을 선물했다. 함께 요리하는 것을 즐기는 가족을 위해 주방을 넓게 두고 거실 역시 TV 시청보다는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으로 두었다.
이 집에서 두 가족은 하나의 현관으로 들어가 양쪽에 있는 각자의 중문으로 각자의 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각자의 방으로 흩어지지만,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낼 때는 거실과 식당으로 모이며, 온 가족은 두 집의 거실이 면하고 있는 중정형의 마당에서 다시 만난다.
프라이버시보다 전망이 중요한 집
대부분의 경우 단독주택에서 가장 걱정하는 것은 프라이버시 문제다. 전원주택일 경우 더욱더 그러하다. 하지만 제주에서, 일몰이 가장 멋진 곳에 집을 짓기 원하는 건축주는 조금 달랐다.
해안도로와 접해있고, 올레길과도 가까우며, 1층에서는 카페를 영업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2층의 집이 밖에서 보이기 쉽다고 판단했다. 심지어 저녁에는 내부 공간이 밝기 때문에 반사유리를 써도 밖에서 내부가 훤히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적절히 전면을 가리고 창을 통해 전망을 끌어들이기를 제안했다. 하지만 건축주는 이 땅을 택한 이유가 전망 때문이기 때문에 프라이버시보다도 전망이 훨씬 중요하며, 전체를 창으로 두기를 원한다 했다.
△ 거실에서 바라본 풍경 (ⓒ설계. 디자인랩소소 건축사사무소 / 사진. 윤동규)
△ 안방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 (ⓒ설계. 디자인랩소소 건축사사무소 / 사진. 윤동규)
주택에서, 그것도 길가에서 전면창은 흔히 하는 선택이 아니지만 집을 짓는 이에게 꿈의 공간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전창을 두는 대신 창을 약간 안으로 들여 조금이라도 밖에서 덜 보이게 하고 침실처럼 꼭 가려줘야 할 부분들은 창을 통해 전망을 즐길 수 있도록 계획하고 지었다.
집에서 모든 걸 할 수 있는 집
꿈꾸는 공간 리스트에 자주 들어있는 것으로 미디어룸이 있다. 프로젝터랑 제대로 된 음향장치를 설치해 가족들이 영화를 보는 공간. 하지만 조금은 독특한 미디어룸을 원한 건축주도 있었다.
아주 많은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가족이었다. 운동기구들을 들여놓기 위한 운동방도 두어야 했고,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업무공간도 필요했다. 마당에서 연결되는 필로티 공간에는 스파와 수영을 즐기기도 원했다. 미디어룸에서는 영화도 보고, TV도 보겠지만, 가끔은 스크린골프도 할 수 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스크린골프를 편히 즐기기 위해서는 정말로 생각보다 넓고 높은 공간이 필요했다. 땅의 면적도, 예산도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넓은 미디어룸을 두기 위해서는 다른 공간들을 많이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디어룸은 포기할 수 없는 공간이었고, 결국 간이 스크린골프 정도를 할 수 있도록 미디어룸과 다른 방들의 크기를 조금씩 줄여 공간을 확보했다. 다른 방보다 바닥 높이를 낮게 두어 높은 천장고를 만들고 두꺼운 흡음재와 시스템창을 사용하여 영화 감상 시와 골프 연습 시의 소음까지 신경 쓴 꿈의 공간을 만들었다.
다른 공간의 면적을 포기하며 만든 또 다른 희망공간은 빨래를 보송하게 말릴 수 있는 선룸과 중정형 테라스였다. 온실, 1층으로 뚫려있는 공간, 중정형 테라스를 나란히 두어 집에서도 다채로운 공간감을 느끼며 노닐 수 있도록 했다.
어떤 꿈이든 옳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로망이 있다. 꼭 집을 짓지 않더라도 새로운 공간을 갖게 된다면, 꼭 갖고 싶은 공간이 하나씩은 있다. 이게 합리적일까? 비효율적인 것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때로는 가족에게도 말을 꺼내지 못한다. 하지만 그 꿈을 건축가에게 꺼내고 가족들과 나누면서 작게라도 실현했을 때 그 만족감은 생각보다 크고, 집은 엄청나게 행복한 공간이 된다.
당신의 꿈이 어떤 것이든,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