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이데일리에 기재된 글입니다.
매년 3월 1일 문재인 대통령은 ‘3·1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사를 낭독한다. 3.1절 99주년이었던 2018년에는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기념사 장소로 택했다. 특히 국내·외 곳곳에 묻혀 아직 발굴되지 못한 독립운동 유적과 운동가들의 흔적을 계속 발굴해 복원·보존할 것이라는 약속은 서대문형무소라는 장소적 특성과 잘 어울리는 대목이었다. 중국 상해 임시정부, 충칭 광복군사령부도 복원할 계획임을 밝혀 역사의 기록에 대한 공간의 힘을 강조하기도 했다.
△ 2018년 3월 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99주년 3.1절 축사가 진행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문 대통령이 강조한 ‘역사적 흔적’이 매우 후진적인 방식으로 지워져 버린 곳 중 하나가 그가 기념사를 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맞은편에 있다. 통일로를 가운데 두고 서대문형무소와 마주 보고 있는 ‘옥바라지 골목’이 그곳이다.
서대문형무소는 남향에 관리동이 있고 부챗살처럼 뻗어 나간 옥사가 서~북향으로 펼쳐져 있는 전형적인 교도소 건축(교정 건축)이다. 1907년 서대문형무소가 들어선 이후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대거 투옥됐고 옥사가 바로 들여다보이지는 않지만 가까이서 옥바라지를 할 수 있는 작은 마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현 무악동)에 독립운동가들의 가족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이곳에 투옥된 김구 선생(1911~1914년 수감)의 어머니가 여관 청소 일을 하며 옥바라지를 했던 이야기, 마을 주민들이 옥바라지를 위해 왔다고 하면 빈방을 내어 주었다는 이야기처럼 이곳은 소소하지만 의미 있는 역사가 기록된 곳이다.
문 대통령이 이러한 역사의 가치를 되새기는 순간에도 이 옥바라지 골목에는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었다. ‘캐슬(castle)’이라는 으리으리한 이름으로 재개발 중인 이곳엔 현재 아파트 4개 동, 195세대가 들어섰다. 사유재산의 개발과 역사적 보존 사이에서의 가치판단 문제는 덮어두고서라도 그 과정은 매우 후진적이었다. 이곳의 역사성을 보존하고자 하는 일부 주민과 역사·시민단체들의 반대 의견을 잠재우기 위해 재개발사업조합은 결국 ‘용역’을 동원했다. 옥바라지 골목에서의 퇴거에 불응하던 주민들을 끌어내고 김구 선생 가족이 묵었던 마지막 여관에 침입해 집기를 들어내고 소화기를 분사하는 등 1980년대에나 볼 수 있었던 ‘강제퇴거’를 집행한 것이다.
△ 옥바라지 골목 철거 전 모습 (출처 : 내 손안의 서울)
‘옥바라지’라는 행위는 시대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거대한 ‘운동’은 아니다. 서대문 형무소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하려는 움직임이 있음에도 옥바라지 골목은 쉽고도 야만적으로 사라져 버린 점은 ‘역사’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한다. 독립운동을 한 가족이 수감되었을 때 뜻으로 지지했으나 마음은 무너져 내렸을 가족들의 일상사. 사소할 수 있지만 의미 있는 ‘일상의 역사’를 담은 공간을 다루는 우리의 손길은 너무 거칠었던 건 아닐까. 옥바라지라는 사소한 실천은 유명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처럼 ‘기록’될 순 없었지만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의 뜻을 세상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우리의 역사 중 일부분은 다르게 전개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99주년 3·1운동 기념사에서 문 대통령은 역대 기념사 중 가장 강력한 어조로 일본의 반성 없는 태도를 일갈했다. 하지만 2년 전 길 건너 옥바라지 골목에선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한 서린 공간이 용역들의 손에 뜯겨 나갔다. 종로구청은 ‘사유재산’을 핑계로 뒷짐을 졌다. 역사관과 행정 철학 모두 무너져 버린 현장, 어쩌면 일본이 반성할 또 하나의 근거를 우리 손으로 없애 버린 것은 아닐까. ‘공간’은 글로 기록할 수 없는 ‘현장’의 역사임을, 무디기만 한 우리의 행정가들이 기억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