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2018년 4월 이데일리에 기재된 글입니다.
△ 용산철도병원 (사진제공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영화 ‘1987’에서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을 당하던 중 사망하자 한 의사가 급히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불려오는 장면이 있다. 그는 당시 중앙대학교 용산병원 의사인 오연상 교수로, 영화에서는 박종철 열사에게 강심제까지 사용하며 살리려 애쓰는 장면이 묘사된다. 결국 박종철은 사망하고 이를 덮으려는 대공수사처의 움직임을 눈치챈 동아일보 윤상삼 기자는 오연상 교수가 일하는 병원 화장실에 숨어 공안 경찰의 감시를 받는 오 교수와 접촉해 그날의 진실을 듣게 된다.
극 중 오연상 교수가 근무하던 그곳이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이다. 중대병원 혹은 용산병원으로 불렸던 이곳은 사실 일제 강점기부터 존재해 온 병원이지만, 강제노역의 아픈 역사를 품고 있는 병원임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1900년대 초, 일제는 자원의 효율적인 수탈과 전쟁물자의 원활한 보급을 위해 조선에 철도망을 구축한다. 당시 남대문, 한강과 가까운 용산이 최적의 철도기지 입지로 낙점됐고 현 용산역 부지 인근에 대규모 철도기지가 세워진다.
△ 용산철도병원 사거리 (사진제공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이 철도기지의 신속한 건설을 위해 수많은 조선인이 강제로 징용된다. 일제강점기의 대부분 징용 현장이 그러했듯 열악한 환경과 터무니없는 임금, 그리고 부실한 배식은 수많은 조선인을 병들게 했다. ‘사람’이기 이전에 ‘노동단위’였던 당시의 징용 노동자들은 아플 권리조차도 없었는데, 일제는 병들고 다친 노동자들을 신속하게 철도기지 건설 현장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해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부지에 병원을 짓는다.
1928년 용산 철도병원은 ‘철도국 서울진료소’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세상에 태어났다. 이곳에서 치료받는 이들도, 치료하는 의사들도, 하나의 부품이자 이를 수리하는 자로서 끔찍한 시간을 보낸 셈이다. 2차대전이 끝나고 철도국은 한국철도공사(코레일)로, 서울진료소는 철도병원으로 간판을 바꿔 걸었다. 철도와 병원이라는 이곳의 근간은 잊혀지지 않는 역사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 용산철도병원 (사진제공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역사적 고통이 기록된 건축임에도 그 건축의 미적, 문화적 가치는 높게 평가되는 경우가 있다. 조선총독부가 그러했고 구 서울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용산 철도병원 또한 유려한 적벽돌의 곡선 벽체와 세장한 창문, 절제된 몰딩(moulding, 벽 상부에 띠처럼 댄 장식)과 아치형 캐노피 등 서양 고전 양식과 근대건축의 복합적인 특성을 한데 품고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또 개보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건물이라는 점도 가치를 더한다. 이에 2008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서울의 중심부인 용산에 아픈 역사를 보듬듯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는 철도병원 건물. 그런데 이 건물이 8년째 비워져 방치되고 있다. 2000년대 초까지 중앙대학교가 병원으로 사용하며 문화재로서의 보존 가치를 인정해 관리를 겸하고 있었는데 코레일이 2009년 부지 반환소송을 냈고 승소함으로써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으로서의 진료가 종료됐다. 이후 2011년 중대 용산병원은 폐업 신고를 했고 1928년부터 이어진 병원으로서의 굴곡진 역사는 마감됐다. 이후 용산은 개발 광풍을 맞았고 인근 땅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 가치에 매몰된 문화재의 가치는 코레일, 문화재청, 용산구 간의 책임 떠넘기기 판에서 진동하며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배, 강제노역, 1987년의 근대사, 그리고 ‘용산 시대’라 불렸던 국제업무단지개발까지 우리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받아준 건축물을 놓고 펼쳐진 욕망의 장(場)은 어제쯤 거두어질까. 엄격한 규제를 통해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는 지정문화재와 달리 용산 철도병원은 등록문화재다. 등록문화재는 너무 엄격한 기존 문화재 제도를 보완해 문화재를 보존하는 방법론을 다양화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다. 외관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한도 내에서 내부 수리를 허용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수용할 수 있게끔 유도한다.
점차 도시의 원형을 잃어가는 용산, 엄청난 규모의 마천루들로 채워져 가는 용산 개발의 틈바구니, 담쟁이덩굴 이불을 덮고 고고하게 버텨온 용산 철도병원이 ‘돈’의 욕망에서 벗어나길 바란다면 과욕일까. 그 목적이 무엇이었든 오래도록 사람의 아픈 곳을 치료해 온 이곳이, 언젠가는 시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문화 병원, 문화 휴식처로 활짝 열리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