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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번째 삼일절
유관순 학생이 다니던 이화여자고등학교
도시설계가 Archur
2016.03.01

- 본 글은 2016년 작성되었습니다-


 

올해는 삼일운동 97주년이다. 2019년이 되면 100주년이다. 당연히 정부는 100주년을 크게 기념하려 하고 있고 그 중 하나로 요새 Dil Kusha 복원 및 문화재 등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삼일운동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공간은 탑골공원이다. 그 외 독립운동이라는 확장을 통해 서대문형무소 등이 오늘 열의에 찬 학부모들로 인해 인산인해일 것 같다. 서울까지 올라오기 힘든 사람들은 충청도에 있는 독립기념관이나 천안에 있는 아우내장터를 찾을 것 같다.

삼일운동하면 아마도 유관순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학교 다닐때는 유관순 누나라는 친근한 호칭으로 불렀던 것 같은데 1902년생이시니 올해로 114세다. 이제 '누나'라는 호칭은 빼드려야 할 것 같다. '누나'를 대신할 호칭으로는 '열사(烈士)'다. 열사. 사전에는 '나라를 위하여 절의를 굳게 지키며 충성을 다하여 싸운 사람'이다. 왠지 전사적 Image가 떠오르는 단어다. 삼일운동 당시 유관순 열사의 나이는 18이었다. 가두시위에 참가하고 일본총독부가 학교휴교령으로 다니던 이화여고가 휴교에 들어가자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4월 1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됐고 이듬해인 1920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정동 영역을 X자로 가르는 덕수궁길, 정동길, 서소문로11길은 사실 가로와 그에 면하는 건물간의 관계 만을 놓고 보면 그렇게 친밀하지는 않다. 이 가로들은 덕수궁 궁역, 미대사관저 영역,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영역 등 각 영역의 Edge를 따라 간다. 그리고 그 영역들은 주변 가로와 직접 대응하기 보다는 정해진 입구를 통해서만 동선이 연결된다. 그래서 정동 영역내 가로를 따라서는 건물의 Forefront가 맞닿아 있지 않고 영역을 두르고 있는 담이 대응하고 있다. '덕수궁 돌담길'이라는 특징이 말해주듯 정동 영역내 가로에서 가장 특징적인 구간은 덕수궁 영역을 따라 만들어진 담 옆 길이다. 이런 면만 보면 정동 영역내 가로는 보행친화적인 가로가 되기위해 가장 중요한 요인인 가로변 건물과의 Permeable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셈이다. 그래서 정동 영역내 길은 그 자체가 긴 선형의 Open Space가 되어야 한다. 또한, 가로의 성격 자체도 동적이기 보다는 정적일 수 밖에 없다.

덕수궁 돌담길 외 정동 영역내 가로 중 돌담이 맞닿아 있는 구간이 또 있다. 정동 Rotary에서 정동길을 따라 정동사거리 방향으로 가면 정동제일감리교회 영역이 끝나는 부분부터 돌담이 나온다(위 사진). 길이는 대략 180m. 정동을 드나들기 시작한 2003년만 해도 이 돌담은 상부만 돌담으로 처리돼 있었고 하부는 콘크리트가 그대로 노출돼 있었다. 당시 누구의 영역이기에 저렇게 초라한 돌담으로 남아 있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완성된 돌담으로 바뀌어 있었다. 돌담 안쪽 영역은 이화여자고등학교다. 이화여고의 설립자는 Mary F.Scranton이다. 1885년 Henry G.Appenzeller가 두 번째로 조선에 들어왔을때 그의 정동 안착을 도운 인물이 William B.Scranton인데 그의 어머니다. William B.Scranton도 29세(1885년)에 조선으로 들어왔는데 당시 Mary F.Scranton의 나이는 53세였다. 그래서 그녀는 대부분 30대였던 미국 선교사들에게 대모와 같은 존재였다. 1885년 Mary F.Scranton이 정동에 들어온 후 20,000㎡에 달하는 배밭을 사들였다. 당시 배밭에는 18채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1886년 5월 31일, Mary F.Scranton은 자신의 거처에 한국 근대여성교육의 효시가 되는 여학교를 세웠다(정동32, 가로2.4m x 세로3.6m). 학교 설립당시 Mary F.Scranton은 '여성들로 하여금 우리 외국인들의 생활 양식, 의복 및 환경에 맞추어 지기를 바라는데 있지 않다. 우리는 다만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이 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우리는 한국이 한국적인 것에 대하여 긍지를 갖기 바라며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통하여 완전한 한국인이 될 것을 바란다'고 했단다. 이후 미국 Ork Park의 M.E.Blackstone부인이 공사비를 대주어 한옥교사를 세웠다(위 모형사진). 당시 건물의 규모는 길이27m, 너비24m의 ㄷ자 평면이었다. 내부에는 7~8개의 교실도 있었다고 한다(-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김정동-).

1886년 6월 8일 고종황제가 '배재학당'이라는 현판을 내린지 1년이 지난 1887년, 이번에는 명성황후가 배재학당의 여자학교 Version인 Mary F.Scranton이 설립한 여학교에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했다. '梨花'라는 교명을 사용한 이유는 Mary F.Scranton이 사들인 대지가 배밭이었고 또 그곳에 '이화정'이라는 건물이 있어서 한국의 여성들이 배꽃같이 순결하고 배맛같이 시원하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배재학당에서 첫 번째 학교시설이 지어진 시기보다 14년 늦은 1900년에 이화학당의 첫 번째 서양식 교사인 Main Hall이 준공됐다(위 사진). Main Hall을 짓기 위해 ㄷ자 평면의 한옥교사는 허물었다. Main Hall에는 교실 뿐만 아니라 기숙사, 강당도 있었다고 한다. Main Hall은 1950년 6.25전쟁때 피해를 입어 철거됐다. 1915년에는 현재 정동길에 면해 Simpson Hall(현 심손기념관)이 준공됐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16년에 유관순이 선교사의 소개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했다. 1918년에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Simpson Hall은 100년이 넘은 이화여고에서 그만큼의 시간의 켜를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근대건축물이자 유관순이 사용한 공간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공간이다.

 

심손기념관(Simpson Hall, 1915)과 이화학당의 옛 대문(1999 복원)              
Simpson Hall은 1915년 Sarah J.Simpson의 위탁금으로 지어졌다. 현재 건물은 동에서 서쪽으로 갈수록 길어지는 '├'자 형태 평면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불규칙한 평면을 띠게 된 이유는 1922년 건물 서편에 930㎡ 규모의 증축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현재 Simpson Hall의 규모는 연면적 2,113㎡로 B1~3F이다. 건물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요소는 세로로 긴 창 상부에 Arch형태 상인방과 화강석으로 된 Arch양쪽과 가운데 Keystone이다. 그리고 이 요소는 한 쌍의 창을 이루고 또 그 한 쌍의 창은 건물의 모든 입면에서 반복된다. 이 요소 때문에 Simpson Hall은 Pointed Arch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Gothic Style로 분류된다.

그런데 2003년 건물을 처음 봤을때는 이런 요소가 서쪽의 긴 Mass 부분(위 사진에서 오른쪽)에서만 발견될 뿐 동쪽 Mass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위 사진에서 왼쪽). 오히려 동쪽 Mass(위 사진에서 오른쪽)는 1960~1970년대 적벽돌로 만들어진 일반적인 학교건물처럼 보일 뿐이었다. 이유는 6.25전쟁때 폭격으로 무너져 내린 부분을 1961년에 원 모습과 상관없이 증축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2011년 10월 교내에 흩어져 있던 벽돌과 화강석으로 Simpson Hall을 원형 복원하는 작업을 했다. 현재 Simpson Hall은 학교 영역으로 연결되는 동쪽 입구 부분은 동아리실과 같은 학교 구성원들이 주로 이용하는 시설로 쓰고 동문으로 연결되는 서쪽 입구 부분은 이화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화박물관 내부에는 이화학당을 졸업한 많은 유명인 중 가장 유명한 유관순 기념 교실도 복원돼 있다(아래사진).

2003년 이곳을 처음 찾았을때 Simpson Hall 주변에 쳐져 있는 비계(Scaffold) 뿐만 아니라 그 북서쪽에 인접한 대지에 '이화100주년기념관 증축공사'를 위해 둘러싸 놓은 Fence로 인해 꽤 어수선했다. 하지만 그 어수선함 속에서도 전통양식으로 만들어놓은 작은 문 하나가 보였다. 옆에 설치된 표지판에 따르면 1999년에 '이화학당의 옛 대문으로 1923년경 이전 복원시 일본풍에 의해 교란되었던 것을 원래의 대들보, 상도리, 망와 일부를 사용하여 노후된 옛 정문을 복원'했다고 한다. 사찰에서 기둥을 한 줄로 배치한 문을 일주문(一柱門)이라 부르듯 전통방식으로 만들어진 문에도 양식이 있는 것 같다. 이화학당의 옛 정문이었던 이 문은 기둥이 네개 있다는 의미로 사주문(四柱門) 양식이라고 한다. 2003년만 해도 사주문은 철제 Fence 안쪽에 닫혀진 상태로, 문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는 않았다(아래사진). 그때 사주문은 문이라기 보다는 기념물에 가까웠다. 그러다 2004년 이화여고100주년 기념관이 완공되면서 비로소 사주문도 열렸다.

 

 

손탁호텔(Sontag Hotel) / A.I.Secredin Sabatin(1902)             
이화여고 동문 서쪽에 있는 이 땅(대지면적 600㎡)에는 1888년 조선에 들어온 D.L.Gifford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895년 Antoniette Sontag(1854~1925)에게 넘어갔다. Antoniette Sontag은 1885년 10월, 주한 러시아 공사로 부임한 Karl Waber를 따라 조선에 들어왔는데 Karl Waber의 처형이었다. France Alsace-Lorraine 지방 출신의 그녀는 궁내부와 러시아공사관의 연결책 역할을 했는데, 구체적으로 한러밀약을 추진하는 등 친러거청정책을 수립하는데 공헌을 했다. 1896년 아과파천 후 고종은 조선에 대한 일본과 청나라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 세력을 이용하려고 했는데, 그 과정에서 Sontag이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러한 역할에 대한 대가로 1895년 고종이 정동 29번지 소재 3,900㎡ 크기의 대지와 한옥 한 채를 그녀에게 하사했다. 손탁은 한옥의 Interior를 서양식으로 하여 서양외교사절들의 사교장으로 활용하였다.

손탁의 사저를 근거지로 활용한 정치단체가 외교관구락부와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Chongdong Club)였다. 외교관구락부는 말 그대로 서양인 외교관들의 친목단체였다. 정동구락부는 이노우에가 사실상 조선을 통치하기 시작한 1894년 12월 17일 직후 배일운동을 시작한 조선의 개화파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단체였다. 정동구락부의 목표는 일본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고 국왕 중심의 자주적 근대화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동구락부는 '존왕파'라 불리기도 했다. 또한, 이들의 배일운동이 주로 미국과 러시아의 협력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구미파', '노미파'로도 불렸다고 한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정동구락부는 '친미파'와 '친러파'로 나뉘어 있었다. 친미파는 주로 미국에서 유학하거나 미국공사관과 친분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완용, 박정양, 이하영, 이채연, 이상재, 정경원, 윤웅렬, 윤치호, 이윤용, 민상호, 현흥택 등)이었고 친러파는 러시아공사관과 친분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범진, 민영환, 이학균, 김홍륙 등)이었다.

1896년 아관파천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고자 고종은 1898년 3월 16일, 기존 한옥을 허물고 방 다섯개를 갖춘 서양식 건물을 손탁에게 지어주었다. 이번에도 손탁은 이 서양식 건물을 호텔식으로 개조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호텔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서울에는 변변한 숙박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손탁호텔에는 최고의 국빈들이 머물렀다. 객실 다섯개로는 제대로 된 호텔사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고종은 황실재정으로 새로운 건물을 지어주었다. 1902년 10월에 준공된 이 건물의 설계자가 A.I.Secredin Sabatin이다(시공자는 심의석). 두 번째로 지은 이 서양식 건물 1층에는 보통실과 식당, 다방이 있었고 2층에는 귀빈실이 있었다고 한다. 손탁호텔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역시 Sabatin이 비슷한 시기에 설계한 중명전(1901)과 비슷하게 벽면 전체를 이루는 Arch다. 물론 손탁호텔에서는 중명전과 같은 Balcony공간은 없다. 대신 좌우대칭 가운데 배치된 Porch에 Balcony를 만들었는데, 이 요소는 중면전과 손탁호텔이 유사하다.

흥미있는 사실은 이 호텔이 'Sontag Hotel'이라는 명칭을 정식적으로 사용한 1909년에는 이미 손탁이 이 건물을 France인 호텔경영업자 J.Boher에게 매각한 이후라는 점이다. J.Boher가 '손탁'이라는 Brand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만큼 그녀가 이 호텔을 잘 경영하고 좋은 Image를 이루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전에도 손탁호텔이라고 통용되기는 했지만 정식명칭은 '손탁양저', '손탁빈관', '한성빈관'이었다. 손탁호텔이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뒤로는 오히려 'Railway Hotel'이라 불렸다. 경인철도 경성정거장이 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서울은 깊다. 전우용-).

손탁이 이 호텔에서 떠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J.Boher가 매입한 뒤 1년이 지난 1910년에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서 였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J.Boher는 1917년 이 건물을 이화학당에 매각했다. 호텔이 학교시설로 사용되기 전 손탁호텔은 친일 미국인 Durham White Stevens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단다. 1904년 12월 대한제국 외부 고문에 임명된 Durham White Stevens는 적극적인 친일파로 을사늑약 체결 시 외부 인장을 일제에 넘겨준 인물이다. 결국 그는 1908년 3월 23일, 장인환, 전명운 의사에 의해 San Francisco-Oakland Ferry Terminal에서 사살 당했다(-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김정동-). 손탁호텔을 인수한 이화학당은 건물을 여학생기숙사로 사용했다. 그러다 1922년 손탁호텔을 허물고 그 자리에 Frey Hall을 새로 지었다.

 

프라이 홀(Frey Hall) / Cros(1923)             
손탁호텔을 허문 자리에 이화학원은 이화학당 4대 학당장이었던 Lulu E.Frey를 기념하기 위한 Frey Hall을 세웠다(위 사진). Frey Hall은 1922년 8월 착공하여 1923년 9월 준공됐다. 3층 높이 연면적 2,360㎡규모로 지어진 이 시설은 처음에는 이화대학교로 사용할 목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내부 Program도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와 더불어 교실10개, 실험실3개, 회의실, 식당 등으로 구성됐다. Frey Hall의 설계는 미국인 Cros가 했고 공사는 중국인 왕공온, 감독은 미국인 크로웨가 맡았다.

이화대학교는 Frey Hall 외에 정동길 건너편 현 예원학교 부지에 있었던 Frampton 사저를 1924년 개조하여 음악관으로 사용했다(위 사진). 이화학당은 1929년 분리한 이화여자보통학교를 폐지하고 1935년 전문학교를 대헌동 신촌교사로 이전시켰다. 이 전문학교가 현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이다. 이화대학교가 정동을 떠나면서 음악관은 서울외국인학교 시설 중 하나인 Annex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면서 손탁호텔 옆에 있던 2층 규모의 기존 Annex관은 헐렸다(-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김정동-).

 

이화여고100주년 기념관 / 이종호&Studio Metaa(2004)             
손탁호텔 자리에 지어진 Frey Hall은 1975년 화재로 소실됐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이화학당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고, 제7차 교육과정에 필요한 특별활동 교실과 같은 변화하는 교육과정을 수용할 수 있는 건축공간 확보를 위해 100주년 기념관을 짓는 결정을 내렸다. 대학교 건물도 아니고 고등학교 건물을 짓는 것임에도 정동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으로 인해 다섯개 건축사무소를 지명하는 지명초청설계경기로 설계자를 선정했다. 당시 설계경기에 초청된 건축사무소는 김원&광장건축, 이종호&Studio Metaa, 김석철&Archiban건축도시연구원, 정림건축 그리고 정주건축연구소였다. 설계경기 일정은 2002년 1월 24일 작품을 접수한 뒤 1월 28일 심사결과를 발표했다. 당선작은 이종호&Studio Metaa(이하 이종호), 우수작은 정주건축연구소의 안이 선정됐다. 학교 측은 앞서 언급한 목적 외 100주년 기념관이 일반시민들도 이용할 수 있는 Concert Hall이나 Exhibition Hall 그리고 식당 등도 갖추길 원했다. 사실 학교시설을 개방한다는 건 쉽지 않다. 학교가 있는 각 땅의 특성과 주변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의견일 수도 있지만 몇 년 전 시도한 학교 담장 허물기, 학교의 운동장을 개방하는 시도도 성공하지 못했다.

어찌됐든 일부이기는 하지만 학교시설을 일반에게 개방하겠다는 학교측의 결정을 설계자들은 안을 만들때 담아내야 했다. 또한, 이화여고 그리고 정동이라는 역사성을 어떤 식으로든 건축적으로 반영해야 하는 과제도 주어졌다. 사실 이러한 난제를 풀어야 했기에 지명초청설계경기라는 방식을 취한 것도 있었다. 당선작인 이종호&Studio Metaa안을 제외하고 나머지 안들부터 살펴보자. 우선 우수작으로 선정된 정주건축연구소의 안(아래 세 Modeling 사진 중 첫 번째 사진)이다. 전체적인 배치는 당선작과 유사하다. 다만 100주년기념관과 Simpson Hall 사이에 반개방된 마당의 공간을 당선작처럼 나누지 않고 하나의 공간으로 설계했다. 이 경우 공간이 커지고 무엇보다 그 공간을 둘러싼 건물들의 성격이 강해서 주위가 분산될 수 있다는 약점이 생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설계자는 마당의 영역을 한정시키려는 목적으로 이화여고 안쪽으로 ㅁ자 Frame을 설치했다. 마당 주변으로 Frame이 느껴지는 요소를 각 방향으로 배치해서 마당이 중심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두 번째 사진은 김원&광장건축의 안이다. 김원은 1996년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복원작업과 2002년 러시아 대사관 설계로 정동과는 인연이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김원은 일단 Frey Hall을 현대식으로 복원하여 교육시설로 활용하고 그와 대조적인 Image로 High-tech 공법으로 지어진 Gallery와 식당 건물을 북쪽에 배치했다. 그래서 복원된 Frey Hall과 High-tech한 건물은 ㄱ자로 배치된다. 김원은 이러한 배치를 두고 "대지의 크기는 요구된 면적에 비해 협소하므로, 전체를 세 개의 기능으로 나누어 Scale을 축소하고 비어있는 하나의 기념적 외부공간을 둘러싸는 고전적 형태로 배치한다. 이것은 기념적이며 동시에 기능적이다(-Words from 광장건축 in 건축과 환경 200203(211)-)."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김원의 안을 보면 복원된 Frey Hall 전면에 Pyramid 구조물이 연속적으로 두 개가 배치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Paris Louvre Museum Entrance(I.M.Pei, 1989)를 떠올리게 하는 이 구조물은 아마도 지하공간으로 자연광을 끌어들이는 천창일 듯 하다. 그런데 Pyramid라는 기하학이 너무 강하다. 김원의 배치는 복원된 Frey Hall과 신축건물이 오히려 Pyramid의 배경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또한, Pyramid Mass는 이 계획안 뿐만 아니라 러시아 대사관 초기 설계안에서도 반복해서 등장하는 보편적인 기하학이다.

마지막 사진은 김석철&Archiban건축의 안이다. Simpson Hall과 마주보고 있다는 것과 정동이라는 Context를 감안하여 정동길에 면한 부분은 박공지붕과 Dormer 등의 요소를 Design에 적용했다. 하지만 가운데 부분은 Dormer 형태만 적용시켰다. 전체적으로 Post-Modernism 느낌이 강하고 가운데 지붕 Mass는 확실히 과하다. 뭐 김석철 건축의 평생 화두인 원과 오행은 이 설계안에서도 등장한다. "본관과 Simpson Hall과 기념관이 중정을 중심으로 새로운 하나가 된 오행이 상생하는 건축복합체를 이루게 한다(-Words from Archiban건축 in 건축과 환경 200203(211)-)".

당선작인 이종호&Studio Metaa의 계획안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100주년 기념관과 Simpson Hall 사이에 있는 공간을 두 개의 영역으로 나눈데 있다. 나눠진 Open Space에서 Simpson Hall에 면한 부분은 이화여고 동문으로 연결되는 학생들의 등하교 동선을 집중적으로 처리하도록 하였고 저층부 Mass로 위요되는 100주년 기념관의 열린마당(아래사진)은 정동길과 연계하여 등학교 시간과는 별도로 정적인 Activity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하였다. 동문 주변의 Open space가 학생들이 주로 사용하는 영역이라면 열린마당은 100주년 기념관을 찾은 외부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영역이다. 또한 이 공간과 정동길을 연결하는 통로(문)로 과거 기념비처럼 놓여 있던 사주문을 활용하였다. 그래서 사주문의 Frame을 통해 열린마당을 보는 경관이 이 건물의 건립 목적을 한 장면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100주년기념관을 통하여 건축이 해야 할 일은 새롭되 낯설지 않은, 뿌리를 묻을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리고 이 곳에서 건축이 해야할 일은 장소에 얽혀있는 힘들을 구체화시켜 우리에게 다가올 삶을 기다리는 일이다. '장소'를 만들어 나가는 건축행위는 이 곳에 겹쳐있는 내력탐구를 씨줄로 삼고, 이곳에 깔려 있는 현상의 파악을 날줄로 삼아 짜낼 수 있는 무늬를 찾아나서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제 '장소'의 실천을 시작하는 것이다."

-Words from 이종호&Studio Metaa in 건축과 환경 200203(211)-

이화여고100주년 기념관 공사(공사기간 2003.1.12~2004.4.30)가 진행되면서 설계가 일부 변경됐다. 가장 먼저 규모가 증가했다. 현상설계당시 연면적 7,859㎡, B2~5F였는데, 연면적 9,213㎡, B3~5F으로 늘어났다. 무엇보다 외부마감이 변했다. 물론 현상설계 당시 제출된 Modeling에는 외부마감 표현이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당시 제안됐던 화강석, Color 복층유리 마감이 어떤 느낌일지는 잘 모르겠다. 다행인건 현재 지어진 입면의 처리가 꽤 잘 됐다는 점이다. 일단 정동이라는 Context에 맞추기 위해 전체적으로 사용된 재료는 붉은 벽돌로 조적 처리돼 있다. 하지만 Mass 바깥에 돌출되어서 정동길이나 Simpson Hall에 더 가까이 있는 입면과 뒤로 후퇴된 입면에 사용된 벽돌의 상태가 다르다. 전자는 주변 건축물, 주변 가로와 더 가까이 있기 때문에 더 어울려 보이도록 거친 면의 벽돌을 사용했다. 반면, 후자는 '그래도 이 건물이 새로 지어졌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매끈한 면의 벽돌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Zinc 소재를 삽입시켜 다른 느낌의 입면 사이에서 완충역할을 하도록 했다. 또한, 정동길과 마주하고 있는 동쪽 입면에 삽입된 철로 만들어진 Frame은 건물에 Detail을 더하면서 인접한 근대건축물들의 아기자기함에 대응될 수 있도록 했다(아래사진).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 김승회&강원필&경영위치(2007)          
정동길에 면한 이화여고 동문 일대가 이화여고의 영역이라면 통일로4길로 연결되는 서문 일대는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이하 이화외고, 대지면적 54,125㎡)의 영역이다. 이화외고는 1991년 이화학원이 설립인가를 받아 1992년 개교됐다. 앞서 언급한 시설들과 함께 이화여고 영역내에 있지만 정동길에 면한 동쪽이 아닌 서쪽에 치우쳐 있어 정동 영역으로는 잘 인식되지 않는다. 이화외고 교사는 1970년에 지어진 Scranton관으로 농협중앙회 남쪽에 인접해 있다. 그러다 2005.9~2007.8 사이에 경영위치 설계로 Vision관이 지어졌다(설계기간: 2004.5~2005.9). Vision관이 있던 자리는 Scranton관 뒷편으로 창고, 변전소, 화장실 등 잡다한 시설들이 있었다고 한다. 연면적 41,218㎡에 B2~3F 규모의 Vision관에는 식당과 도서관을 비롯해 이화여고에 필요한 새로운 Program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들어섰다.

Vision관의 평면은 동서로 긴 一자형 평면의 Scranton 북쪽에 대지 경계선을 따라 사다리꼴 형태다. 설계자 경영위치는 Vision관과 Scranton관 사이에 마당을 두고 그 아래 대규모 공간이 필요한 식당, 강당 등으로 이루어진 Program Plaza를 배치했다. 그리고 Program Plaza에서 시작해 순환형 Track을 따라 Program Band를 배치했다. 사실 이화외고 건물은 내부로 쉽게 들어가 볼 수 없다. 그래서 위에 언급된 경영위치의 설계 Comment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었다. 외부에서 Vision관을 봤을때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농협중앙회와 마주하고 있는 북쪽 입면이다. 이 입면에는 Color복층유리에 수평 Mullion을 따라 알록달록한 Aluminium Bar가 붙어 있다. 경영위치는 이러한 처리를 통해 여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라는 용도에 맞는 명랑한 정경을 만들고자 했단다. 또한, 내부의 Track을 거니는 학생들에게 Rhythm감과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배운다는 Metaphor가 되길 의도했다고 한다. 기능적으로는 주변 건물로부터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한 Louver 기능도 한다(-SPACE 200805-). 내가 봤을때는 이화외고가 면한 통일로4길에 Color감을 부여하는 역할이 더 크게 느껴진다. 경영위치는 이러한 Aluminium Bar를 이후 설계를 진행한 '롯데 부여Resort 백상원(2013)'입면에도 적용시켰다.



 

 

 

 

5각형 평면의 Block을 정동 영역으로 본다면 이화여고 영역은 정동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강북에 많은 학교들이 강남개발때 반강제적으로 이전됐지만 이화여고 만큼은 여전히 사대문의 끝자리에 남아있다. 이화여고가 정동에서 하는 역할은 생각보다 크다. 이화여고는 통일로와 새문안로에서 부터 밀려 들어오는 고층 Office건물의 흐름이 정동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으면서 강한 영역을 이루고 있다. 이런 역할이 이화여고가 정동에 남아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주말마다 산책하는 사람들로 정동이 아무리 붐벼도 여전히 정동에는 학생들의 재잘거림이 필요하다. 평일 정동의 활력은 그녀들이 채워주고 있다.

 

도시설계가 Archur

Archur가 해석하는 도시, 건축.
저서. <닮은 도시 다른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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