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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나라, 불국사(佛國寺)
527년 3월 11일, 신라의 불교 공인
도시설계가 Archur
2016.03.11

 

오늘(3월 11일)은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날이다. 1489년 전인 527년 법흥왕은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국교로 정했다. 신라의 불교 공인 전 고구려(372년)와 백제(384년)의 불교 공인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신라는 무속신앙이 뿌리깊게 박혀 있어서 불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웠다. 하지만 법흥왕 뿐만 아니라 신라 귀족들에게도 불교 공인은 현실적으로 이득이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특권을 정당화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법흥왕은 순교한 이차돈을 기리기 위해 경주시 동천동에 백률사를 건립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신라시대 사찰은 불국사다. '불국사(佛國寺)'. 단어 그대로 '부처의 나라'다. 부처의 나라는 이상적인 세계다. 본 글과 함께 지난 달 전진석 님께서 올리신 '한국 불교사찰의 위계질서'를 함께 읽으면 더 흥미로울 것 같다.

 

이상적인 형태를 통한 이상향, 佛國土를 꿈꾸다.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바램은 대게 이상적인 형태의 공간을 만드는 걸로 표출된다. 그래서 이 두가지가 종종 혼동되어 사용되는데, 이는 이상적인 세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상적인 세계가 지향하는 세계관이나 Diagram이 현실의 조건과는 상관없이 구현되는 것이 지상세계에서 이상세계를 구현하는 방법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석굴암과 함께 토함산 자락에 위치한 불국사(佛國寺)는 산자락이라는 현실적인 제약조건에도 불구하고 마치 평지에 배치된 가람처럼 각 영역을 구획하는 회랑이 동서남북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구획돼 있다. 크게 4개의 직사각형 회랑으로 구획된 불국사는 각 회랑 안에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 관음전이 한 가운데 배치되어 각 사찰이 모시는 대상과 의미를 독립적으로 영역화한 종합가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국사는 사람들이 사는 땅위에 부처님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신라인들의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그 자체로 삼국을 통일한 신라인들의 자신감이다. 그래서 이름도 불국토들이 한군데 모여 하나의 나라를 이룬다는 교리적 의미에서 유래됐다. 지상세계에 구현된 이상세계이기 때문에 당연히 불국사를 구성하는 각 사찰과 탑의 배치는 불교의 교리를 완벽히 구현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불국사는 서양의 Renaissance나 Baroque양식의 도시처럼 정확한 대칭이나 엄격한 기하학을 이루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불국사 사찰의 배치와 구성은 비대칭적이고 비질서적이다.

"인도에서 발생한 초기 불교는 석가여래만이 유일한 부처였고, 남쪽으로 전파된 소승불교에서도 여전히 석가불만이 유일불이 된다. 반면 북쪽으로 전파된 대승불교는 중앙아시아의 긴 여로를 거치면서 수많은 부처와 보살의 존재를 믿게 되어 심지어 삼천불 사상까지 생겨나게 된다. 이렇게 많은 부처들은 각기 고유한 우주인 불국토를 갖는다는 '1불 1국토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이들을 모신 가람은 별도의 영역을 형성하며, 서로 다른 불국토들이 독립되어야만 한다. 하나의 건축 영역은 해당부처의 우주를 뜻하며, 하나의 우주에 둘 이상의 부처가 주인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불국사는 동쪽에 석가여래의 대웅전영역이, 서쪽에는 아미타여래의 극락전 영역이 회랑들로 둘러싸인 별도 영역으로 형성되어 있다."

 -불교건축, 김봉렬-

 

대웅전(大雄殿)영역             
대웅전 영역은 불국사를 구성하는 4개의 영역 중 가장 핵심 영역으로 무설전(無設殿)과 대웅전 그리고 자하문(紫霞門)이 북에서 남쪽으로 일직선 축 상에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석가탑과 다보탑이 통일신라시대에 최절정을 이뤘던 쌍탑식 가람배치 원칙에 따라 대웅전 앞에 동서로 축에서 빗겨나 있다. 영역은 회랑이 한정시켜주고 있으며, 회랑 남쪽에는 영역으로 진입하는 주 출입구인 자하문과 그 동쪽과 서쪽에 좌경루(左經樓)와 범영루(泛影樓)가 놓여 있다.

영역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무설전(無設殿)은 정면 8칸으로 불국사내 경전 중 가장 크다(아래사진). 특이한 건 수많은 설법이 이루어졌을 것 같은 전당의 이름이 '無設殿'이다. '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허균'라는 책에 의하면 이는 부처님이 불법을 설한 뒤에 "나는 불법을 설한바가 없다"고 항상 말씀하신데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이는 말이라는 방편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현재는 대웅전 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좌경루 동쪽으로 만들어진 경사로를 따라 다보탑 동쪽으로 미안하듯 들어서야 한다. 그러나 축성 당시에는 주 축선상에 놓여진 백운교(白雲橋)와 청운교(靑雲橋)를 통해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청운교(하 17단)와 백운교(상 16단)는 두계단이 합쳐서 33계단을 이루는데, 33이라는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33가지의 단계를 상징한다. 또한 청운교는 푸른 청년의 모습을, 백운교는 흰머리 노인의 모습을 상징하여 한 사람의 인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보탑(多寶塔)과 석가탑(釋迦塔)             
흔히 불교건축을 얘기할때 '가람'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한다. 이 말은 산크리스트어인 Samgharama의 한역인 '승가람마'에서 왔다고 한다. 처음 이 말은 원래 출가자들이 공동으로 생활할 수 있는 장소 등의 공간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현재에 와서는 사찰의 토지와 건축물 모두를 포함하는 총칭이 되었다. 석가모니가 생존했을 당시 가람은 고정된 구조물이 아니었다. 당시 가람은 석가의 설법을 듣기 위해 군중이 모이고 제자들이 모이는 장소라면 어디든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종교적 구심점과 출가한 스님들이 집단적으로 모이고 생활할 공간이 필요해지면서 특정공간에 대한 필요가 생겼다. 이에 따라 출현한 불교적 상징물이 바로 'Stupa'다. Stupa는 부처의 사리탑 또는 분묘를 의미했다. 하지만 Stupa의 수가 많아질 필요가 생기면서 부처의 사리탑이나 분묘를 상징하는 Stupa는 탑의 형태로 바뀌었다.

탑의 상징성으로 인해 탑은 초기 가람배치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그래서 초기 가람배치는 1탑을 중심으로 금당과 강당 그리고 중문을 하나의 축으로 배치하고 회랑을 두르는 '1탑식 가람배치'였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에는 이 배치가 주류였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인 7~8세기에는 탑을 두개 세우는 '쌍탑식 가람배치'로 바뀌었다. 이렇게 탑이 두개가 됨으로서 탑은 금당 좌우로 분산되게 되고 그 결과 탑보다는 금당이 가람배치의 중심이 되었다.

초기에는 탑을 두개 세운다고 해서 그 형태나 모습을 달리하지 않고 같은 모양의 탑을 세웠다. 아무래도 다른 두개의 탑을 배치해서 대조를 이루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모험수 보다는 같은 모양의 탑을 배치함으로서 최소한 좌우대칭의 미는 살리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두개의 탑이 다른 형태로 건립된 시기는 8c중반이었다. 그리고 다보탑과 석가탑은 쌍탑식 가람배치의 최절정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불국사 대웅전 영역 가운데 배치된 석가탑과 다보탑은 한 눈에도 구별되는 형태상의 대조로 인해 국사와 미술시험 문제로 자주 출제됐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지금도 이 두개 탑을 헷갈리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대웅전 영역 동쪽에 배치된 다보탑은 높이 10.4m로 '돌로 어떻게 저런 탑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화려하다. 불국사 곳곳에는 목조건축에서나 볼만한 건축부재의 구성이 석재로 만들어진 부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다보탑도 그런 부분 중 하나다. 하지만 이런 관점으로 단순히 다보탑을 해석하는건 엄연히 한계가 있다. 형태적으로 다보탑의 기단부와 1층은 사각형, 2층은 팔각, 옥개석 위의 상륜부는 원형이다.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자 사바세계에서 원융세계로 이행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반면, 대웅전 영역 서쪽에 배치된 석가탑은 높이 8.2m로 한 눈에 봐도 그 모습이 수수하다. 그렇지만 그런 수수한 면들이 취하고 있는 비례는 완벽에 가깝다. 혹자는 이 두 탑이 법화경을 설법하는 석가여래와 그것이 진리임을 증명하는 다보여래와의 만남을 묘사한 것이라고도 한다. 두개의 탑 역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극락전(極樂殿), 비로전(毘盧殿), 관음전(觀音殿) 영역             
서방정토를 주관하는 부처인 아미타불(毘盧舍那佛)이 모셔진 극락전 영역은 대웅전 영역 서쪽에 대웅전 영역보다 백운교 높이 만큼 아래에 위치해 있다. 이 영역은 극락전과 안양문(安養門) 그리고 영역으로 들어오기 위한 연화교(蓮花橋)와 칠보교(七寶橋)가 남북축에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극락전 영역으로 들어오는 안양문에서 '안양(安養)'은 극락세계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동아미타불이 모셔진 극락전 영역은 결국 지상세계에 만들어진 서방정토, 즉 또 다른 극락세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 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해 밟고 올라와야 하는 연화교(아래 10단)와 칠보교(상 8단)는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음을 이룬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인 셈이다.

대웅전 영역과 극락전 영역 북쪽에 위치한 비로전 영역은 남쪽의 두 영역과는 수직적으로 단차를 형성하고 있으며, 동시에 대웅전 영역을 관통하는 남북 축의 축선상에서도 빗겨나 있다. 그래서 대웅전 영역과는 구별되는 영역임을 알 수 있다. 비로전에 모셔진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은 수많은 불보살들의 궁극적인 실체이자 통합체로 비로전 영역은 화엄경에 근거한 연화장 세계를 형상화한 곳이다.

비로전 동쪽에 위치한 관음전 영역은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당으로 불국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그래서 무설전에서 관음전 영역으로 들어오는 계단 앞에 서면 대웅전 영역을 한정시켜주는 회랑들과 고래등 같은 무설전 지붕간의 관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상부와 하부가 다른 불국사             
불국사는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인 경덕왕 751년 공사를 시작하여 혜공왕 10년인 774년에 완성됐다. 물론 불국사 창건에 대한 설 중 하나다. 어떤 기원이 됐든 현재 우리가 보는 불국사의 요소중 창건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청운교, 백운교, 칠보교, 연화교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대석단, 범영루를 받친 석주와 석축, 각 건물의 기단과 다보탑, 석가탑 등이다. 결국 불국사에서 석조로 된 부분만 창건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고 목조로 된 각 전당들이나 회랑은 조선시대 중창되거나 1970년대 다시 복원된 것들이다.


조선시대 중창때도 그랬겠지만 1970년대 복원사업을 벌일때도 신라시대에 세워진 양식과 형태대로 전당이나 회랑을 복원하지 못했다. 그래서 극락전 영역의 출입구인 안양문은 고려시대 양식으로 복원되기도 했다. 아마도 창건당시의 모습을 세밀하게 기록한 문서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현재 불국사 전당의 대부분은 하부구조와 상부구조가 시기적으로나 양식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모순된 모습을 하고 있는 셈이다. 대웅전 영역과 극락전 영역을 바치고 있는 석단의 모습을 보면 목조건축의 형태를 석조로 치환하는 변조법을 보여준다. 그들은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다루기 힘든 부재인 석재로 구현해 냈다.

 

도시설계가 Archur

Archur가 해석하는 도시, 건축.
저서. <닮은 도시 다른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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