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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불수호통상조약 체결 130주년(1886년 6월 4일)
약현성당(중림동 성당, 1892)과 舊 프랑스공사관(1896)
도시설계가 Archur
2016.06.01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은 각국과 수호통상조약(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며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한다. 1882년 5월 22일 조미(美)수호통상조약에 이어 같은해 독일, 1883년 영국, 1884년 러시아, 이탈리아, 청국 그리고 1886년에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했다(위 사진). 이 중 프랑스와 맺은 조불수호통상조약은 천주교라는 종교적 측면이 더해져 있었기 때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첫 번째 천주교 세례자는 이승훈으로 1784년 북경에서 받았다. 이승훈은 이벽, 김범우 등에게 전교를 했다. 이후 본질에 가까운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도입됐다. 천주를 만유 위에 받들고, 그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천주교는 당시 조선이 지니고 있었던 유교사회의 윤리, 가부장적 봉건제도와 충돌될 수 밖에 없었다. 공존할 수 없는 양쪽에서 더 완강했던 힘은 당시 기득권층이었던 유교사회였다. 결국 1791년(정조15년)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해박해가 일어났다. 그리고 10년 뒤인 1801년 황사영 벽서 사건을 발각돼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당시 상황을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 김훈의 '흑산'이다. 

 

"대비(정순왕후)의 자교는 팔도의 관아에 전해졌다. 방울 세 개를 매단 기발이 네 방면으로 나뉘어 밤을 새워 달렸고 역참의 파발들은 더 깊은 산간 마을로 달려갔다. …(중략)… 대비에게는 대비가 믿는 진실이 있었다. 이 세상에 말을 붙이고 세상과 말을 섞는다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이었다. 무너져야 할 것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가장 큰 무서움이었다. 썩은 것들이 오히려 강력하고 완강했다. 황사영은 그 완강함이 무서웠다. 대비 자교의 다급한 어조는 그 벼랑 끝에서 완강했다."

-흑산, 김훈-

 


초기 포르투갈 선교사의 영향 아래 있던 북경교구가 조선 포교를 맡고 있었다. 하지만 북경교구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 30여년간 한 명의 선교사도 조선으로 파견하지 않았다. 결국 교황청은 한국 교회를 북경교구에서 독립시켜 1831년 조선대목구를 설정했다. 그리고 Macau관구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포교를 맡았다. Macau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는 1845년 조선 최초의 사제가 김대건 신부가 15세때 Pierre Maubant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돼 간 곳이기도 하다. 김대건에게 신학을 비롯해 여러 서양학문과 언어를 가르쳐준 사람은 M.Callery신부였다(위 사진은 Macau를 대표하는 St.Paul성당의 입면, 1627).

 


파리외방전교회는 1653년 로마 교황청에 의해 프랑스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창설됐다. 조선에서의 천주교 활동은 활발해졌고 현실의 삶이 고됐던 백성들은 천주교에 더 많이 기댔다. 당연히 그럴수록 조선 정부의 박해는 심해졌다. 천주교를 대상으로 한 세 번째 박해인 기해박해가 1839년에 일어났고 1866년 병인박해에서 정점에 달했다(위 사진은 병인박해때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목이 잘린 절두산순교기념성당). 이 문제가 조선과 프랑스 간의 수호통상조약 체결을 늦춘 이유였다. 실제 프랑스는 1882년에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프랑스가 요구한 자유로운 천주교 선교활동을 조선이 보장하지 않았다. 1886년 5월 프랑스는 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F.G.Cogordan을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서울에 파견했다. 그리고 1886년 6월 4일 조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올해는 조약체결 130주년이 되는 해다.

 


프랑스와의 수호통상조약 체결시 가장 큰 Issue였던 천주교 선교활동 보장은 사실 조선정부의 공인여부에 관한 문제였을 뿐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1882년) 이후 암묵적인 보장은 받은 상태였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1882년 제7대 조선교구장이었던 Marie Jean Gustave Blanc주교(위에서 왼쪽)가 現 명동성당 부지를 매입했다. 하지만 바로 서양식 성당을 짓지 못했고 결국 1892년 5월 8일이 되어서야 정초식을 가질 수 있었다. 설계와 공사감독은 Eugene Coste신부(위에서 오른쪽)가 맡았다. 부지 매입 후 성당 착공까지 1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라는 'Be the First'라는 지위는 약현성당(중림동성당)이 가지고 갔다. 약현성당은 1891년 명동성당으로부터 분리됐다. 그리고 그해 10월 서양식 벽돌 성당 정초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1892년 12월 2일 공사가 마무리 됐다. 아래사진은 준공쯤에 모습을 보여준다. 공식적인 성당의 강복식은 1893년 9월 25일에 있었기 때문에 성당의 준공년을 1893년으로 보기도 한다. 약현성당이 명동성당에 비해 더 빨리 완공될 수 있었던 이유는 명동성당과 달리 사대문 밖에 있었다는 입지적 특성과 약현성당이 내려다 보는 곳(現 서소문공원)이 44명의 순교자가 나온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지'였다는 점 등이 있었다.

 


약현성당의 시작에도 명동성당과 마찬가지로 Marie Jean Gustave Blanc주교가 있었다. Blanc주교는 1887년 한옥에서 교리강습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Doucet(한국명 정가밀로)신부가 대지를 매입했다. 당시 '수렛골'이라 불렸던 이 일대에서 성당이 앉혀질 언덕에는 특히 약초가 많아 '약전현'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 지명이 '약현성당' 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됐다. 하지만 이는 성당 건립을 위한 부지 매입의 Site Positioning을 결정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요소였다. 이보다는 대지를 매입한 Doucet 신부는 성당이 내려다보는 곳에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인박해(1866)를 거치면서 44명의 순교자가 배출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지'가 있었다는걸 가장 크게 염두해 두었다. 그곳에서 처형된 순교자들 대부분은 이름 없는 평신도였다.

 


약현성당은 언덕 위에 올려진 대부분의 성당이 그렇듯 원거리에서는 한눈에 보이고 접근하면서 사라졌다 다다랐을때 격정적으로 나타나는 경관상의 변화를 가지고 있다. 약현성당으로의 접근은 중림동 동쪽을 지나는, 약현성당과 남대문을 잇는 칠패로에서 시작된다(위 사진). 그리고 칠패로과 청파로가 T자로 만나는 중림동삼거리에서 성당이 앉혀진 언덕으로 오르는 오르막이 시작된다. 성당 첨탑방향으로 향하다 북쪽으로 살짝 꺽이는 길을 따라 언덕으로 오르면 성당의 첨탑만 얼핏 은행나무 사이로 보일뿐 본당 Mass는 잘 보이지 않는다(아래사진). 게다가 이 접근로는 성당을 통과한 지점에서 언덕 정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관찰자는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90도를 틀어야 비로소 성당의 본 Mass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때 마주하게 되는 장면이 성당의 Facade가 아닌 Apse의 일부분이어서 격정적이지는 않다(아래x2사진).

 



성당으로 접근하면서 계속적으로 보이는 22m 높이의 8각뿔 첨탑은 1905년 기존 합각지붕을 대신하여 종과 함께 세웠다. 이때 약현성당에서 유일하게 발견되는 회색벽돌이 첨탑지붕 바로 아래 추가됐다. 이 외에도 성당은 1921년에 내부 벽돌기둥을 돌기둥으로 교체함과 동시에 좌우에 Transept를 덧붙였는데 이로써 Latin Cross평면으로 바뀌게 됐다. 그런데 이때 부가된 Transept의 높이가 성당 전체적인 지붕선보다 아래 있음으로 인해 이 부분의 지붕은 이중으로 층져 있다(아래사진에서 오른쪽).

 


약현성당의 설계는 명동성당과 답동성당 설계를 맡았던 Eugene Coste 신부가 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공사감독을 진행한 Doucet 신부는 Coste 신부 외에도 A.I.Secredin Sabatin의 자문도 받았다고 한다. 1898년 명동성당이 완공되기 전까지 약현성당은 일시적으로 주교좌성당의 역할도 했다. 1974년 성당은 대대적인 해체 공사를 거쳤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시절은 문화재 복원을 순수한 목적으로 진행하지 않았기에 명확한 인식없이 복원공사가 실시됐다. 결국 약현성당 복원공사는 복원이 아닌 원형 훼손이었다. 그리고 이는 1998년 2월 화재 이후 복원작업때 복원시점을 정하는데 있어 1974년 복원이후 Version이냐 아니면 1974년 복원이전 Version이냐를 두고 논쟁을 낳게 했다(-약현성당의 복원계획, 김정신 in 한국역사학회지 v7n1 1998.3-).

 

 

 

약현성당이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 되면서 이후 우리나라에 지어지는 서양식 성당의 Model이 됐다. 약현성당이 취한 양식은 Gothic이었다. 그런데 사실 Gothic은 Flying Buttress나 Rib Vault 같은 구조방식을 통해 높은 천정고와 하중으로부터 벗어난 벽체에 만들어지는 수직으로 난 긴 창 등이 특징인데 이런 특징을 적벽돌로 구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초기 성당들이 Gothic양식을 택한 이유는 뭘까? 일단 19세기 Europe에서 유행한 낭만주의는 카톨릭교회의 권위를 회복시켜줌과 동시에 교회건축의 이상으로 Gothic양식을 부활시켰다. 조선 포교의 책임을 맡고 있었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혹독한 박해 끝에 획득한 신앙의 승리를 Gothic양식을 통해 증거하고자 했다. 문제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대부분 프랑스 농촌출신이어서 대도시에 우뚝 서 있는 Gothic양식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지 못했고 이를 받아들였던 한국신자들도 뾰족탑, 둥근 궁륭천장, 열주 등과 같은 형태적인 부분을 구원의 통로, 하늘에 이르는 문과 같은 상징으로 받아들였다는데 있다. 시공측면에서도 성당을 건설한 중국인 기술자들은 중국에서 했던 방식대로 한국에서 했을테고 결국 Gothic의 본질이 아닌 중국식으로 변형된 Gohic양식으로 성당이 지어질 수 밖에 없었다. 약현성당도 순수한 Gothic양식이 아닌 Romanesque양식이 혼합돼 있다. 아래사진은 약현성당 내부모습이고 아래x2사진은 프랑스 Lyon에 Gothic양식으로 지어진 Cathedrale Saint Jean Baptiste de Lyon(1476)의 내부사진이다.

 



종교적 활동 외 조약체결 이후 프랑스 정부의 조치는 1887년 5월, 프랑스 전권특사 V.Colinde Plancy가 양국간 조약에 대한 비준서를 교환하면서 본격화 됐다. 그리고 1888년 6월 6일 프랑스공사관이 최초로 개설됐다. 첫 번째 프랑스공사관은 종로구 관수동 126번지에 있는 한옥집이었다. 이후 1889년 10월 1일에 정동으로 터를 옮겼다. 하지만 공사관 건물을 바로 짓지는 않았고 7년이 지난 1896년에 V.Colinde Plancy가 서울에 복귀하면서 그의 주도하에 공사관건물이 지어졌다. 舊 프랑스공사관의 위치(정동길 22)는 現 창덕여자중학교 부지로 캐나다대사관 맞은편에 살짝 경사진 길(아래 Daum 로드뷰) 끝에 있었다. 舊 프랑스공사관의 설계자에 대해 명확히 밝히고 있는 문서는 없지만 당시 프랑스 출신의 건축가 Joseph Auguste Salebelle가 조선정부에 초빙되어 궁중건축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했을대 그의 작품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건립시기에 대해서는 1895년과 1896년 설이 있는데, 현재 창덕여자중학교 내에 있는 정초석에 새겨진 'RF1896'을 근거로 1896년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당시 대부분의 서양식 건물이 그렇듯 舊 프랑스공사관도 붉은 벽돌 조적조로 지어졌다. 하지만 프랑스 자국의 Image를 드러내고자 화려한 French Renaissance Style을 취했다. 공사관 건물은 연면적 1,372㎡ 규모로 B1~2F이었고 북쪽에 26.32m(5F) 높이의 탑이 있었다. 완공과 동시에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등극(?)했다는 舊 프랑스공사관은 인접한 舊 러시아공사관의 탑(15.5m)과 더불어 당시 한양의 수직적 Accent였다.

 


舊 프랑스공사관에서 특이한 점은 남측면(위 사진에서 왼쪽)과 탑이 삽입돼 있는 동측면(위 사진에서 오른쪽, 아래사진)이 각각 정면성을 갖도록 설계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입면이 Facade라고 말하기 힘들다. 우선 남측면(위 사진에서 왼쪽 입면)은 가운데가 넓은 3bay로 양끝에 입면 보다 돌출시켜 마치 탑처럼 보이는 부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1, 2층에 각 4개씩 연속된 Arch를 두었다. 그런데 대칭적으로 만들어진 Facade에서 1층 Balcony로 오르는 계단이 한쪽으로 치우쳐 설치돼 있다(위 사진 왼쪽 아래). 이 계단이 남측면의 대칭성을 깬다. 만약 계단을 중앙에 두려 했다면 입면의 Arch는 짝수가 아닌 홀수개로 설계됐어야 했다. 반면, 탑이 삽입돼 있는 입면(위 사진에서 오른쪽, 아래사진)은 비대칭이지만 주 출입구가 가운데 있다. 더군다나 출입구에는 계단과 Porch도 설치돼 있다. 출입구를 중심으로 양쪽에 탑(아래사진에서 오른쪽)과 입면이 돌출된 부분(아래사진에서 왼쪽)이 비대칭이지만 적절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舊 프랑스공사관이 이렇게 설계된 이유는 아마도 건물로 진입하는 동선이 남쪽이 아닌 북동쪽이라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인 것 같다. 즉, 현재 정동길에서 프랑스공사관으로 접근했을 때는 동측면(아래사진)이 보이고 정동길을 따라 서대문으로 걸어올 때는 남측면이 보인다는 상황을 감안했기 때문인 것 같다(아래x2사진). 연속된 Arch로 만들어진 Balcony공간을 일조량이 많은 남쪽에 배치한 것도 이유일 수 있다.

 



프랑스는 공사관 건물을 20년도 쓰지 못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영사관으로 격하됐고 외교진영이 완전히 축소개편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될 쯤 프랑스영사관은 마포구 합동(現 프랑스대사관 자리)으로 이전했다. 한국과 프랑스간 정식 국교가 다시 수립된 시기는 1949년 2월이었다. 더이상 프랑스공사관으로 사용되지 못했던 공사관 부지에는 1914년 서대문소학교가 건립됐다. 공사관 건물은 학교 운동장 한 가운데에 우두커니 남겨져 있었다. 이후 총독부 산하기관이 건물을 사용하다 1935년 총독부에 의해 철거됐다. 공사관 부지에 세워진 서대문소학교는 1973년 폐교됐다. 그리고 그해 종로구 재동에 있던 창덕여자중학교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몇 년전 창덕여중이 학교건물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舊 프랑스공사관의 지하실 유구(위 사진)와 서울성곽의 기단부가 일부 발굴됐다(관련신문기사 '학교 신축터 파보니 구한말 프랑스 공사관터', 한겨레 뉴스, 2010.10.20). 발견된 유구에 따르면 舊 프랑스공사관은 현재 창덕여중 학교건물 남쪽에 가로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창덕여중은 유구 발굴 이후 신축교사 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서울특별시교육청 Homepage 제안공고를 보면 신축될 창덕여중 미래학교 구축공사 설계자로 '한마루건축사사무소'라고 나온다. 한마루건축 Homepage에서는 설계안을 볼 수 없다.

 


현재 프랑스가 대사관 및 관저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은 1959년 김중업이 설계한 작품으로 건축가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근대건축을 대표하는 수작이다(1962년 준공). 그런데 작년(2015년) 프랑스 정부는 이 건물을 헐고 삼성동, 남대문, 서소문동에 떨어져 있는 상무관, 문화원, 관광청 등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새로운 대사관 건물 신축을 위한 현상설계를 실시했다. 디지털 타임스 2015년 8월 16일자 기사('주한프랑스대사관 건축물 53년만에 사라지나')에 따르면 프랑스 정부에서 발표한 현상설계 공고문에는 대사관저에 대해서는 보존할 수 있다는 단서가 달려있기는 하다고 한다. 주한프랑스대사관 측은 정부에서 추진하는 일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답변은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후 관련하여 언론에 공개된 내용은 없다.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건축계에서 주목해야 하는 사안이다. 프랑스와의 수호통상조약은 천주교라는 정신적 신념으로 인해 다른 어떤 나라보다 의미가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대사관 준공 후 김중업에게 국가공로훈장과 슈발리에라는 칭호도 주었다. 김중업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근대건축가 Le Corbusier의 한국인 제자라는 관계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외교관계 그 이상의 관계가 양국간에 있음을 확인시키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그 이상의 관계를 이제 프랑스대사관 신축 문제를 두고 프랑스 정부가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으면 좋겠다.

 

 

도시설계가 Archur

Archur가 해석하는 도시, 건축.
저서. <닮은 도시 다른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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