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대한민국 국민들은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는 6월을 깊은 무거움 속에서 맞는다. 6월이 '호국보훈의 달'이기 때문이다. 사전적 의미로 '호국(護國)'은 '나라를 보호하고 지킴'이고 '보훈(報勳)'은 '공훈에 보답함'이다. 합치면 '나라를 보호하고 지킨 공훈에 보답하다'가 된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현충일(6일)과 한국전쟁(25일) 그리고 2002년 제2연평해전(29일)이 모두 6월에 일어났다. 그래서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한국전쟁과 제2연평해전 추모일은 사건이 발발한 날짜다.
그럼 현충일은 왜 6월 6일일까?
국가보훈처 Blog에 나온 현충일의 유래를 인용해보면 망종(芒種)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망종은 24절기 중 아홉 번째 절기로 '벼, 보리 같이 수염이 있는 까끄라기 곡식의 종자를 뿌려야 할 적당한 시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즉, 이 시기에 모내기와 보리베기를 해야 한다. 예부터 국가를 지킨 영웅들에 대한 예를 갖추는 일을 망종에 진행했다는 것이 국가보훈처 Blog의 설명이다. 고려 현종 때에는 조정에서 장병들의 뼈를 그들의 집으로 가져가 제사를 지내도록 했고 조선시대에는 6월 6일에 병사들의 유해를 매장했다는 전통도 강조한다.
6월 6일이 현충기념일로 제정된 시기는 1956년 4월 19일로 대통령령 제1145호('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개정을 통해서였다. 1975년 1월 27일에는 대통령령으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어 현충기념일이 현충일로 공식 개칭됐고 1982년 5월 15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여 정부기념일로 제정되었다. 그런데 이런 흐름에서 중요한 변화가 1965년 3월 30일에 있었다. 바로 순국선열의 묘를 국군묘지로 옮겨 오면서 대통령령 제2092호로 국군묘지를 국립묘지로 승격했다. 애초 현충기념일 제정 당시 추모 대상은 한국전쟁 전사자였다. 하지만 그들이 묻혀 있던 국군묘지에 순국선열의 묘가 들어서면서 현충기념일에 국립묘지내 전몰장병들만 추모하기 어렵게 됐고 결국 현충기념일의 추모 대상이 전몰장병에서 순국선열까지 확대됐다.
그럼 순국선열의 묘는 왜 국군묘지에 포함된 것일까? 이 일이 1965년에 있었다는 시점에 주목하면 답이 나온다. 바로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권력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순국선열의 묘를 군국묘지에 포함시켰다. 그런데 이렇게 되다 보니 친일세력과 순국선열들이 국립묘지에 함께 묻히는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됐다. 어떤 독립운동가는 이런 상황이 개탄스러워 현충원이 아닌 효창공원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아무리 역사를 쿨하게 받아들이더라도 집고 넘어갈건 집고 넘어가야 한다.
집고 넘어가야할 걸 집고 넘어가지 않아 모호한 공간이 또 있다.
바로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이다.
흥미있는건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현충원 만큼이나 주목받는 장소가 용산전쟁기념관이다. 전쟁 장면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날아드는 총알은 아랑곳하지 않고 적을 조준해서 총을 쏜다. 전쟁을 겪지는 않았지만 군대를 갔다 와본 사람은 대충 안다. 저 장면이 쌔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총알이 '알아서 비켜가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자기 몸을 노출시킬 수 있는 강심장을 갖은 사람은 단언하는데 없다. 그럼 막상 전쟁이 나면 적을 향해 어떻게 총을 쏠까를 생각해 보면,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가 그 상황을 가장 잘 묘사한 것 같다. 이 영화에 나오는 전쟁 장면은 Real 그 자체다. 아니 오히려 실제 전쟁에서는 이보다 더 몸을 꽁꽁 숨기고 어디로 향하든 총구만 밖으로 뺀 채 정말 그냥 갈길 것 같다. 전쟁의 Real함은 그 어떤 것으로도 상상할 수 없다.
전쟁은 국가와 국가 간의 충돌이다. 개인과 개인 간의 충돌이나 집단과 집단 간의 충돌은 '전쟁'보다는 '싸움', '다툼'이라고 한다. 그래서 전쟁이 갖는 또 하나의 속성은 국가를 위해 개인이 극도로 작아지는, 아니 아예 사라지게 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사실 전쟁을 통해 발생하는 죽음을 숫자로 보면 참으로 객관적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한국전쟁에서 남북한을 합친 한국민의 인명 손실만 5,200,000명이었다고 한다. 대략 서울인구(2016년 2월 기준 10,014,261명)의 절반이 만 3년 사이에 사라진 것인데도, 슬프기 보다는 그 숫자의 큼에 놀란다. 죽음이 슬픈 건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기억이 그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살인은 그래서 무겁게 다루어진다. 하지만 이 무거움이 전쟁이라는 기간에서 만큼은 예외다. 한 개인이 죽음 직전까지 -그 시간이 20년이 됐든 40년이 됐든- 가지고 있던 기억이 겨냥도 하지 않은 총구에서 나온 총알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마구 갈기는 행위는 상식적으로만 봐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전쟁은 그 생각을 할 수 없게 해야 이루어질 수 있다.
전쟁이라는 이름 앞에 죽음은 개별적이어서는 안된다. 죽는 개인도 개별적이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죽음은 개별적이다. 원자폭탄이 떨어지는 순간에 사람들이 대량 살상 된다하더라도 그 개인들의 죽음은 몇 초 간격이라도 다르고 죽음에 이르는 각 개인이 옆 사람의 죽음을 느낄 필요도 여력도 없다. 전쟁의 Real함은 개별적인 죽음 앞에서 개별적인 죽음을 느끼지 않아야 하는 개인이다.
그런 '전쟁에 관련된 유무형의 자료들을 발굴, 수집하여 영구히 보존, 전시하고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민족의 의지를 더욱 굳건히 다진다'는 목적으로 건립된 건물과 공간이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이다(-전쟁기념관건립 현상설계 공모지침, 1989.5-).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전쟁과 관련된 유무형의 자료들은 발굴, 수집했다 해서 그 자료들이 전쟁을 위해 기념될 수는 없다. 그래서 전쟁기념관은 이름 자체에서부터 논쟁의 대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은 그 자체로 기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설계자는 '기능적 측면으로 볼 때는 추모와 전시를 주요 기능으로 하는 '기념관으로서의 박물관(Museum as a Memorial)'이면서 또한 문화,휴식 시설의 관점으로 볼 때는 향후 도심 녹지체계의 중추가 될 이곳 용산지역 공원의 핵심부에 위치함으로써 '공원 속의 박물관(Museum in the Park)''이기도' 한데 자상하게 'ㅇㅇ전쟁추모기념관+전사박물관'이라 부를 수는 없어 '전쟁기념관'으로 잠정 확정했을 뿐이라고 답했다(-논단: 전쟁기념관 이후, 이성관 in Plus 199412-).' 전쟁기념관 사업을 추진한 주최는 '전쟁기념사업회'였다. 이 조직은 1988년 12월 17일 국회의 결정을 거쳐, 1988년 12월 31일자로 제정 공포된 전쟁기념사업회법에 따라 설립됐다.
전쟁기념관이 세워진 대지는 삼각지교차로 동쪽으로 과거 육군본부가 있던 자리다(대지면적 113,265㎡). 1989년~1993년 대전 인근으로 육,해,공군 본부가 이전했는데, 이에 따라 자리가 비었다. 공공이 추진하는 사업에서 사업비 절감을 위한 첫 번째 항목은 대지 확보 비용을 최소화 하는 것이다. 공원을 마치 유보지처럼 활용하는 공공의 자세는 이러한 이유 때문인데, 전쟁기념관 처럼 이전적지를 활용하는 것도 사업비를 줄이는 방법 중 하나다. 다만, 이 경우에는 신규취득부지 -이 건에서는 육군본부가 이전하는 대전 인근 부지의 매입비와 조성비- 를 위한 비용을 이전적지 매각으로 충당할 필요가 없거나 최소화 되어야 한다. 어찌됐든 옛 육군본부가 있던 자리, 전쟁기념관이 앉혀질 자리는 용산민족공원의 서쪽 허리로 삼각지역 일대 도시조직과 만나는 영역이기도 하다.
전쟁기념관건립을 위한 현상설계는 1989년 5월에 있었다. 그해는 1988년 2월 25일부터 시작된 제6공화국(노태우 대통령)의 2년차가 되는 해였다. 당선작은 이성관&한울건축+건원건축. '전쟁기념관 건립사(1997)'에는 당선작 외 두 개의 우수작(삼우설계 안과 일건건축 안)도 볼 수 있는데, 모두 건축기본계획에서부터 제시된 남북방향 축이 시작되는 지점에 앉혀질 수 있는 형태로 가장 처음 생각할 수 있는 강한 좌우대칭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전쟁기념관 건립사(1997)'에 실린 당선자가 밝힌 기본입장은 '전쟁추모기념관과 전사박물관을 합친 곳이 전쟁기념관의 설립 기본입장'이기 때문에 '전쟁기념관이 갖는 상징성과 기념성의 표출은 조형을 구성하는 가장 특징적 요소로서 기념비적인 특징이 지니는 입지적 특성에 대응하는 사방향 정면성이 요구되며, 한국의 전쟁사를 박물, 전시하는 국지적 특성은 한국 전통건축의 변용을 통하여 민족적 긍지를 표출한다'이다.
1989년 12월에 시작된 건축설계는 1990년 8월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993년 12월, 문민정부 첫 해 시설이 완공됐다. 왠지 노태우 정권이 김영삼 정권에게 남긴 유산이 되어 버렸는데 김영삼 정권은 그 유산이 부담스러웠는지 한때 조선총독부를 허무는 것과 맞물려 본 시설로 국립박물관을 이전하는 것을 검토했었다(-전쟁기념관 용도 확대 국립박물관 이전 검토, 경향신문, 1993.6.15-). 정기용은 전쟁기념관이 '30년 군사통치 시대가 남긴 최후의 기념비로 비단 탄생의 주역이 되었던 노태우 정권의 작품만은 아니다'고 봤다. 그는 전쟁기념관이 '군이 문민보다 우월함을 역사적으로 기리는 장소이며 백성에 대한 군의 초월적 힘을 간접적으로 과시하며 교육시키는 교육의 장'이라고 평가했다(-비평: 권력과 물신주의, 정기용 in Plus 199407-). 전쟁기념관은 당선작 선정에서부터 논란이 일었다. 이 글에서 그 전체 내용을 다룰 생각은 없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Plus 1994.07'에 실린 '비평: 권력과 물신주의, 정기용'과 이 글에 대한 이성관의 답으로 'Plus 1994.12'에 실린 '논단: 전쟁기념관 이후', 그리고 당선작 선정 후 '대한건축학회지 34권 2호 통권 153호, 1990.03'에 당시 삼우설계 이사였던 김창수가 쓴 '특집: 건축설계 새로운 과제; 전통성과 상징성 추구, 전쟁기념관 현상설계 및 당선안에 대한 비평'을 읽어보자.
전쟁기념관이 비판 받는 가장 큰 이유는 그 배치와 모습이 권위적이고 강압적인데, 그 모습이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의 성격, 군대라는 조직의 특성을 대변한다는 데에는 있지 않다. 이 부분은 Fact라고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군인의 성격, 군대라는 조직이 우리 사회에서 군사정권이라는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데 있다. 여기에 더해 기념관의 배치와 모습이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이라는 시점에서도 여전히- 보여주는 권위와 강압이 그 안 좋은 기억을 끝까지 지키려는 자세로 인식되어 정작 '전쟁의 Reality를 알리고, 전쟁이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우리 모두의 의지와 염원인 항구적 평화란, 다시는 전쟁의 비극이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는 깨달음에서 구축되며, 전쟁을 결코 잊지 않는 민족 만이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곳(-Words from 이성관 in Plus 199407-)'으로서의 전쟁기념관까지 떠올리게 하지 않는다.
전쟁기념관은 상징공간과 전시공간이 합쳐진 거대한 단일 Mass로 대지 정 북쪽에 앉혀져 있다(연면적 84,130㎡). 이는 건축기본계획때부터 제시됐던 배치다. 그리고 동서 양쪽으로 이어지는 회랑을 두어 평화의 광장을 ┌┐자로 위요하고 있다. 건축물과 회랑으로 위요된 평화의 광장은 ㅁ자 형태지만 북쪽으로는 잔디밭이, 남쪽으로는 수공간이 조성돼 있어 Hardscape된 실질적인(?) 광장은 원형이다. 잔디밭과 수공간이 광장과 건물을 구분시킨다(위 위성사진 침고). 이성관은 '원형광장은 하늘과 신성을 상징하며, 중앙홀의 원형과 호국관의 원형과도 맥을 같이 하면서, 전사자명비가 안치된 좌우 회랑에 의해 감싸여 있으며 이는 선열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우리를 상징한다'고 설계의도를 설명한다. 그에게 광장을 원형으로 만드는 잔디밭과 수공간은 '도심 속에서 예기치 않은 밀도로 나타난 광활한 Scale의 이 비워진 곳'을 더 넓게 트여 보이도록 한다.
평화의 광장에서 전쟁기념관 전면도로 변에 조성된 기념광장으로의 연결은 수공간 위에 설치된 다리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태원로는 용산민족공원이 조성되기 전까지는 서울에서 전쟁기념관을 인식하는 거의 유일한 통로다. 그런데 수공간 위에 놓여진 다리로 건너가야 한다는 건 기념광장과 평화의 광장이 다른 세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계자도 '수공간이 성벽의 방어용 해자를 상징'하며 두 광장을 연결하는 다리는 '구분된 일상적 분위기와 기념관의 상징적 분위기'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라고 설명한다. 이성관은 '관람객을 도심의 번잡한 가로로부터 기념관을 거쳐 박물관에 이르게 하는, 즉 추모기능을 거쳐 일반 전시기능을 접하게 하는 진입 동선의 Scenario에서 어떤류의 과정적 장치가 요구'되는데 여기서 '우리의 전통 가람배치에서 나타나는 과정적 공간(Processional space)을 진입부에 도입하여 해결하려 했다'고 한다. 전쟁을 기념하는 공간에서 전통 가람배치라... 궁극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행위가 '추모'와 '소원의 빔'으로 다른데 과정적 공간만 도입한다는 것이 적절한지 잘 모르겠다.
정리해보면, 이태원로는 서울이라는 과밀하고 번잡한 도시의 일부다. 기념광장은 거기에 면해 있으니 아직은 일상의 영역이다. 하지만 수공간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서 -설계자가 얘기한대로 성벽의 해자를 건너 듯- 전쟁을 기념하기 위한 공간으로 진입하는 마음가짐을 갖기 시작한다. 설계자가 얘기하는 '상징영역'으로 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기념관 Canopy와 Lobby 다시 2층 중앙홀(위 사진)을 지나 어두운 연결통로로 이어지는 호국관(아래사진)에 이르면서 전쟁에 대한 기념은 극대화되도록 했다. 물리적 거리로만 따져도 기념광장에서 북으로 250m 들어오는 과정에서 상징영역의 정수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그 상징영역의 정수에서 관람자에게 느끼게 하고자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바로 '전쟁의 Reality'다. 일상의 공간에서 완전 멀어진 세상에서 전쟁의 Reality를 느낀다는게 가능할까? 전쟁기념관의 조성 목적이 달성되려면 그 시작은 전쟁의 Reality에 대한 관람객의 동감이다. 그런데 그 동감을 일상의 공간에서 완전 멀어진 곳에서 해야 한다.
앞서 전쟁이라는 행위가 가능하려면 죽음은 개별적이어서는 안되고 죽는 개인도 개별적이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죽음과 그 죽음의 주체인 개인이 개별적이지 않으려면 그 개인을 죽이는 상대방은 자신의 행위가 비현실이라고 인지해야 한다. Computer Simulation Game에 등장하는 적군 정도가 되면 상대방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총을 쏠 수 있다. 설계자는 각각 다른 과정으로 공간을 설계했지만 결과적으로 전쟁기념관이 관람객들에게 상기시키고자 했던 전쟁의 Reality는 일상에서 가장 멀어진 상징의 최정점에서다. 설계자는 '진입광장→수공간과 Bridge→회랑과 원형기념광장→기념관 Canopy와 Lobby→2층 중앙홀→연결통로→호국관→Ramp와 1층 연결복도→1층 원형홀→일반전시→옥외전시로 이어지는' 과정 중 '호국관에서 관찰자의 감정이 절정에 이르기를 기대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절정에 이른 감정은 무엇인가? 관람객 자신이 전쟁을 기념할 준비가 됐다는 감정?, 텅빈, 어쩌면 황량한 공터 같은 이 원형 광장을 지나오면서 지쳐버린 몸과 마음? 어떤 감정이 됐든 전쟁이라는 행위에 묻어진 개별적 죽음에 대한 추모의 공간은 아니다.
혹자는 전쟁기념관이 전쟁을 기념하는 곳이지 개별적 죽음에 이른 인간을 추모하는 곳인가?라는 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설계자도 '치욕적이고 떳떳치 못한 전쟁일수록 두 번 다시 이러한 전쟁은 이 땅에서 일어나지 말아야할 것이며, 따라서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의 공간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의미 마저도 과연 전쟁에서 죽은자들이 아닌 무엇을 추모하면서 할 수 있는가? 허공으로 날아간 총알? 녹슨 대포? 포탄? 미사일? 땅으로 추락한 비행기? 전쟁의 승자가 이룬 목적, 패자로 사라진 국가의 권력? 그 무엇도 아니다. 전쟁기념관에서 우리가 기념해야 하는건 전쟁 중에 국가라는 이름으로 사라져간 개별적인 죽음이다.
그때는 전쟁기간이었기 때문에 묻혔던 그 하나하나의 죽음을 그 하나하나의 의미로 추모해야 하는 공간이 전쟁기념관이다.
용산전쟁기념관이 됐든 현충원이 됐든 그 어디에서든 우리의 6월인 '호국보훈의 달'에 우리가 추모하고 기려야 하는 대상은 '나라를 위해', '국가를 위해'라는 대의명분도 좋지만 그 대의명분을 위해 죽은 그분들 한분 한분이다. 그 개별적인 죽음의 가치를 안다면 전쟁이라는 미친 짓은 다시 일어날 수 없다. 호국보훈도 전쟁기념관을 만든 목적도 모두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면 그 궁극은 결국 전쟁이 됐든 뭐가 됐든 개인의 목숨 보다 더한 가치와 명분은 없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