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진보에 따른 특수효과의 발달로 사실적인 묘사가 가능해짐에 따라 다양한 공포영화가 여름 극장가에서 무더위를 날려주고 있다. 요즘 영화에서 나오는 흡혈귀ㆍ늑대인간ㆍ좀비ㆍ미치광이 살인마ㆍ각종 괴물 등, 다양한 공포영화의 주인공은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렇게 생겼을 것만 같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공포영화의 주요 소재가 좀비가 되면서, 이제 공포영화의 패권은 좀비에게로 완전히 넘어간 듯하다. 공포영화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있던 때만 해도 좀비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매력을 가진 여타의 주인공들을 제치고 공포영화의 패권을 가져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공포영화의 주인공들
먼저 흡혈귀는 거부할 수 없는 마성적인 매력을 가진 미소년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사람을 사냥하는 방법은 목을 물어 피를 빠는 것으로 다분히 성적(sexual)이다. 게다가 햇빛이 약점이라 활동시간도 한밤중이다. 가녀린 몸매의 하얀 피부에 빨간 입술과 고혹적인 눈을 가지고 있는 흡혈귀는 옷도 깔끔한 정장이나 단추 두 세 개 정도 풀어헤친 하얀 셔츠이니, 마지막에 목만 물어뜯지 않는다면 도시적인 느낌의 섹시한 남자라는 설정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초창기 신분은 백작이었고, 이런 설정이 이어진 탓인지 흡혈귀들은 대체적으로 상류층으로 묘사된다.
늑대인간은 여성들에게 주로 성적 매력으로 다가갔던 흡혈귀와는 정반대로 야성미 넘치고, 탄탄한 근육질의 과도하게 남성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우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자를 일컫는 데 단골인 늑대와 인간의 퓨전이라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매일 밤 활동할 수 있는 흡혈귀와는 달리 늑대인간은 한 달에 한 번 보름달이 뜨는 밤에만 늑대로 변신한다. 주인공은 보름달이 뜨면 몹시 괴로워하며 서서히 늑대로 변한다. 정확하게 늑대와 인간의 중간쯤 되는 단계로 변한다는 게 맞을 듯하다.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며 덩치가 커지지만, 이로 인해 비둔해 보인다는 인상은 없다. 날렵하지만 강인한 육체에 머리와 다리는 늑대의 모습이고 2족 보행을 한다. 사람을 공격할 때도 늑대처럼 물어뜯거나 힘으로 제압하는 단순한 방식이니, 변신하는 모습만 봐도 이들이 얼마나 남성적이고 야성적인 모습에 초점이 맞춰진 것인지 알 수 있다.
미치광이 살인마는 흡혈귀나 늑대인간처럼 초자연 존재들과는 달리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연쇄살인범 정도 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이들은 피해자들이 감히 도전할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절대적 강함을 보여준다. 이런 영화들은, 보통 여행하는 청년 네댓 쌍 정도가 피해자로 등장하는데, 마지막에 겨우겨우 살아남은 사람은 주인공 여자 한 명 혹은 어쩌다가 운이 좋아 그 여자의 애인 정도뿐이니, 보통 10대 1 정도니 세긴 세다.
각종 괴물이나 외계 생명체가 등장하는 영화는 공포영화라기보다는 공상과학영화(SF)에 더 가깝다.
이에 비해 좀비는 어떤가? 흡혈귀처럼 성적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늑대인간처럼 마초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지도 못하다. 미치광이 살인마처럼 감히 대적할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지도 않다. 군데군데 살점이 썩어 떨어져서 무섭다기보다는 역겹다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이고, 시체이기 때문에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 뒤뚱뒤뚱 걸어 다니며, 사람을 공격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입으로 뜯어 먹는 것뿐이다.
그마저도 1대 1이라면 힘으로 대결이 가능하고, 머리를 공격하면 죽이는 것도 가능하니 어찌 보면 다른 공포영화의 주인공보다 가장 인간적인 녀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왜 좀비는 좀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함을 자랑하는 다른 녀석들을 제치고 공포영화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변화하는 주인공들
우선, 다른 공포영화 주인공들의 최근 변천사를 정리해보자. 흡혈귀는 1998년 ‘슬레이어(원제: Vampires)’라는 영화가 나온 때를 전후해 인간에게 사냥당하기 시작하더니, 같은 해 나온 ‘Blade’라는 영화에서 반은 인간, 반은 흡혈귀인 존재에 의해 도륙당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2008년부터 시작된 ‘트와일라잇’에서는 인간과 사랑을 나누는 로맨스의 주인공으로까지 변화한다. 먹이사슬에서 인간의 위에 군림하던 존재를 사랑의 대상으로 바꿔버렸다. 이제 영화 속 흡혈귀는 인간과 동등한 위치의 먹이사슬에서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됐다.
늑대인간은 어떤가? 흡혈귀와 함께 공포영화의 대표주자로 꾸준하게 등장하다가 2003년 ‘언더월드’를 전후해 공격의 대상 자체가 인간에서 흡혈귀로 바뀌기 시작했다. 흡혈귀처럼 확실한 약점을 만들어낼 수 없어서 인간이 이들을 극복하는 시나리오가 아닌, 공격 대상을 바꾸는 방법을 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도 한다. 늑대인간의 약점은 은으로 된 무기지만, 늑대의 운동능력을 극복해 공격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임은 당연하다. 이에 비해 흡혈귀는 햇빛ㆍ성수ㆍ마늘ㆍ십자가 등에 확실한 약점을 갖고 있는 셈이다.
2004년의 ‘반 헬싱’도 비슷한 분위기의 영화인데, 흡혈귀를 사냥하는 일을 하는 사제인 반 헬싱이 늑대인간으로 분해 흡혈귀를 제압한다는 내용이다. 이후 영화에서 늑대인간의 적은 인간이 아니라 흡혈귀가 돼버렸다. 예전의 드라큐라 영화에서는 드라큐라 성의 집사가 늑대인간이라는 설정이 아니었던가? 굳건한 주종관계가 시간이 지나 평등한 관계를 넘어 극단적 대립관계로 바뀌었다는 말인데, 드라큐라가 엄청난 악덕 고용주였던 모양이다. 흡혈귀의 입장에서는 그저 세월을 원망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미치광이 살인마도 늑대인간의 경우와 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초기 설정이 워낙 절대 강함을 가진 존재였기 때문에 시나리오에 변화를 주기 힘들었는지, 이런 영화들은 아예 대놓고 팔ㆍ다리, 내장들과 피를 뿌려대는 고어물로 변모해 나름의 마니아층을 형성한 B급 영화가 됐다.
좀비의 진화
이처럼 공포영화의 다른 주인공들이 세상의 풍파를 헤쳐 나가고 있는 동안에 좀비들은 점점 더 진화한다. 2002년 ‘28일 후...’와 2004년 ‘새벽의 저주’에서는 뒤뚱거리던 좀비들이 엄청난 속도로 뛰어다니며 인간을 사냥한다. 엄청난 전염과 이동 속도 때문에 인간세상은 순식간에 좀비들의 세상으로 바뀐다.
2007년 ‘나는 전설이다’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식욕만을 가진 좀비가 나름의 조직을 이뤄 주인공에 조직적으로 대응한다. 개인적 욕구 해소에만 몰두하던 존재가 뭉치기 시작했다. 부두교의 주술에서 시작된 좀비는 되살아난 시체를 거쳐 바이러스에 감염된 증상으로까지 변화한다. 게임을 영화화한 2002년부터의 ‘레지던트 이블’과 ‘나는 전설이다’, 2013년의 ‘월드 워 Z’는 갑작스레 창궐한 좀비 바이러스에 의해 초토화되는 세계를 그린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더 강력하게 진화하고 있는 좀비는 이제 공포영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가 됐다. 관객 1000만을 넘어 우리나라 공포영화의 신화를 쓰고 있는 ‘부산행’도 좀비 영화이니, 공포영화의 주인공은 이제 논란의 여지가 없이 좀비다.
좀비의 진화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한 결과라고 보면, 끊임없이 변화에 적응하면서도 식욕이라는 기본적 욕구의 해소를 위해 물불가리지 않는 모습은 각박해진 현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려는 인간의 모습이 겹쳐지기도 한다. 좀비물에서 좀비와의 대결은 항상 인간이 불리한 상태에서 끝을 맺는다. 겨우 좀비와 대적할 수 있을만한 방법을 발견하고 끝나거나, 인간이 거의 사라진 세상에서 좀비들의 공세가 한풀 꺾이면서 끝난다. 약간 희망적 상황으로 끝을 맺지만, 전체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마치 유례없는 경쟁사회에 내몰린 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각자의 생존에만 매달린 채 좀비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을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좀비라는 약점 많은 존재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하며 공포영화의 주류가 된 것은 아닐지,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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