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짜장면이 좋다. 물론 탕수육을 더 좋아한다. 그런데 한때 짜장면을 입에 대지도 않았던 적이 있었다. 군대시절 취사병이 만들어주는 짜장면은 정말 먹기 힘들었다. 회사 점심시간에 짜장면을 먹을 때마다 그때 생각이 난다. 4월 14일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블랙데이Black Day, 짜장면 먹는 날이다. 그런데 아무나 먹을 수 있는 건 아니고 발런타이데이(2월14일)와 화이트데이(3월14일)에 선물을 받지 못한 남녀만 먹을 자격이 있다. 엄밀히 얘기하면 근 20년간 난 블랙데이에 짜장면을 먹을 자격이 없다(은근 자랑~).
정확한 수치는 모르나 느낌상 단위면적당 짜장면 집이 가장 많은 곳은 인천 차이나타운이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인천역과 자유공원 사이 영역(북성동2가, 북성동3가, 선린동 일대)에 있다(위 네이버 항공뷰). 그런데 인천 차이나타운은 다른 나라 도시의 차이나타운과 비교했을때 근본적인 형성 구조가 다르다. 일반적으로 다른 나라의 주요도시에 있는 차이나타운은 긴 시간 동안 그 도시의 하층 노동력을 제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서부터 공산화되는 중국 근대화의 상황을 피하고자 하는 중산층까지 다양한 계층이 집단적으로 모여살며 형성된 동네다. 대표적으로 샌프란시스코의 경우 1906년 발생한 대지진 이후 중국인들의 값싼 노동력으로 도시를 재건했다. 현재 도시를 오가는 트램Tram이 그 대표적인 유산이다(아래사진은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패루). 사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아프리카 등지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Serge Michel과 Michel Beruet가 쓴 《차이나프리카; 중국은 아프리카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가, 에코리브르》를 읽어보자. 반면, 인천 차이나타운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점을 활용하여 상업활동을 위해 정착한 계층이 형성한 동네다. 차이나타운을 형성한 계층의 범위가 좁다는 얘기다.
구체적으로 인천 차이나타운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의 군인과 함께 온 40여명의 군역상인들이 그 시작이다. 주로 복건성福建省과 절강성浙江省 출신이었다고 하는데 청나라 군대에 물자를 공급하면서 조선 상인들과 무역활동도 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던 해에 조선과 일본은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였고 그 결과 인천의 개항이 이루어졌다. 1884년에는 각국공동조계가 설정됐는데, 중국과도 그 해 4월에 '인천화상조계장정仁川華商租界章程'을 체결했다. 그 결과 선린동 일대 16,500㎡ 면적이 중국 조계지로 설정됐다. 10월에는 청국 영사관도 세워졌다. 인천 차이나타운 홈페이지에 소개된 역사를 보면 조계지 설정 전인 1883년에는 48명이던 화교가 조계지 설정 후인 1884년에는 235명으로 늘어났고 1890년에는 약 1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화교수가 급팽창하게된 사건은 1900년 6월에 북경에서 일어난 의화단 운동으로 이로 인해 산동성山東省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중국인들이 가까운 이곳으로 대거 건너왔다.
차이나타운은 인천광역시 중구청 전면에 형성됐던 일본 조계지 서측에 형성돼 있다. 그래서 신포로27번길과 신포로23번길을 따라 늘어선 일본 점포주택인 마찌아町家 양식과 일본인들이 들여온 서양식 건축물들과는 달리 차이나타운내 건물들은 근대청풍건축양식이다. 이러한 건축 양식의 차이는 두 조계지를 나누는 제물량로232번길을 사이에 두고 극적으로 일어난다(위 사진). 제물량로232번길과 신포로27번길이 만나는 지점 북쪽에 있는 계단은 '청일조계지계단'이라 불린다(아래사진). 개항기때 일본조계지와 각국지계의 경계를 설정하기 위해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계단을 설치해서 기준으로 삼았는데 그 중 하나다. 이 계단이 청과 일본조계지를 나누는 경계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계단 양쪽으로 중국식과 일본식 석등을 설치했고 계단 중앙에는 공자 석상도 두었다. 이 공자 석상은 중국 청도시 정부에서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청일조계지계단이 시작되는 지점, 일본 조계지와 맞닿아 있는 곳에 '선린동 화교주택'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있다(위 사진, 차이나타운로55번길 27). 차이나타운은 인천항(제8부두)을 향해 경사져 있기 때문에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 당시 집중 포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차이나타운내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됐는데 운좋게 살아남은 건물 중 하나가 선린동 화교주택이다. 건립시기는 대략 1930년으로 추정되는데 현재도 사람이 살고 있다. 사실 차이나타운을 대표하는 중국식 점포 건축물은 선린동 화교주택에서 서쪽으로 150m 가량 떨어진 지점에서 교차하는 차이나타운로를 따라 양쪽에 세워진 건물들이다(아래사진). 이 건물들도 1925년에 건립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리모델링을 하면서 세월의 때를 너무 벗겨내 중국 테마파크 같은 느낌만 든다. 반면 선린동 화교주택은 세월의 때를 건물에 그대로 묻히고 있어서 130년이 넘은 동네의 역사를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 심지어 기울어진 발코니 난간, 어긋난 문과 창문의 틀은 '곧 허물어지지 않을까?'라는 걱정과 함께 그럼에도 그 흔적이 계속 묻어있기를 희망하는 모순된 마음을 들게 한다.
차이나타운로를 따라 북쪽으로 100m 가량을 걸으면 제1패루가 있는 차이나타운로44번길과 T자로 교차한다(위 사진). 패루牌樓는 큰 거리에 길을 가로질러 세웠던 시설물로 무덤, 공원과 같은 강한 영역성을 형성하는 곳에 세웠던 문이다. 차이나타운에서는 화교들이 모여사는 영역성을 드러내기 위해 입구에 세워진다. 제1패루가 처음 세워진 시기는 2000년 11월로 중국 위해威海시가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위해시는 산동반도 북쪽에 있는 항구도시로 앞서 1900년경 산동성에서 많은 중국인들이 차이나타운으로 건너왔다는 역사적 사실의 근거가 된다. 제1패루는 처음 건립했을때는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해풍때문에 부식이 심해져서 2008년 석재로 다시 만들어졌다. 그래서 현재 제1패루에서는 알록달록한 중국 단청은 찾아볼 수 없고 회색 페인트를 뒤집어쓴 것 같은 모노톤Monotone외관만 볼 수 있다. 현재(2017년 기준) 차이나타운에는 3개의 패루가 있는데 차이나타운로와 재물량로가 만나는 송월동2가 2-20에 제4패루를 준공시킬 예정이라고 한다.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가장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은 단연 짜장면박물관이다. 차이나타운로55번길 서쪽 끝에서 길이 90도로 꺽이면서 차이나 44번길로 이름이 바뀌는데, 바로 이 지점에 '舊 공화춘(現 짜장면박물관, 차이나타운로 56-14, 위&아래사진)'이 있다. 앞서 1900년 북경에서 일어난 의화단 운동으로 인해 산동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려 많은 중국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했다고 했는데, 그 중 우희광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그는 1905년에 조선에 들어왔다. 1912년 우희광은 이미 정착해 있던 사람들과 산동회관을 지어 음식점과 숙박업을 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세워지자 이듬해 우희광은 건물의 이름을 산동회관에서 '공화춘共和春'으로 바꿨다. 그러다 1934년에 現 짜장면박물관 건물(舊 공화춘 건물)로 이전했다. 공화춘 건물은 1908년 산동성에서 넘어온 장인들이 지은 건물로 지상 2층이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본 건물은 중정형 평면으로 외부는 벽돌로 마감했고 내부는 중국인들답게 붉은 색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공화춘은 중국 요릿집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1970년대까지 꽤 성업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일대 상권과 차이나타운의 쇠퇴로 1983년 폐업했다.
2012년부터 인천 중구청은 본 건물을 매입·복원하여 짜장면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사실 본 건물에서 영업했던 공화춘이 꽤 성업을 했다는 것 외에 본 건물 및 땅과 짜장면과의 관계에는 논란이 많다(관련정보: 네이버 매거진 캐스트[Food/Recipe]쿠켄 짜장면; 음식의 탄생). 차이나타운로59번길 20번지에 가면 주차장 앞에 '인천의 이야기 역사'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는데 그 간판에 따르면 짜장면의 탄생지로 공화춘이 아닌 '청관淸館'을 꼽고 있다. 논란은 공화춘에서 짜장면이 처음 시작된 것인지에 대한 여부 그리고 그 짜장면을 판매하기 시작한 사람이 우희광인지 아닌지에 대한 사실관계다. 그런데 그 사실관계가 성립되지 않다 하더라도 이 건물이 짜장면박물관으로 쓰이는데는 큰 무리가 없다. 전통과 역사를 살짝 가볍게 보면 그것을 기념하고 그것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을 전시하는 공간(박물관)은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어도 우리에게는 의미있을 수 있다. 짜장면이라는 음식에 그렇게 심각하고 철저한 고증이 필요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논란이 있음에도 짜장면박물관 홈페이지의 역사적배경에서 공화춘을 짜장면이 초기 개발하여 판매된 곳으로 소개하는 것도 직접적인 관련성을 찾아야 박물관 조성 사업의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는 공공사업의 강박증이다.
대상에 따라 전통과 역사를 살짝 가볍고 틀어봄으로서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를 만드는 작업은 공화춘-짜장면 박물관 간의 관계 뿐만 아니라 인천 차이나타운 전체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다시 얘기하면 현재 인천 차이나타운은 너무 중국스럽다. 차이나타운이 중국스러운 것이 무슨 문제일까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이곳에서 중국 그 자체만을 느껴야 한다는 생각은 너무 단선적이다. 더군다나 지금 우리가 보는 차이나타운은 차이나타운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조성된 공간이다. 즉, 그 공간을 지금의 모습으로 조성한 주체의 생각 속에는 차이나타운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중국을 느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게 깔려 있었다. 예를 들어 공자상, 삼국지벽화거리, 스카이힐의 벽화는 중국하면 떠오르는 소재이기는 하지만 인천 차이나타운과는 '중국의 것'이라는 사항 외에는 어떤 관계도 없다. 심지어 중국어마을 문화체험관 캐노피Canopy 위에 올려진 여의주를 문 황금용(위 사진)과 한중원(아래사진)은 차이나타운이기 때문에 중국스러워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그런데 우리가 차이나타운을 방문하는 이유가 그곳에서 '중국'을 느끼고 싶기 때문일까? 혹시 외국방문객이 인천의 차이나타운에 온다면 그 외국인은 한국에서 굳이 중국을 느끼고 싶기 때문일까? 인천 차이나타운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컨텐츠Contents는 '중국'만이 아닌 '중국과 인천', 조금더 범위를 넓히면 '중국과 대한민국 간의 관계'에서 나와야 한다. 그리고 인천 차이나타운을 방문하는 국내외 방문객은 바로 그 관계에서 나오는 이야기와 어떤 것을 알고 싶고 느끼고 싶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관계에서 나온 대표적인 컨텐츠가 '짜장면'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화춘-짜장면박물관 간의 사실관계 유무는 큰 의미가 없다. 맛있는 짜장면을 두고 너무 심각한 얘기를 해버린 것 같다. 그럼에도 한가지를 덧붙이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엄청난 종류의 짜장면이 나올 수 있었던 건 짜장면이 100% 중국요리가 아닌 중국과 우리나라의 사이 어딘가에서 태어난 음식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