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건축의 특징을 꼽으라면 새로움에 몰두하는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겠습니다. 같은 것을 하고 싶지 않거든요." -아라타 이소자키-
건축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 읽었던 대부분의 책에서 단게 겐조Tange Kenzo와 아라타 이소자키Arata Isozaki는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건축가였다. 단게 겐조가 1913년생이고 아라타 이소자키가 1931년생이니 두 건축가는 한 세대 정도의 차가 난다. 실제 1954년에 동경대를 졸업한 이소자키는 1963년 자신의 사무소를 차리기 전까지 단게의 사무실에서 일했다. 쿠마 켄고는 《약한건축, 디자인하우스》에서 "단게와 이소자키 그리고 공공의 건축을 담당했던 건축가들이 기술력으로 무장한 대기업으로 인해 좌절하고 있던 모더니스트Modernist들 앞에서 건축의 왕도를 부활시켰다"고 설명하며, 이를 "일종의 왕정복고에 필적할 만한 일이었다"고 평했다.
두 건축가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메타볼리즘Metabolism'이다. 이 단어는 생물학적 용어로 '신진대사', '물질대사'를 의미한다. 건축계에 이 단어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59년 CIAM회의다. 당시 단게 겐조의 MIT스튜디오 학생들이 이 개념을 건축적으로 시험해 봤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0 Tokyo World Design Conference>에서 젊은 건축가들이 메타볼리즘 선언문의 출판을 준비했다. 당시 젊은 건축가들은 Kiyonori Kikutake, Kisho Kurokawa, Fumihiko Maki 등으로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생 이었다. 이소자키와 비슷한 나이대 건축가들이다(위 이미지는 이소자키가 1961년에 제안한 ).
메타볼리즘은 유기적이고 생물학적인 성장과 거대건축물을 혼합한 아이디어Idea에서 출발했다. 그렇다 보니 메타볼리즘 건축가들 -메타볼리스트Metabolist- 의 관심은 도시계획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다. 실제 단게는 1962년 동경 대학에 도시공학과를 만들었다(위 이미지는 겐조가 제안한 ). 다시 쿠마 켄고에 따르면 단게는 "도시계획 같은 거대한 구상도 단독주택 건축의 연속적인 연장선 위에서 포착하는 듯한 매우 근대주의적이고 확장주의적인 세계관에 근거한 삼고三高"를 확립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것의 유효성을 모든 사람들이 믿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졸업생들이 세상에 나올 무렵에는 도시계획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으로 바뀌었"고 결국 "도시계획은 관청을 위한 리포트 작성에 지나지 않는 거라고 인식하는 시대가 됐다." 도시계획 리포트는 "실현을 위한 리포트가 아니라 리포트를 위한 리포트, 좌절한 학자가 용돈을 벌기 위한 리포트"가 됐다고 지적했다 《삼저주의, 안그라픽스》.
이 상황에서 도시계획의 좌절을 만든 사람이 이소자키 였다. 이에 대해 켄고는 "이소자키 씨는 단게 씨의 가장 우수한 제자로 만약 그가 도시공학과 교수가 되었다면 일본의 도시계획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가장 우수한 제자가 도시계획이라는 행위야말로 가장 근대주의적이고 확장주의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켄고는 이소자키가 "건축계에서 커다른 변화"를 만들었다고 봤다. 그 변화는 "단순히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것이 삼고가 아니라 지적이어야 한다는 것, 더구나 역사와 문화적 컨텍스트Context를 이해할 수 있는 지적인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 삼고의 조건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피터 쿡Peter Cook은 이런 상황에 대해 "(아키그램의) 작업들은, 정형화 된 건축 논리와는 하등의 관계없이 그들 스스로 창조된 것들이었다. 모든 가치들이 곤두박질치는 동안에도 그들은 새로운 구조의 가치들을 세우며 그 체계를 정립시켰으며 독자적인 하위문화의 성립가능성을 북돋웠다. 일본 메타볼리즘 그룹에서는 아키그램Archigram과는 대조적으로, 이와 같은 양식을 거스르는 가치관을 발견하는 것에 대한 필요가 부족했었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결핍은 급속한 도시 경제의 확산을 꾀하는 생각들과의 천착을 몰고 왔으며, 정부의 천박한 정책들과 그 주변의 족속들에 의해 교묘하게 조작되고 말았다 《아키그램; 실험적 건축 1961-74, '아라타 이소자키의 논평' 중에서, 피터 쿡, 홍디자인》".
도시계획 자체가 의미를 읽어버리고 이소자키가 자신의 스승이 만든 도시계획의 좌절을 만듦으로써 건축가는 사회의 기대에서 벗어난 존재가 됐다. 1970년대 일본 건축계에서 일어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1960년대 후반 부터 급격하게 발달한 자본주의도 있었다. "1960년대 후반 자본주의가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경제가 성장하자 시민사회의 건축을 주장했던 단게 겐조씨나 메타볼리스트 같은 전위적인 건축가는 더 이상 국가나 사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1960년대의 건축가들이 그린 미래 도시의 꿈은 1970년을 경계로 급속하게 빛을 잃었다"고 토요 이토Toyo Ito는 설명했다《내일의 건축, 안그라픽스》.
일본 건축계의 이런 흐름들을 알아가면서 이소자키가 설계한 건물들을 실제 보고 그 공간 속을 거닐어 보면 어떤 느낌일까?, 그 공간들을 통해 이소자키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으며, 난 어떤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지금까지 이소자키가 설계한 건물 중 실제 느껴 본 공간은 네 곳이다. 준공년도 순으로 나열해 보면 쓰쿠바 센터(Tsukuba Center, 1983)-Los Angeles Museum of Contemporary Art(이하 MoCA, 1986)-오차노미즈 스퀘어(Ochanomizu Square, 1987)-교토 콘서트홀(Kyoto Concert Hall, 1995)이다. 이 중 MoCA를 가장 처음으로 봤다. 그런데 MoCA를 처음 봤을 때도 그렇고 이후 그가 설계한 건축물들에서 항상 드는 생각은 이소자키가 일본 건축계에서 과대평가를 받는건 아닌가라는 것이다. 물론 내가 문외한 이라서 그런것 일 수 도 있겠지만 그가 설계한 건물들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는 양식으로 분류하기에도 그저 평범했다. 그가 건축가이면서 동시에 이론가이기에 그의 건축언어가 어려운 것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의 이론이 건축화된 모습은 기하학 조합의 구성 정도였다. 그 구성하는 방법론과 구축론에도 심오한 이론이 적용돼 있겠지만 그 이론이 나에게 만큼은 닿지 않았다.
MoCA는 이소자키의 첫 해외 작업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이소자키는 새롭고 실험적인 건축언어를 적용시키기 보다는 자신을 대표할 만한 건축언어를 선보임으로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가장 안정적인 방법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내가 봤던 이소자키 설계 건축물 중 1980년대 지어진 세 건물은 기하학적인 매스로 이루어진 형태 외에는 이렇다할 요소가 없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기 위한 시도를 몇 번이나 했음에도 끝내 풀지 못했던 기억처럼 MoCA를 세 번이나 방문했음에도 이소자키라는 건축가가 MoCA를 설계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읽어내기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oCA는 꽤 괜찮은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S. Grand ave와 W 3rd st이 T자로 교차하는 지점 동쪽에 있는 MoCA는 중심에 썬큰가든Sunken Garden을 품고 있다(위 사진). 주 출입구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시설이 이 썬큰가든을 중심으로 캘리포니아 플라자California Plaza의 대지 레벨Level 아래에 배치돼 있다. 대지 레벨 상부로 매스가 올라와 있기는 하지만 남쪽에 있는 매스는 전시공간의 높은 층고 때문이고 북쪽에 배럴 볼트Barrel Vault 지붕으로 처리된 ┎자 평면의 매스에만 행정시설이 배치돼 있다. MoCA의 연면적은 7,450㎡로 그 중 전시시설 규모는 2,300㎡다. 전시시설 외 MoCA에는 서적과 미디어 자료실, 사무실, 카페, 강당 등이 있다.
이소자키가 대지 레벨 아래로 대부분의 시설을 배치한 이유는 처음 MoCA를 설계할 당시 LA시가 주변 가로환경에 대응되는 저층으로 건축물을 계획할 것을 조례상으로 요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MoCA는 공공전시시설이라는 프로그램적인 속성상 높은 인지성을 갖춘, 그래서 시민 누구나 쉽게 방문할 수 있어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소자키가 취한 전략은 건물의 색채를 강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붉은색의 사암Sandstone을 외관재로 선택했다.
MoCA의 입지Site Positioning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MoCA는 LA 다운타운의 척추라 할 수 있는 Grand ave를 따라 길게 배치돼 있다. 그런데 전시시설이라는 속성상 건물은 내부지향적일 수 밖에 없고 그 결과 매스외벽은 공벽Empty Wall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MoCA가 앉혀진 대지는 남쪽으로 One California Plaza 사이의 썬큰가든 형태의 외부공간, 동쪽으로 캘리포니아 플라자의 중심 보행공간(위 사진), 북쪽으로 The Colburn School of Performing Arts 그리고 서쪽으로 Grand ave와 접해 있다. 전시시설의 공벽을 두기에는 어느 한 방향 적당한 곳이 없다. 이런 대지의 여건을 고려해 이소자키는 전시실을 지하에 배치하고 대지 레벨 위로 올라오는 매스를 최소화 시켰다.
이러한 대지 여건과 입구로 연결되는 썬큰가든의 위치로 봤을때 MoCA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Grand ave를 따라 긴 직사각형 평면으로 배치된 매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매스를 포인트로 서쪽으로는 Grand ave를 통해 MoCA 및 캘리포니아 플라자로 들어오는 입구가 있고 동쪽으로는 캘리포니아 플라자의 여러 시설과 연결되며, 남쪽으로는 썬큰가든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이소자키는 직사각형 평면의 매스 지붕을 배럴 볼트로 처리했다. Grand ave에서 MoCA를 봤을때 남쪽 전시실 천창으로 쓰이는 피라미드와 함께 기하학적인 형태로 인지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위 사진). 더불어 배럴 볼트 지붕으로 처리된 매스 1층부를 필로티Piloti로 띄웠다. 이는 앞서 언급한 세 방향으로의 동선을 매스가 막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현재 필로티로 띄어진 매스 아래에 티켓박스Ticket Box가 있다(아래사진).
MoCA는 Bunker Hill 지역 재개발 프로젝트인 캘리포니아 플라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지어진 공공문화시설이다. 공공이 민간개발을 통해 일단의 영역을 바꾸는 과정에서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시민들을 위한 양질의 시설과 공간을 확충하는 것이다. MoCA는 캘리포니아 플라자 프로젝트 개발의 정당성을 확보해주는 시설이다. MoCA는 이소자키가 설계한 이 건물 외 이전에 사용했던 The Geffen Contemporary of MoCA와 Pacific Design Center의 두 번째 건물인 센터 그린Center Green 별동으로 나뉘어져 있다. 세 공간에 소장된 작품은 6,000여점으로 대부분을 개인 컬렉터Collector로부터 기증받았다고 한다. 소장품은 시설의 이름에 들어간 'Contemporary' 라는 단어에 맞게 주로 1940년 이후 미국과 유럽의 현대미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MoCA에서는 추상적이고 전위적인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