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정말 우연이었다. 2001년 8월, 짧은 일정으로 가족과 함께 홍콩Hong Kong을 가게 됐다. 자유여행은 아니었지만 몇 시간 정도는 혼자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아 둘러볼 만한 건축물들을 조사해 갔는데, 그 중 해리 자이들러Harry Seidler가 설계한 홍콩 클럽Hong Kong Club(1984, 위 사진)이 있었다. 문제는 건물의 외관이 아닌 실내 사진 도판만 봤기 때문에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찾을 수 있는 단서가 없었다. 내가 봤던 도판과 설명의 출처는 임석재가 쓴 《형태주의 건축 운동: 형태와 조형의지, 시공사》였다. 곡선이 포개지면서 만들어내는 공간이 꼭 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아래 이미지, 출처: Harry Seidler의 홈페이지). 일단 홍콩 센트럴Central에 있는 서점에 들어가 홍콩 건축물에 대한 책 《Buildings in Hong Kong》을 훑어 봤다. 다행히 홍콩 클럽은 센트럴에 있었다. 센트럴에 있는 주요 건축물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를 들여다 보며 동선을 짜기 시작했다. 일단 내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데 지도를 조금 더 들여다 보니 내가 있는 서점이 홍콩 클럽 건물 1층에 있었다. 건물의 용도가 워낙 사적이어서 내부를 둘러보는 것뿐만 아니라 사진촬영도 불가했다. 다만 건물 로비Lobby에 만들어진 회전 계단 만으로도 임석재의 설명에 동감할 수 있었다.
이후 자이들러의 작업을 본 건 2008년 시드니Sydney를 갔을 때 였다. 그곳에서 그가 작업한 오스트레일리아 스퀘어Australia Square(1967), MLC센터MLC Centre(1977), 캐피타 센터Capita Centre(1989), 호리존 아파트Horizon Apartments(1998) 그리고 메리톤 타워Meriton Tower(2006) 등을 훑어 봤다. 당시 호주 일정에 개별 시간이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 자이들러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아서 그의 작업들을 일부러 찾아가기 보다는 오며가며 쓱쓱 보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호주를 대표하는 모더니즘Modernism 건축가'라는 얄팍한 지식 때문에 그가 설계한 건축물들은 시드니 내에서도 압도적으로 보였다. 답사 후 자연스럽게(?) 자이들러의 작업들에 대한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렸다. 물론 그 글들이 어떤 인연이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국내에서 열리는 많은 국제영화제 중 '건축'을 주제로 한 '서울국제건축영화제Seoul International Architecture Film Festival(이하 SIAFF)'가 있다. 2008년부터 시작된 SIAFF는 올해 9회째를 맞이한다. 올해는 'UIA 2017 서울세계건축대회(아래사진)', '2017 서울도시건축 비엔날레', '2017 서울건축문화제', '대한민국 건축문화제' 등과 맞물려 진행된다. 그래서 가장 많은 작품들이 소개된다. 이 중 <모더니스트: 해리 자이들러>라는 영화의 GT게스트 토크Guest Talk를 맡아달라는 부탁이 왔다. 부탁을 받고 며칠만 고민해 보겠다고 말했다. 내가 바로 승낙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동안 SIAFF의 GT를 했던 분들의 경력이 너무 화려했기 때문이다. 또한, 자이들러라는 건축가에 대한 영화를 소개할 만큼 내가 그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왠지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만큼 자이들러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힘들기 때문에 나한테까지 부탁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더불어 그렇다면 그냥 내가 파악할 수 있는 만큼만, 내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얘기만 할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일단 지금까지 해보지 않았던 GT라는 역할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새로움이었다. GT 역할을 승낙한 후 '내 관점으로 해석한 해리 자이들러는 어떤 건축가이고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까?'라는 고민을 시작했다. 일단 시작은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모더니스트'에서 시작했다.
건축역사를 다 이야기할 것은 아니지만 건축분야에서 모더니즘Modernism을 이야기할 때 바우하우스Bauhaus를 빼놓을 수는 없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가 설립한 국립 조형 학교다. 하지만 나치의 탄압으로 1933년 폐쇄됐다. 자이들러는 1923년 6월 25일 오스트리아 비엔나Austria Vienna에서 태어났다. 출생시기만 보면 모더니스트로서 자이들러는 바우하우스와 직접적인 인연은 없었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직후인 1938년 자이들러는 영국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영국 수상이 된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16세~60세 사이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민 모두를 포로로 억류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유는 이들을 모두 나치의 스파이로 본 것이다. 자이들러의 포로 생활은 영국의 맨 섬the Isle of Man에서 캐나다 퀘백Quebec, 셔브루크Sherbrooke으로 이어졌다. 1941년 10월, 자이들러가 포로수용소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계기는 위니펙Winnipeg市에 있는 마니토바 대학University of Manitoba 입학이었다. 1944년 1등급 우등학위로 대학을 졸업한 자이들러는 토론토Toronto에 있는 William Lyon Somervilee 건축사무소에서 실무 경력을 쌓았고 1945년 온타리오Ontario에서 건축사가 됐다. 그리고 이듬해 캐나다 시민권자을 획득했다. 마니토바 대학과 이후 실무 경험을 통해 건축가로서의 기본적인 자질은 갖췄지만 이 시기까지의 경력 만을 보고 자이들러를 모더니스트라 보기는 힘들다.
1943년 자이들러는 1941년에 출간된 지그프리드 기디온Sigfried Giedion이 쓴 《Space Time and Architecture》를 읽으면서 모더니즘 건축에 빠졌다. 책을 통해 자이들러는 바우하우스와 그로피우스를 알게 됐고 당시 그로피우스가 학장으로 있던 하버드GSDHarvard Graduate School of Design로 진학할 것을 결심했다. 자이들러는 사회적인 용도, 효과적인 건설방법 그리고 시각적인 아름다움이라는 세 가지 원칙의 혼합이라는 모더니스트 디자인 방법론을 유지했고 이 세 가지 원칙을 끊임없이 바꿀 수 있기 때문에 고정된 스타일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자이들러의 생각은 그로피우스로 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당시 아이엠페이I.M.Pei와 헨리 콥Henry Cobb이 자이들러와 함께 하버드GSD를 다녔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를 만났다.
하버드GSD에서 한 학기를 보내고 자이들러는 보스톤Boston에 있는 알바 알토Alvar Aalto 사무실에서 잠시 일했다. 그로피우스는 자이들러에게 추상회화 예술가 요제프 알베르스Josef Albers에게 가르침을 받을 것을 권했다. 알베르스는 1919년 뮌헨 미술원에서 Max Doerner와 Franz Stuck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로피우스와의 인연은 알베르스가 1920년 바우하우스에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의 공통예비과정을 등록하면서 시작됐다. 1923년에는 공작교육 공통예비과정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그로피우스로 부터 받게 된다. 결국 1925년에 알베르스는 바우하우스 교수로 임용됐다. 알베르스도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왔고 1933년 11월 노스 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에 새롭게 설립된 블랙 마운틴 칼리지Black Mountain College의 교수가 됐다. 이후 1950년 블랙 마운틴 칼리지를 떠나 예일 대학Yale University의 디자인 학부를 이끌었다.
자이들러는 알베르스에 대해 "I found out more about visual perception at Black Mountain than at any architecture school. We learned by tangible experience why we prefer certain images to others; It is because our eyes respond differently from those of people at other times in history"라고 할 만큼 큰 영향을 받았다. 한 예술가의 작품 성향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알베르스는 대략 'Hard-edge abstract painter'로 불린다. 그의 작품을 보면 선명한 윤곽으로 그려진 기하학적인 도형이 반복되거나 중첩돼 있다. 이 과정에서 기하학적 도형이 만들어내는 공간은 연속되면서 그 다음에 어떤 공간이 전개될지 호기심을 갖게 만든다. 자이들러가 설계한 건축물 중에는 알베르스의 회화가 그대로 구현된 듯한 건축물을 볼 수 있다. 블루 포인트 타워Blues Point Tower(1962) 입면에 뚫린 창문 조합과 호리존 타워Horizon Tower(1998) 발코니의 반복적인 형태가 대표적이다. 회화의 형태적 구현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솔리드Solid와 보이드Void가 조화를 이루면서 그 사이에 공간적인 흐름을 생성시키기도 했다. 대표적인 건축물이 그를 주목받게 한 로즈 자이들러 하우스Rose Seidler House(1950, 아래사진)다.
요제프 알베르스와 헤어진 후 1946년 자이들러는 캠브릿지Cambridge를 떠나 뉴욕New York으로 사무실을 옮긴 브로이어의 첫 번째 어시스턴트Assistant가 되면서 함께 일하게 된다. 1948년 호주에 먼저 정착한 그의 부모님은 자이들러에게 호주에 자신들이 살 집을 설계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호주로 가기 전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Rio de Janeiro에 들러 오스카 니어마이어Oscar Niemeyer 사무실에서 몇 개월을 보내며 교류 기회를 가졌다. 자이들러가 호주에 도착한 시기는 1948년 9월이었다. 그의 처음 생각은 부모님 집 설계가 끝나면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자이들러는 자신의 거처를 포인트 파이퍼Point Piper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마련했다. 1950년 준공된 로즈 자이들러 하우스로 그는 큰 주목을 받게 된다. 이 건축물은 건축에 대한 논쟁을 일으켰고 호주에서 새로운 주택에 대한 기준이 됐다. 무엇보다 이 주택을 시작으로 자이들러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수주하게 됐고 결국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호주에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로즈 자이들러 하우스 준공 당시 자이들러는 27세였다. 모더니즘 건축에서 1920년대생 건축가들의 앞날은 솔직히 밝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서 1880년대생 건축가들 -대표적으로 지금까지 언급한 발터 그로피우스(1883년생), 미스 반 데 로에Mies van der rohe(1886년생), 르꼬르뷔지에Le Corbusier(1887년생)- 이 모더니즘 건축을 완성시켰고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1900년대생 건축가들이 '1세대 모더니스트'라 불리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세대 모더니스트에는 자이들러와 교류했던 마르셀 브로이어(1902년생), 오스카 니어마이어(1907년생) 그리고 필립 존슨(1906년생) 등이 있었다. 1920년대생 건축가들은 완성된 모더니즘을 따르자니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을 찾기 힘들었고 다른 건축언어를 제시하자니 이미 모더니즘이 주류를 이루고 상황 속에서 자신의 주장이 설득될 때까지 버텨내야 하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1920년대생 건축가 중 대표적인 건축가 4명을 통해 그들이 취했던 전략을 살펴보자. 우선 케빈 로쉬Kevin Roche(1922년생)는 1세대 건축가와 협업을 해가며 자신의 위치를 다진 후 그 뒤를 잇는 전략을 택했다. 그는 1950년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1910~1961) 사무실에 들어가 실무경력을 계속 쌓은 후 사리넨이 세상을 뜨고 나서 몇 년 지나 자신의 이름을 건 사무소 ‘Kevin Roche John Dinkeloo and Associates’를 차렸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처음으로 수행했던 프로젝트는 그의 나이 44세에 한 오클랜드 뮤지엄Oakland Museum of California(1966)이었다. 모더니즘 건축을 바탕으로 자연 요소가 섞여 들어가는 케빈 로쉬의 건축언어가 잘 드러나 있는 건축물이다. 프랭크 게리Frank Gehry(1929년생)와 로버트 벤츄리Robert Venturi(1925년생)는 자신의 건축언어가 주목받을 때까지 버텼(?)던 유형이다. 게리의 경우 자신의 집을 개조한 게리 하우스Gehry House(1978)를 그의 나이 49세에 했고 벤츄리는 어머니를 위한 바나 벤츄리 하우스Vanna Venturi House(1964)를 39세 때 준공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1966년에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 건축의 서막을 올린 《건축의 복잡성과 대립성Complexity and Contradiction in Architecture》을 출간했다. 참는 자에게 복이 오는 걸까? 위 세 사람은 모두 프리츠커상Pritzker prize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존 헤이덕John Hejduk(1929년생)은 모더니즘 건축가들이 장악한 실무가 아닌 학계에서 처음부터 시작했다. 35세(1964년) 부터 뉴욕의 쿠퍼유니언 대학The Cooper Union University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하면서 '페이퍼 아키텍트Paper Architect'로 불렸다. 헤이덕의 처녀작은 아니지만 대표작이라 부를 만한 크로이츠베르크 타워Kreuzberg Tower(1988)는 그의 나이 59세 때 완공됐다.
동년배 건축가들에 비해 자이들러가 비교적 빨리 처녀작을 만들고 바로 세간의 이목을 받았던 이유는 그곳이 호주였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의 집을 설계하기 시작하면서 자이들러는 "Australia's present-day building practices are outdated. They cry out for rejuvenation. It is the policy of this office to create new standards which will produce a progressive contemporary architecture."라고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1788년 유럽인들이 시드니에 집단취락지를 만들면서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됐다. 하지만 초기 이주자들은 영국에서 죄를 지은 유죄인들이었다. 그래서 유럽 이주민들에 의한 예술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었다. 오히려 건축양식이 다른 부분을 선도했는데, 이유는 자신들의 생활에 필요한 공공건축물 설계시 본국의 건축양식인 빅토리안 양식Victorian Style과 죠지안 양식Georgian Style을 적용시켰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호주의 첫 번째 공공건축가로 임명된 프란시스 그린웨이Francis Greenway(1777~1837)다. 그 또한 영국에서 위조죄 선고를 받고 호주로 유배 온 건축가였다. 반면, 유럽인 이주 전부터 호주 대륙에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의 예술이 있었다. 흔히 호주 원주민들을 ‘아보리진Aborigine’이라 부르는데, 이들의 예술은 현재도 이어져오고 있는 대표적인 원시예술로 간주된다. 여기에 더해 자이들러가 로즈 자이들러 하우스를 설계할 당시는 그의 부모님들처럼 세계대전을 피해 유럽에서 넘어온 이민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유럽에서 모더니즘으로 설계된 건축물과 예술을 접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호주에서도 이를 실현하고 싶었다. 적어도 호주에서 만큼은 자이들러가 1세대 모더니스트였다.
영화 <모더니스트: 해리 자이들러>의 감독 다릴 델로라Daryl Dellora는 호주 멜버른Melbourne 출생이다. 호주를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으로 ‘필름 아트 미디어Film Art Media’의 대표다. 이 영화가 가장 최근에 연출한 작품이다. 1998년에 연출한 <The Edge Of The Possible>이라는 영화가 2011년 제3회 SIAFF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요른 웃존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였다.
영화 뿐만 아니라 회화, 조각, 음악 심지어 건축마저 작품을 만든 작가와 이를 바라보는 독자 사이의 게임Game이라고 생각한다. 감독 다릴 델로라가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바는 분명 있겠지만 그보다는 각 관람자가 만들어낸 텍스트Text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난 이 영화를 보면서 두 가지가 떠올랐다. 첫 번째로 든 생각은 자이들러의 처녀작인 로즈 자이들러 하우스가 세워진 곳이 시드니가 아니라 멜버른 이었다면 어땠을까? 두 도시는 호주를 대표하는 라이벌 도시다. 그만큼 도시가 형성된 역사와 분위기가 무척 다르다. 실제 자이들러가 설계한 건축물 상당수가 시드니와 그 인근에 있다. 물론 멜버른을 비롯해 호주 다른 도시들인 브리즈번Brisbane, 퍼스Perth에도 그의 작업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 편중돼 있기는 하다.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우리나라의 1세대 모더니스트, 김중업과 김수근이었다. 세계 건축 흐름에서 봤을 때 그들이 우리나라에 모더니즘을 전파하기 시작한 1960년대는 앞서 언급한 1920년대생 건축가들이 자신만의 건축언어를 드러냈을 때다. 오히려 그 시기 모더니즘 건축은 한물간, 여러 건축 양식 중 하나였다.
제9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는 올(2017년) 9월 4일부터 9월 24일까지 열린다. 9월 4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9월 10일까지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9월 11일~17일 동안은 이화여자대학교 ECC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9월 22일~24일 동안은 마포문화미축기지 탱크6 다목적강의실에서 열린다. 내가 GT를 맡은 <모더니스트 해리 자이들러>는 아트하우스 모모 2관에서 9월 12일(11:00)과 14일(17:30)에 상영된다. 이 중 GT는 14일(목)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