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베니 카멘 (Cerveny Kamen) 이라는 곳에 갔었습니다. 뒤늦게 찾아보니, 붉은 돌 (red stone) 이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1580년부터 2차 대전이 끝날 때 까지, 몇 몇 거대 부자 가문들이 번갈아 차지했던 성이라고 합니다. 귀한 광물을 저장했던 지하의 커다란 창고라든지, 성의 네 모서리마다 세워져 있는 거대한 포탑, 그리고, 성 안에 아직도 남아있는 귀한 보석이나 가구 등의 컬렉션 등이, 그러한 성의 내력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네요.
특히 지하의 커다란 창고는, 고전 영화 ‘프랑켄슈타인’이 촬영된 곳으로도 나름 유명하답니다.
한참 달리다 보니, 왼편, 작은 숲 너머, 성의 지붕이 얼핏 보입니다.
주변의 초원에 맹금류 훈련소가 있었는데, 우선 성 구경 먼저 하고 가기로.
1차 관문 통과.
뾰족한 아치 바깥의 네모난 액자 같은 테두리와 더불어, 길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구멍이 보이는데요. 지금은 고정된 다리를 통해 들어가게 되어 있지만, 예전엔 들어올릴 수 있는, 가동식 다리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잘 다듬어진 넓은 정원이 나오는데, 여기저기 공작새가 거닐고 있었습니다.
영화로웠던 과거를 말해주는 듯.
해자를 건너, 성의 본체로 다가갑니다.
진입의 축과 건물 본체의 축이 비틀려있는 모습. 짓다 보니 그냥 이렇게 된 건지, 군사적인 목적(진격해오는 적을 조금이라도 더 잘 막기 위해?)이 있었던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경첩의 부품이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엔 여닫이문이 붙어있었던 듯.
성벽에 뚫려있는 이런저런 구멍들이 눈길을 끌더라고요. 과거에 창이었다가 나중에 막혀서 그림 액자처럼 된 부분도 있고, 비스듬하게 뚫려서, 바깥을 바라보기 위한 창이 아닌, 화살이나 총 등을 쏘기 위한 구멍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온갖 이야기가 담겨있는 벽.
그리고 모서리마다 둥근 포탑이 붙어있었는데요.
바깥을 향하면서 넓어지는 구멍이, 그 쓰임새, 존재의 이유를 말해주고 있었죠.
이제 성의 본체로 들어갑니다.
펼쳐지는 풍경. 성벽을 겸한 건물로 둘러싸인, 중정.
왜곡 없이, 그냥 눈으로 보면 대략 이런 정도의 느낌. 연한 베이지 색으로 정돈된 벽체에 가지런한 패턴으로 반복되고 있는 창문들이 참해 보이는데요. 그에 비해 지붕 위로 비죽 튀어나온 굴뚝들은 좀 두서없어 보입니다.
굴뚝을 통해 내부 공간의 배열 상황, 공간이 어떤 식의 위계를 두고 쌓여있는지를 짐작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렇게 굴뚝이 촘촘히 솟아 있는 곳은 귀한 신분의 사람들이 머무는 방이 배열된 부분일 것 같고요,
얼핏 창문들은 가지런히 뚫려있는 듯 보이는데, 지붕이나 건물의 덩어리들은 조금 두서 없이 대충 포개져 있었습니다. 한 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일부분씩 덧붙이듯 지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습은 중정 가운데쯤까지 걸어와서 방금 지나온 성문 언저리를 되돌아 본 것인데, 이렇게 굴뚝이 없는 부분은 물건이나 자재 따위를 쌓아놓은 창고, 혹은, 사람이 머물더라도 오래 머무는 방은 아닐 것 같습니다.
물론 창문의 크기나 배열을 통해서도 건물 속 공간의 구성을 짐작할 수 있겠지요. 지붕 바로 아래 작은 창문의 배열 간격과 아래 기준층(?) 창문의 배열 간격이 어긋나고 있는 모습도 나름 흥미롭습니다. 건축적인 규율에 경직되게 맞추지 않고, 내부 기능의 필요를 즉각적으로 반영하여 맞추는 식으로 디자인된, 어떻게 보면 나름 모던한 태도로 디자인된 건물입니다.
묘기를 부리듯 매달려있던 빗물 선 홈통.
기준층(?) 부분은 같은 크기의 창문들이 그래도 최대한 가지런하게 배열되어 있는 데 반해, 중정에 접해있는 1층 부분의 창문과 문은 모양이나 위치가 정신이 없이 아주 산만해 보입니다.
이렇게 모아 놓으니 예전 어렸을 때 우표 수집하던 기억이 납니다. 최소한의 기능과 구성원리를 공통원리로 공유한 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는 여러 아이템을 모으는 재미.
시간 차이를 두고 그 때 그 때 필요에 의해 생겨난 문들이라서 이렇게 되었는지. 혹은, 비슷한 시기에 뚫렸는데, 내부 공간의 성격, 즉, 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신분이나 상황을 충실히 반영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는지, 모를 일입니다만, 이래저래 상상해 볼 만 합니다.
오른편이 우리가 방금 들어왔던 성문입니다만. 이런 장면도 흥미롭습니다. 내부 공간 쓰임새의 변화가 읽혀지는 부분. 다시, 이야기를 품은 벽.
일종의 ‘방범창살’이겠는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대해서 그런지, 이런 것도 예뻐 보이더라고요. 그에 비해 막힌 줄눈 조적 패턴을 흉내내어 그린 모습에서는 조금 싼티가 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ㅁ’ 자로 둘러싸인, 직사각형 모양의 중정인데, 어떤 부분은 이렇게 낮은 건물이었습니다. 여기 창문 패턴도 볼만하네요. 문은 똑같이 반복되는데, 창문은 문득 작아지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뿔난 사슴이 조각된 분수대. 며칠 뒤 다른 성에서 사냥한 사슴을 박제한 머리나, 잘라낸 뿔 따위를 수 십 수 백 개 모아서 전시해 놓는 모습을 접하기도 했습니다만, 이런 장면에서 슬로바키아 고유의 문화랄지, 지역색의 일면을 엿보게 됩니다. 자연을 완벽하게 통제, 지배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열쇠. 아주 오래된 자물쇠에 맞추어 만들어진 큼지막한 열쇠도 있어서 나름 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