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을 내고자, 남쪽으로 창을 내고자
창에 대한 로망
대학교때 좋아하던 공간엔 둥글고 큰 창이 있었다. 도서관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창인데 , 백주년기념 도서관이라는 육중한 타이틀을 가진 건물이었다, 그 무게에 걸맞는 곳의 정 중앙에 가장 중요한 입면을 만드는 창이었기에 실내에서 보기엔 상당히 크고 둥글었다. 창 너머로는 캠퍼스 전체가 내려다 보이고 서향인지라 대단한 풍광의 석양을 볼수있어서, 그곳에서 공부를하려하면 책 보다는 사색에 잠기는 시간이 더 많았다.
사람들의 창에 대한 로망은 크기나 뷰에 대한 생각에서 옅볼수있다.
고등학교 때 전교 일등하던 내 친구는 수능 끝나고 한강이 내다보이는 통유리 까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아마 당시의 취향을 고려하면 달달한 비엔나 커피나 파르페였겠지. 달달한 커피를 마시며 한강을 내다보는 것은 그럴듯하다. 창은 역시 커야한다. 손바닥만한 창을 내고 코를 들여박고 숨을 쉬는 것이 소망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본적이 없다. 한강이 보인다거나 산이 보인다거나 호수가 보인다거나 아주 근사한 뷰가 시원하게 펼쳐지는 것이 소원이다.
(소나무 숲. 사진작가 배병우)
사실 그런 좋은 경치에 집을 지으면 통창 보다는 풍경에 적합한 창은 따로 있다. 파노라마 창이라고. 가로로 긴 창. 용눈이 오름의 사진 작가로 유명한 김영갑 작가의 사진처럼, 배병우의 소나무 숲 처럼 파노라마 창을 내면 멋진 뷰를 늘 와이드하게 감상할수있다. 아니면 병풍 같은 창은 어떨까. 창밖의 풍경은 항상 변하니, 사철 내내 변하는 풍경이 앞에 있다면 매일 다른 풍경을 볼것이다.
(위. 소나무. 사진작가 배병우 / 아래. 용눈이오름. 사진작가 김영갑)
아니면 병풍 같은 창은 어떨까. 창밖의 풍경은 항상 변하니, 사철 내내 변하는 풍경이 앞에 있다면 매일 다른 풍경을 볼것이다.
창은 프레이밍 framing 이다. 풍경을 어떻게 잘라내서 보여주냐의 문제로 연결이 된다. 사진을 찍을 때한 엄지와 검지로 프레임을 잡아보면 평범한 풍경이 특별해 보인다. 이렇게 집안에서 보는 영원한 액자를 잡는 것이 설계자가 하는 일이다.
( 네델란드 TU Delft 건축과 스튜디오에서 찍은 '네폭 병풍에 담긴 화란이 봄'. 눈이 부신 봄이었다)
창이 안에서 보는 것이 액자라면 밖에서 보는 것은 얼굴이다. 건물의 얼굴에 표정을 만든다. 잘 만들면 귀여운 사람, 못 만들면 안습 OTL . 대학시절 아꼈던 도서관의 창문이 석굴암의 광배 였고 화룡점정이었다. 건축가는 비례와 균형으로 입면을 만든다.
▲ 사진: google에 'face house'라고 치면 나오는 이미지들
청양 농가주택의 창은 아들 내외 안방에 창가에 걸터 앉는 윈도우 시트. 서서는 안보이고 앉아서보라고 낮게 깔린 파노라마창, 구석이지만 멀리 바라볼수있는 코너창, 그리고 복도에 리듬을 만들어 주는 세개의 창, 하늘을 보라고 손짓하는 파노라마 천창이 있다. 이것들이 모두 모여 작은 농가주택에 얼굴을 만들어주었다. 창 턱의 깊이나 테두리가 x와 y라는 비례로만 만든 얼굴의 시간의 깊이를 더해준다.
(청양농가주택의 창. 사진: 황효철)
(청양농가주택의 창. 사진: 황효철)
지금까지 본 창들이 솔로곡이었다면, 합창하는 창을 본적이 있다. 가장 감동적인 창. 스테인드 글라스들의 합창, 빛의 군무 혹은 행진. 범인 건축쟁이가 하나의 창을 고민고민해서 겨우 하나 하나를 만들때, 천재 건축가는 이까지껏 하고 대충대충 만든거 같지만 메가톤급 감동을 무심하게 미친듯이 퍼부었다.
솜털 하나하나 쭈삣쭈삣 서게하는 감동. 그 유명한 르 꼬르뷔제의 롱샹 성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