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이데일리에 기재된 글입니다.
2018년 6월 12일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두 정상이 마주 보며 손을 맞잡는 순간은 전 세계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기 충분했다. 그 과정에서 필자를 포함한 많은 건축가들의 눈을 사로잡았을 것으로 예상되는 장면도 있었다. 바로 두 정상이 만나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의 배경이 된 싱가포르 카펠라호텔은 북미 정상회담을 위한 훌륭한 건축적 장치이자 정치적 무대가 됐다. 싱가포르의 수많은 최고급 호텔들 중 카펠라호텔이 낙점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라 짐작될 만큼 이 공간은 극적이었다.
△ 카펠라 싱가포르 호텔 조감도
카펠라호텔은 1880년대 영국 식민지였던 싱가포르에 지은 영국군의 휴양 시설이었다. 공교롭게도 영국을 대표하는 건축가이자 프리츠커 수상자인 세계적 건축가 노먼 포스터가 리모델링해 호텔로서의 현재 모습을 갖춘다. 이날 북미 정상들이 손잡은 흰색 석조 건축물은 19세기 이 자리에 있던 타나 메라(Tanah Merah)를 리모델링한 결과물로서, 두 정상이 각각 걸어 나온 백색 열주랑(외부에 기둥이 줄지어 선 발코니 형식의 외부 복도) 역시 식민지 양식(colonial style, 서구의 양식이 적용된 식민지의 건축)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 카펠라 싱가포르 호텔 본관
필자가 최고의 정치적 무대라 칭한 카펠라호텔. 두 정상이 이곳에 도착해 손을 맞잡기까지의 공간적 전이과정을 세밀하게 살펴보면 그 이유가 드러난다. 무대는 인공기와 성조기가 여럿 설치 된 포치(porch, 건물의 현관 바깥쪽으로 튀어나와 지붕으로 덮인 부분. 출입구 앞에 설치되어 비바람을 막고 잠시 머물 수 있는 공간)와 그 양쪽으로 뻗어있는 열주랑으로 구성된 단순한 공간구조를 가지고 있다.
△ 북·미 두 정상의 모습과 백색, 적색으로 꾸며진 포치
전 세계인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복도의 양쪽 끝에서 등장했다. 전체가 백색으로 마감된 열주랑을 배경으로, 검은색 인민복과 감색 수트를 입은 두 정상은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백색과 정복의 대비만으로도 이미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무대가 차려졌다. 게다가 두 정상이 걸어 움직인 열주랑의 수많은 기둥들은 두 정상의 움직임을 가리기도, 드러내기도 하며 마치 영화의 프레임과 같은 건축적 장면을 연출했다. 그렇게 서로 가까워져 두 정상이 결국 만난 중앙 포치에는 레드 카펫과 인공기, 성조기의 붉은 색감이 시각적 자극을 한껏 높이도록 꾸며졌다. 매우 단순한 공간구조와 간단한 장치들이지만, 카펠라 호텔의 공간은 두 정상이 70년의 거리감을 거슬러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을 연출하기 위한 무대로서 최적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연극과 오페라에서는 희곡의 스토리를 극적으로 연출하기 위한 의도로 무대장치를 설계해 설치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건축가들은 야외극장에서 연출될 무대를 설계하는데 투입됐다. 시선과 원근감을 고려해 부채꼴 형태의 관객석을 설계하고 그 중심점에 배경이 될 무대를 설계하는 형식이 주로 쓰였다. 이러한 무대 건축의 기원을 스케네(skene, 영어 scene의 어원)라 부르고, 무대를 연출하는 기술을 스케노그라피(skenographia)라 칭했다. 고대에서부터 무대를 위한 전문 기술과 용어들이 존재했을 만큼, 어떠한 메시지를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공간적 배경의 설정은 중요한 장치로 고려돼 왔다.
△ 두 정상은 서로를 향해 열주랑을 걸으며 극적인 효과를 높였다
이번 북미 정상회담의 공간 연출을 보면 정치적 사건을 소화하는 무대 역시 희곡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극장과 같이 극에 맞는 무대를 만들어 낼 수는 없기에 최적의 장소를 찾아 섭외해야 했을 것이고 카펠라호텔은 이러한 정치적 무대의 역할을 톡톡히 해 냈다. 구체적인 협상의 내용과 합의의 결과만큼이나 두 정상이 서로를 바라보며 마주 걸어온 정치적 무대의 연출은 세계사의 중요한 순간으로 모두에게 각인됐기 때문이다. 두 정상이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하나의 공간으로 향해 왔듯 평화가 전 세계로 다가오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