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이데일리에 기재된 글입니다.
△ 북촌 한옥마을
외국인 친구들과 가장 오고 싶은 곳, 우리의 전통이 가장 잘 보존된 곳으로 늘 으뜸으로 꼽히는 그곳. 바로 서울 북촌 한옥마을이다. 한복을 입고 북촌을 거닐며 사진 한 장 남기는 일이 유행이기도 한 요즘, 봄기운마저 돌아오니 북촌은 곧 많은 나들이객의 발길로 분주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곳이 건축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한 독립운동가에 의해 만들어진 비교적 ‘최근’의 한옥마을이라는 점, 그리고 북촌 한옥마을의 한옥들은 ‘전통적인 한옥’이 아니라는 점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한옥은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개념은 ‘조군건축(소규모 단위 건축물이 모여 이룬 군집체)’이다. 낮은 담장이 영역을 만들고 안채, 바깥채, 부엌, 행랑채 등이 각각의 칸(間)을 이루어 독립적으로 서 있다. 건축이 둘러싼 마당이 구심점이 되어 각 건축물을 연계하는 한옥의 공간적 특성은 한국의 건축가들이 현대건축을 설계할 때조차도 끊임없이 연구하고 반영하고자 하는 우리네 ‘공간의 DNA’이기도 하다.
하지만 ‘ㅁ’ 자 혹은 ‘ㄷ’ 자 형태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북촌의 한옥들을 떠올려 본다면 이러한 조군건축의 개념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게다가 기둥과 기둥 사이에 황토를 바른 전통적인 축조법이 아닌 시멘트 벽돌 혹은 적벽돌을 쌓아 벽을 만들거나 심지어 근대화 이후의 재료인 타일을 바른 한옥도 눈에 띈다. 결국 우리가 한옥마을이라 부르는 북촌의 집들은 전통 건축이 아닌 재료적으로 근대화되고 공간적으로 압축된 새로운 유형의 ‘근대 한옥’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대표적인 한옥마을로 다가오는 것은 어쩌면 학술적인 전통성보다 광범위하게 펼쳐진 개량한옥의 ‘규모의 힘’일지 모르겠다.
대규모 근대식 개량한옥의 공급에는 우리의 아픈 역사가 깔려 있다. 북촌 한옥마을은 경복궁 인근의 계동, 삼청동, 익선동, 보문동, 가회동 일대의 한옥촌을 일컫는데 이곳은 100년 전만 해도 과수원이었다. 1900년대 초반 세력을 넓혀가던 일본인들은 궁궐 근처의 공간까지도 자신들의 거주공간으로 삼고자 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은 친일파 조선인들은 이 땅을 선점해 추후 일본인 거주 지역이 될 때의 수익을 노리고 있었다. 총독부도 전략적으로 이를 지원해 일본식 주택을 지을 계획을 했다고 하니, 우리 궁궐 주변과 종로 일대가 일식 주택으로 뒤덮일 위기였다.
이때 ‘건양사’라는 건축 시공업체(주로 근대 한옥을 건립·분양)를 운영하던 조선인 기농 정세권(1888~1965) 선생은 친일파를 상대로 거래를 한다. 그는 친일파들이 매입한 북촌 일대의 대지를 불하 받아 대단위 근대 한옥 단지를 짓는다. 일본인들의 거주 패턴과 맞지 않는 근대 한옥을 개발·건설해 조선인들이 거주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든 것이다. “우리 땅 종로에 일본인들이 발붙여선 안된다”라고 말했다는 정세권 선생은 북촌 개발 과정에서 발생한 수익의 대부분을 항일 운동에 투자했고, 그의 북촌 개발 의도와 독립운동 사실이 알려지며 건양사는 결국 문을 닫게 됐다.
△ 왼: 기농 정세권 선생 / 오: 조선일보에 실린 건양사 최초 분양 광고, 1929.02.07
정세권 선생은 우리 민족 고유의 생활방식이 녹아 있는 한옥을 우리 땅을 지키는 무기로 사용했다. 그는 공간에 담기는 삶이 가지는 힘을 알고 있었다. 사람은 살아온 문화를 바탕으로 생성된 패턴에 맞는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집은 그러한 성격이 가장 민감하게 작용하는 곳임을 이해한 것이다. 선생은 건축의 본질과 공간의 힘을 알고 있었고 그 힘이 그의 사업적 역량과 만나 우리의 땅에 한옥을 지어낼 수 있었다. 그가 없었다면, 그래서 경복궁 주변에 적산가옥(일본이 조선에 지은 일식 가옥)이 즐비한 광경을 상상해 본다면 정세권 선생의 존재는 우리 도시사(史)의 큰 행운으로 여길 만 하다.
다행스럽게도 2018년 서울시는 종로구와 함께 ‘정세권 기념사업’을 본격화하였다. 수많은 북촌의 개량한옥들이 카페와 음식점으로 개간되며 정세권식(式) 한옥이 점차 사라져가는 요즘 반가운 소식이기도 하다. 조선인의 생활문화를 담은 근대 한옥, 올봄 북촌을 찾는다면 우리 근대사가 녹아 있는 작은 집들을 한 채 한 채 세심하게 살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