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이데일리에 기재된 글입니다.
△ 밀양 연극촌 ⓒ연합뉴스
주변을 둘러보면 땅과 건물, 건물과 건물들은 저마다의 여러 이유들로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그 공간의 기능을 합리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관계, 미적으로 아름다운 공간감을 만들어내는 관계, 최적의 경제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관계 등 우리는 공간의 배치를 통해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이유들 너머에 ‘권력’이 있다. ‘세 사람만 모여도 권력이 발생한다’라는 말이 있듯 사회공간은 소소한, 혹은 강력한 권력관계의 물리적 현현(顯現)이다. 이때 공간의 배치방법은 가장 강력한 매개체가 되는데 권력은 자신의 모습 자체 혹은 무형의 힘을 드러내기 위해 공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건축에서의 공간배치는 그 자체가 권력의 성향과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경우가 잦다. 일상공간인 회사 사무실의 책상 배치, 도시의 도로와 관공서의 건물 배치 등에서도 드러나듯 권력은 우리네 삶의 공간에 얕게, 혹은 깊게 나름의 구조를 형성한다.
재작년 2월,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연극연출가 이윤택씨의 공간에는 욕망을 위한 저속한 권력구조가 펼쳐져 있었다. 폐교된 월산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에 이 연극가와 단원들이 1999년 작은 마을을 꾸며 입주한다. 이후 ‘밀양연극촌’이란 이름을 붙이고 공연과 체험캠프 등을 운영하며 정부의 지원과 함께 명소로 자리잡았다. 이씨는 ‘거장’이 돼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여성 단원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았음이 드러났고 이 공간은 폐쇄가 결정됐다.
△ 밀양 연극촌 시설도 ⓒ연희단거리패 홈페이지
밀양연극촌의 공간구조를 살펴보면 중심축 중앙에 자리한 좌우대칭의 곡선 성벽극장을 중심으로 앞·뒤·좌·우 네 공간으로 나뉜다. 앞쪽과 좌측은 주로 안내소·화장실·게스트하우스·식당·동네극장 등 외부인들을 위한 공간이다. 반면 뒤쪽과 우측은 스튜디오·연극촌장 관사·연출가의 거처(월산재)·연극인 숙소 등 내부인의 공간이 자리한다. 이 공간구조가 설명하는 연극촌의 공간 성격은 정문과 성벽극장 좌측으로 갈수록 공적(public)인 곳, 성벽극장 뒷켠과 우측으로 갈수록 사적(private)인 곳으로 정의되고 있다.
주목해야 할 지점은 피해자들이 범행장소로 꼽은 그의 거처와 피해자들의 숙소간의 관계, 즉 공간 배치다. 범행이 일어난 ‘황토방’은 ‘월산재(月山齎)’라는 그의 거처에 딸린 작은 방이다. 전체적으로 네모반듯한 연극촌의 부지에서 유일하게 불룩 튀어나가 고립된 공간에 피해자들의 숙소가 위치한다. 마치 대륙과 반도의 관계처럼 극장과 연계된 쪽을 제외한 삼면이 외부와의 경계로 막혀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 연극인 숙소와 극장 사이 마치 목줄을 움켜쥐듯 월산재가 자리한다. 연극인들은 극장과 스튜디오를 오가기 위해 반드시 월산재 앞을 지나야만 하는 공간구조인 것이다.
파렴치한 거장은 후배 연극인들의 꿈의 공간(성벽극장)과 삶의 공간(연극인 숙소) 사이에 자리잡았다. 월산재는 이씨의 권력이 그릇된 욕망으로 승화된 공간이었고 공교롭게도 공간은 이러한 비극을 예고라도 하듯 절묘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수없이 쏟아진 미투(Me too) 증언에 따르면 이곳에서 그의 성적 만족에 따라 단원들의 배역과 분량이 결정됐다고 하니, 결국 이 공간은 젊은 여성 연극인들의 꿈을 담보로 삶을 갉아먹은 권력자가 자리잡기에 안성맞춤인 배치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월산재를 거쳐 꿈의 무대로, 월산재를 거쳐 쉼의 집으로 향해야 했던 피해자들에게 월산재 속 그의 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이 공간에서 건축물들이 맺고 있는 관계만으로도 이미 그의 권력은 작동 중이었다. 그의 실체를 알고 있음에도 그가 본인들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자임 역시 아는 이들에게 연극촌의 공간구조는 빠져나올 수 없는 그물과도 같았을 것이다. 고립된 숙소, 신축한 거대한 야외극장. 그 사이에 꿈을 미끼로 성을 착취한 권력자의 공간이 자리한 것은 과연 우연이었을까. 어쩌면 그는 인간관계뿐 아니라 공간관계 역시 권력관계임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