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이데일리에 기재된 글입니다.
서울 종로구의 탑골공원 인근 ‘락희(樂喜)거리’가 조성됐다. 2억6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탑골공원 북문부터 낙원상가까지의 옛길에 대한 대대적인 공사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어르신들의 홍대’를 만들겠다던 서울시의 야심찬 목표가 무색하게 일반 시민들은 물론 노인들에게도 외면받고 있다. 오래전부터 일상처럼 이 골목을 찾던 고령층마저 일순간 변해버린 거리 풍경에 발길을 돌리고 노숙인들의 공간으로 전락하며 슬럼화됐다.
△ 일본 '스가모 거리'의 모습
락희거리는 일본 도쿄도의 ‘스가모 거리’를 벤치마킹했다. 스가모 거리는 ‘노인들의 하라주쿠’라 불리며 200여개의 노인친화적 상점들이 성업 중이고 고령층 뿐 아니라 전 세대를 아우르는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시작부터 외면 당하고 있는 우리 ‘락희거리’와는 상반된 모습이다.
스가모 거리의 성공 요인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우선 공간 환경개선에 대한 접근방식의 차이다. 도쿄도의 도시마 구청은 스가모 거리의 모든 보도 턱을 없앴다. 길을 평탄하게 만들어 안전사고를 예방하겠다는 의지다. 거리는 벤치와 쉼터 중심으로 동선이 구성돼 있고 상점들의 색과 디자인, 마감재는 노인들이 선호하는 디자인을 바탕으로 선정됐다. 또 모든 활자들의 크기와 서체 역시 노인들의 시각적 편의를 기준으로 디자인 돼 세심함을 보여준다. 게다가 주변 지하철역의 에스컬레이터 운행 속도마저 절반으로 늦췄다는 점을 보면 노인들의 사용성이 도시공간에 그대로 녹아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행태중심의 이같은 디자인들은 시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건축적 장치’들이다. 마치 맞춤복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신체의 자연스러운 편안함을 추구한 배려다. 주사용자의 행위를 이해하는 디자인, 고령층의 행태를 고려한 ‘보이지 않는 손’은 오랜 시간 그곳을 찾던 노인들의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만들었다. 근본적으로는 공간환경의 역할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단계적 적용이 스가모 거리만의 특성을 강화하는 도구가 돼 준 것이다.
장소성을 가진 나이 들어가는 도시공간
반면 락희거리는 하나의 ‘사업’으로만 접근했다. 단 몇 개월 사이 옛 거리의 껍데기를 바꾸는데 그쳤다. 과거 환경개선 사업이 벌어졌던 전국 각지의 전통시장, 테마거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유사한 디자인의 새 간판들과 벽화는 이미 익숙해져 피로감마저 불러일으킨다. 물론 전후(Before & After) 비교 사진에는 뚜렷한 변화가 포착되겠지만 시각적인 변화와 성과위주의 사업이 도시의 맥락을 오히려 해칠 수 있음은 락희거리를 통해 충분히 증명됐다.
어르신들의 주름엔 포용의 편안함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지혜가 담겨 있다. 이는 생이 갖는 ‘시간의 힘’이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천편일률적인 환경개선사업들이 이어진다면 우리 도시는 ‘늙지 못하는 도시’가 될 것이다. 락희거리는 멋스럽게 나이들어 가는 도시에게 끊임없는 성형수술을 권한 결과다. 표면의 시각적 변화만을 추구한다면 서울시의 도시환경정책은 시간의 힘을 읽지 못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락희거리와 스가모 거리는 각각 탑골공원과 고암사(高岩寺)라는 유서깊은 장소에 접한 탓에 고령층 시민들이 꾸준히 찾아 왔던 장소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누군가들의 오랜 시간에 걸친 꾸준한 방문은 그곳에 특유의 진한 향기를 배어들게 한다. 소위 ‘장소성’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공간 특유의 향기는 시간, 경험, 기억의 축적이자 하나의 역사 그 자체다. 락희거리의 역할모델인 스가모 거리는 그곳을 채우는 사람의 행태에 주목한 도시환경 정비가 해당 공간의 ‘장소성’을 더욱 잘 살려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우리에게도 도시를 경험하는 시민들에게 공간과 환경이 조력자가 되어 줄 수 있는 좋은 변화들이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