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이데일리에 기재된 글입니다.
120년 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조선은 황국이 됐다. 하지만 급격히 변화하는 세계정세의 틈에 조선의 국격을 공고히 하고자 했던 고종의 노력은 안타깝게도 20년을 채 버티지 못했다. 대원군의 그늘에 가렸고, 자신보다 주목받던 왕비가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으며 끝내 일제의 간섭에 불안한 여생을 보냈다.
참으로 굴곡진 고종의 삶, 결국 순종에게 황제 자리를 양위하고 물러나 덕수궁에 머문다. ‘덕수궁 마마’로 불리며 여생을 보낸 고종황제의 인생사는 훗날 독립운동의 불씨가 됐다. 외세에 맞서 새로운 세계 질서에 편입하고자 노력했던 고종의 정치, 그리고 이러한 역사의 장소적 바탕인 덕수궁. 19세기에서 20세기로의 전환기에 덕수궁은 우리 민족의 가장 아픈 순간을 묵묵히 지켜본 건축이다.
우리 근대 정치사의 배경이자 증인인 덕수궁이지만, 우리는 덕수궁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고 있었다. 질곡의 근대사로부터 체제는 다시 세웠지만, 공간은 끝내 돌려받지 못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기분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58년 만에 우리에게 발길을 허락한 덕수궁 돌담길의 일부 구간에 대한 이야기다.
△ 1959년 영국대사관이 점유하면서 60여년간 철문으로 막혀 일반인의 통행이 제한됐던
덕수궁 돌담길 100m 구간이 보행길로 정식 개방했다. (ⓒ Hyun Woo Kang)
우리 근대 정치사의 배경이자 증인인 덕수궁이지만, 우리는 덕수궁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고 있었다. 질곡의 근대사로부터 체제는 다시 세웠지만, 공간은 끝내 돌려받지 못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2018년 12월 기분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2017년 8월과 2018년 12월 두 차례에 걸쳐 막혀 있던 구간이 완전히 개방된 덕수궁 돌담길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 2017년 12원 8월 30일 덕수궁 돌담길 100m가 개방됐다. 1959년 영국대사관이 담장을 포함하는 구역을 대사관 부지로 점유했던 이래 58년 만이다. 영국대사관이 들어선 것은 1884년의 일로, 경술국치(1907년) 이후 한국전쟁까지의 우리 역사는 온전히 우리의 것인 적이 없었다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사실상 이때 개방된 돌담길 북서측 구간은 100여 년 만에 우리에게 돌아온 셈이다. 그 후로부터 대략 1년 뒤인 2018년 12월 7일, 거대한 철문이 마지막까지 시민들의 발걸음을 막아서고 있던 70m의 구간(영국대사관 직원 숙소 앞~영국대사관 정문)까지 완전히 개방되어 1.1km에 이르는 덕수궁 돌담길을 끊어짐 없이 걷고 만질 수 있게 되었다.
건축은 시대와 명운을 같이한다. 그 건축이 당대 기술과 미학의 집합체인 궁궐건축일 경우 더욱더 그러하다. 국가 정세의 거울이기도 한 궁궐건축은 그래서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계사를 돌아보아도 국가의 번영에는 궁궐의 진화가, 국격의 추락에는 궁궐의 훼손이 수반돼왔다. 조선 역시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 동안 경복궁은 무참히 헐려 그 건축적 규모가 십분의 일로 줄어들었고 창경궁은 창경원이 돼 유희공간으로 몰락했다. 경희궁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방치됐다가 일제에 의해 분해됐다.
덕수궁은 그나마 고종의 거처이자 순종의 즉위 장소였기에 온전히 보존됐다. 하지만 그 때문일까, 오히려 덕수궁엔 근대의 바람을 급격히 받아들인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석조전, 정관헌, 중명전 등 다수의 양식 건물이 들어서고 내부는 입식 공간으로 개조됐다. 석조양식의 건축적 도입과 좌식에서 입식으로의 공간적 변화는 단지 물리적 변화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궁궐 내부에서 일어나던 각종 전통 의식이 불가능해지고 새로운 방식의 행태로 바꾸어야 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근대화의 상징일까, 전통의 훼손일까. 논쟁은 아직 유효하다.
△ 단풍으로 물든 덕수궁 일대 (ⓒ travel oriented)
시간은 흐르고 시대는 점차 변해간다. 혹자는 조선이 왜 500년의 역사를 지키지 못했는가를 묻기보다, 조선이 어떻게 500년의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500년 이상을 버틴 왕조는 세계사적으로도 조선이 거의 유일하다고 하니 그 역사는 무척이나 찬란한 것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토록 번성했던 왕조의 건축적 성과들도 ‘근대’라 불리는 엄청난 변화 앞에 너무나도 쉽게 허물어졌다.
빼앗긴 건축으로 기억되는 우리의 궁궐. 하지만 그 상실의 시대 앞엔 수 세기에 걸친 빛나는 건축문화가 있음을 기억하자. 그 모양새의 복원은 단지 문화재의 물리적 복원 너머 당대의 건축이 도시에 새겨놓은 가치를 탐색하는 일이다. 덕수궁 돌담길의 복원이 단순히 산책로 확장 이상의 큰 의미를 가지는 것 역시 같은 이유다. 건축의 복원은 시대와 정신의 복원임을 이해한다면 최근 이루어지는 다양한 궁궐 복원사업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참여, 그리고 응원의 목소리도 높아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