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이데일리에 기재된 글입니다.
목업(mock-up), 사전적으로는 실물 크기의 모형을 만든다는 의미다. 건축에서는 시공단계에서 구현하기 난해한 부분 혹은 디자인적으로 중요한 부분일 경우 실물의 시공에 앞서 동일한 크기와 재료로 미리 만들어 보는 과정을 뜻하기도 한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목업 테스트가 있었다. 바로 미국과 멕시코 간 국경에 설치될 이른바 ‘트럼프 장벽’의 시제품을 선정하는 테스트였다.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하면서 국경장벽 사업은 중단되었지만, 공사과정 내내 지구촌 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피할 수 없었다.
△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 계획 (출처 : 위키피디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트럼프 장벽이 보여주는 통제의 건축이다. 배제를 위한 구축 기술이 다양하게 적용돼 있는데 물리적 접근과 심리적 접근을 모두 좌절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히 반영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만하다. 미국 국경 보호국(CBP)은 업체들에게 장벽의 최소 조건으로 △넘기 어려운 5.5m 이상의 높이일 것 △지하로 터널을 팔 수 없는 깊이일 것 △해머나 용접기 작업에 4시간 이상 견뎌낼 것 등 3가지를 전제했다. 이를 기본으로 제안된 8개의 경쟁 시제품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인간의 신체적 조건과 인식의 행동 방식을 면밀히 분석해 제작된 건축적 장치들이 엿보인다.
경계를 극복하기 위한 ‘신체의 도전’을 차단하는 장치들은 재질과 형태에 있었다. 장벽들은 공통으로 면이 매우 균질해 손과 발을 거치할 수 없는 콘크리트면 혹은 강철판으로 제작됐다. 게다가 몇몇 제품들은 수직 방향의 골을 형성해 미끄러짐을 유도하는 표면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또 모든 장벽은 최상부에 나름의 추가적 조처를 했는데 경사면을 만들거나 원통형 관을 부착한 모습들이 관찰된다. 이는 어떻게든 기어오른 사람들이 정점에서 추락할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으로 풀이된다.
이런 장벽들의 재질과 형태 너머, 치수들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국경을 넘으려는 신체적 도전에 앞서 의식 자체를 차단하려는 의지마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CBP가 제안한 최소높이가 5.5m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벽들은 하나같이 9m 언저리의 높이로 설치됐다. 인간이 정면을 바라볼 때 편안하게 인식되는 각도는 15도 정도다. 9m 높이의 장벽이 이 시선의 범위에서 벗어나게 되는 수평 거리는 30m, 즉 100피트(ft)나 된다. 즉 장벽을 향해 다가가는 사람은 이미 100ft 떨어진 지점에서부터 육중한 벽체를 고개 들어 올려다보게 되는 것이다. 100ft 거리에서부터 느껴지는 위압감은 국경을 넘으려는 자의 의지를 100걸음 앞에서부터 서서히 꺾음으로써 심리적 문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물리적으로도, 또 심리적으로도 트럼프 장벽은 훌륭한 통제의 건축이다. 단 나와 타인의 관계를 절대 배타적 관계로 규정하고 섞임을 허락지 않겠다는 목적만 성공적인 건축이라 말하고 싶다. 우뚝 선 장벽, 시선이 닿지 않는 저 너머를 양국 국민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인간이 로봇과 다른 점은 사물을 단지 그 자체가 아닌 사물의 생명력과 성격, 그리고 주변과의 상관관계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인식한다는 점에 있다. 나아가 그 사물을 매개로 사물 너머에 있는 새로운 세계를 들여다보고 다양한 해석을 생산한다는 점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사물 인식의 지평이다.
트럼프 장벽은 이런 관점에서 매우 비 건축적 장치다. 인간은 건축(建築)된 모든 것을 통해 건축 저편에 있는 새로운 세계를 바라본다. 모든 건축이 창조된 사물 자체로서가 아닌 주변과의 관계 안에서 신중히 계획돼야 하는 이유 역시 이러한 인간의 본성 때문일 것이다. 트럼프 장벽의 계획을 통해 반대편 사람들이 벽 너머 미국을 어떤 세계로 바라봐 주길 바랐던 것일까. 그리고 미국인들은 장벽 앞에서 그 너머의 세계를 어떻게 상상하게 될 것인가. 신체는 건널 수 없지만, 정신은 건널 수 있다. 장벽에 마주한 두 세상 사람들의 서로에 대한 인식은 왜곡될 수밖에 없고 그 비극은 장벽을 쌓은 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