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이데일리에 기재된 글입니다.
공간에 대한 관념은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최근 재미있는 변화 중 하나는 ‘불확실한 공간’, 즉 하나의 공간이 하나의 목적에만 대응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의도에 따라 언제든 그 성격을 바꿀 수 있는 공간들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심지어 공간의 존재 자체를 유동적 가치로 보아 한순간 나타났다가 사건의 종료와 함께 사라지는 건축도 종종 발견된다. 규제가 풀린 푸드트럭, 공장에서 만들어 어디든 쌓아 올릴 수 있는 모듈러 주택, 주말이면 내가 만든 또 다른 집으로 떠나는 캠핑 열풍 등 공간의 불확실성·임시성은 이제 ‘불안함’이 아닌 ‘가능성’으로 해석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고정된 장소에 대한 관념의 변화는 지난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행사’만을 위해 별도로 건축한 공간인 평창 올림픽 스타디움, 화려한 개막식과 함께 평창동계올림픽의 서막을 연 공간이 바로 그곳이다. 동양의 오행 철학과 이번 올림픽의 5대 목표를 상징하는 펜타곤(오각형) 디자인으로 설계된 올림픽 스타디움은 지상 7층 규모, 3만5000명의 관람객을 수용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다.
디자인만큼이나 화제가 된 것은 스타디움의 쓰임새다. 올림픽과 같은 대형 행사를 유치하면서 행사 간 사용된 대형 공간의 추후 활용방안은 늘 고민거리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번 평창올림픽 스타디움은 그 이후 ‘쓰임새’를 제거한 ‘임시건축물’로 계획됐다. 그 때문에 이 건물에서는 콘크리트 부분을 찾아보기 힘든데 습식구조를 배제하고 건식구조로 만들어 쉽게 철거할 수 있고, 철거한 건축 부재를 재활용 할 수 있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적 결정은 스타디움이 들어설 장소의 지역적 특성과 한계를 기반으로 한다. 스타디움이 계획된 횡계리는 황태덕장을 꾸리는 4,000여 주민들이 모여 사는 조용한 마을이다. 영구적인 대형 시설물의 추후 쓰임새를 찾기 어려운 곳인 셈이다. 이런 불확실성은 팝업(pop-up) 공간이라는 아이디어를 통해 해결됐다. 팝업은 일정 시간 운영하는 임시 매장인 팝업 스토어(pop-up store), 웹사이트의 임시 창인 팝업창(pop-up window) 등의 단어를 통해 우리에게도 익숙한 개념이다. 팝업의 개념과 건축이 만나면 늘 존재하던 장소에 새로운 무언가가 등장해 전혀 다른 성격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사건이 발생한다. 목적을 다한 후 사라지는 팝업 공간은 다시 돌아간 본래의 공간에 특별한 기억을 남기고 새로운 장소성을 부여한다. 월드컵과 아시안게임을 통해 영구적인 인프라를 흉물로 남겨 본 경험이 있는 우리에게 이런 팝업 건축의 선택은 과감하고도 현명한 결정이다.
물론 팝업 건축의 물리적 한계로 인해 ‘뚜껑 없는 스타디움’이란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고, 일부 외신은 역대 최악의 ‘추운 개막식’이 될 것으로 우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올림픽 정신과 우리의 국가적 철학을 담은 환상적인 개막식을 포함해 결국 ‘너무 문제가 없어 문제’라는 극찬 속에 평창동계올림픽은 성공리에 이벤트를 마쳤다. 평창 올림픽의 여러 경기장 중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하는 ‘아이스아레나(쇼트트랙·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가 1만2000석 규모를 갖추기 위해 공사비 1300억 원과 2년 6개월이라는 공사 기간이 걸렸음을 고려한다면 3만5000석을 1년 10개월 만에 만들어 낸 메인 스타디움의 건설과정은 주목할 만하다. 게다가 기존에 편성된 940억 원의 공사비를 3분의 2 수준인 650억 원으로 낮춰 완공해 낸 점은 팝업 건축의 건축적 효율성과 이를 통한 경제적 효과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과시성의 맹목적인 건축, 으스대던 시간이 끝나면 허무하고 무용하게 남겨져 왔다. 반면 고요한 황태 덕장에 팝업된 이 뚜껑 없는 스타디움은 평창의 설원이 푸르게 물들 계절이 오면 해체돼 다른 곳에 재사용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땅은 공원이 돼 자연으로, 또 국민에게 되돌아왔다. 스타디움은 사라지지만 공원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이번 겨울을 수놓았던 수많은 선수의 열정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어쩌면 공간의 존재보다 기억의 힘이 강할지 모른다. 올림픽의 성료 후 부재(不在)하기에 더욱 아름답게 기억될 오각형의 공간이 어떻게 회자할지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