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시인 윤동주의 삶을 소재로한 영화 '동주'가 개봉해서 백만명이 넘는 관객을 모으고 있다. 천만관객을 모았던 왕의 남자의 감독인 이준익 감독 명성에 비해 백만이라는 숫자가 적게 느껴질 지 모르나, 순수제작비 5억이라는 저예산 영화에 시인 윤동주라는 대중적 인기를 끌기 힘든 소재로 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현재의 관객 수는 이 영화가 성공했음을 의미한다. 즉, 시인 윤동주의 삶이 현대인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동주라는 영화가 윤동주를 통해 대중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는 것처럼, 건축을 통해 윤동주를 기리며 또 다른 종류의 감동을 주고 있는 건축물이 있어 답사기로 소개하고자 한다.
건축물명은 '윤동주 문학관'
윤동주 문학관의 내용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기념관에 대한 개념에 대한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고 싶다. 얼마 전 블로그를 통해 몇가지의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질문 중 하나를 옮겨오자면 다음과 같다. "한 사람에 대한 문학관이나 전시관 같은 경우.. 그를 소개한 뒤 환기시켜주는.. 그런 과정들이 있나봐요. (처음 알았네요.)"
위 질문만 놓고 보면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으나, 앞 뒤의 다른 질문과 함께 이해한 나의 판단에 이 질문은 건축물 자체로 기념과 기리는 것이 생소하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일반이 생각하는 기념관이라는 것은 기념하는 대상물에 중점을 두곤 한다. 때문에 기념관을 찾게 되면 그 기념품? 기념물?이 무엇이며 어디있는지 찾기 바쁘다. 위와 같은 이유로 나에게 질문을 한 분도 건축으로 기린다는 내용에 처음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일반이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건축을 하는 입장 즉 건축가는 건축물 자체로 그 대상을 어떻게 기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때로는 누구의 기념관이라고 명명돼 있으나 그 내부에는 그와 관련된 기념품이 전혀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백퍼센트 건축물 자체가 그를 기리는 것이다.물론 기념품이 있다 하더라도 건축을 통해 기념할 수 있는 개념을 구현하고 기능적으로 기념물, 기념품등을 채울 수 있게끔 처리하는 것을 뒤이어 한다. (며칠전 Archur님께서 올린 안중근 기념관도 유사한 사례이다.) 윤동주 문학관 역시 기념관이라는 프로그램(용도)에 대해 건축가가 치밀하게 고민하고 노력하여 구현한 건축적 개념이 잘 나타나 있고, 또 그것을 구현하는 설계의 과정까지도 흥미로웠던 건축 프로젝트이다.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 사진과 함께 하도록 하겠다.
윤동주 문학관
윤동주 문학관은 아뜰리에 리옹의 이소진 건축가의 작품이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여성건축가 중의 한명으로 앞서 이야기한 치밀한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위치는 종로구 청운동이다. 북악산의 한자락 언덕배기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다. 단층의 세개의 전시실만이 있는 매우 작은 규모의 건축물인데, 과거에 수도가압장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리노베이션한 것이다. 청운동을 가로지르는 도로 변에 자리하고 있으며 흰 백색의 매스로 혼자 두드러지지는 않게 담백하게 자리하고 있다.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라는 특성 때문에 외관에서 보았을 때, 기존의 건물의 틀을 살려 처리해 특별한 기교는 없어 보인다. 백색의 스터코 마감으로 담백하게 상부 매스를 구성하고, 하부는 석재를 판으로 깔아 받쳐, 미각적으로는 균형잡힌 모습을 보이지 않나 생각한다. 그리고 각각의 재료가 만나는 부분에서는 최대한 투박하지 않게끔 얇은 판을 활용해 분리한 것은 대부분의 건축가들이 지닌 그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내부 전시관의 구성은 크게 세개의 전시실로 이뤄져 있다. 1~3 전시실의 구성인데, 1전시실은 윤동주 시인에 대한 소개와 시 작품을 전시해 놓은 공간으로 일반적인 기념관의 기능을 담은 이 건축물의 유일한 공간이다. 1전시실의 경우는 사진촬영이 불가해 부득이하게 글로만 설명한다.
2 전시실
2 전시실을 설명하기 전에 서두에서 언급했던 설계에 관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려 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윤동주 문학관 프로젝트는 기존 건물의 기능적 수명을 다해 새로운 용도를 부여하는 리노베이션 프로젝트였다. 기존 건물이었던 수도가압장을 기반으로 건축가는 설계를 진행하였고, 계획안이 나온대로 공사를 진행하던 중 건물 뒷편으로 숨어있던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두개의 큰 물탱크 공간으로 지면 아래로 묻혀 있어 파악되지 못하던 부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건축가는 설계를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기존 건물의 현황이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새롭게 발견된 요소를 통해 건축적인 표현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위 에피소드는 건축가의 인터뷰와 SNS를 통해 들은 이야기라 실제와 완벽히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수개월의 설계변경 과정을 거쳤고, 그로 인해 탄생한 공간의 핵심이 바로 뒤이어 이야기할 2, 3전시실이다.
2 전시실은 위 아래 사진과 같이 하늘이 뚫린 채 3전시실로 향하는 길만이 존재하는 빈 공간이다. 보이는 것은 기존 물탱크 기능을 할 때 필요했던 사다리가 있었던 흔적과 물때로 보이는 벽면의 흔적뿐이다. 그런데 이 공간이 전시실로 부를까.. 내가 생각하는 이 공간의 전시품은 바로 이 공간 자체이다. 건축가의 머릿 속을 들어가보지는 않았으나, 내가 생각하는 건축적 이해에 따르면 건축가는 이 공간을 구성하면서 관람객들이 이 공간 자체로 윤동주를 느끼기를 바랐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윤동주에 대한 설명은 1전시실을 통해 이미 들었고, 3전시실을 향하며 관람객들은 이 공간에서 생각을 환기하고, 윤동주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어쩌면 보이는 것처럼 이 공간은 윤동주의 자화상에 등장하는 우물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건축가가 물리적으로 한 일은 기존 물탱크의 지붕만을 걷어낸 것일지 모르지만 그 전에 공간을 통해 느낄 감동을 끝없이 생각하고 기획했을 것이다. 오롯이 하늘만 느낄 수있는 이 공간에서 관람객들은 시인 윤동주를 한 번 더 생각하며 기릴 수 있지 않을까.
3 전시실
3전시실의 공간 역시 2 전시실의 연장선에 있다. 3 전시실 역시 기존 수도가압장의 물탱크 중 하나였다. 이 공간은 윤동주의 삶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전시실의 역할을 하는데, 2전시실과는 다르게 지붕으로 덮여 어둡지만 사다리가 놓인 자리만을 뚫어놓아 빛이 한줄기 떨어지게끔 되어 있다. 2 전시실은 하나의 큰 우물이었다면 3 전시실은 작은 우물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흔히 건축적 기법, 기교를 설명하는 단어 중 '대조'라는 용어가 많이 쓰이는데, 2, 3전시실의 관계가 그 기법이 제대로 적용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기술적으로도 개구(뚫는 것)의 방법을 반대로 하여 빛과 어둠의 공간이라는 두 대조적인 공간을 만든 것. 이것 역시 건축가의 의도로 인해 구성된 것이고, 나는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3전시실 안에서는 영상을 통해 윤동지 시인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 한줄기를 보면서도 윤동주에 대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윤동주 문학관을 나와 건물을 감아도는 계단을 따라 올라 언덕에서 건물을 바라보면 전체적인 구성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난 우측의 두개의 매스는 1, 2전시실이고 3전시실은 지면아래 묻혀 있다.
윤동주 문학관은 매우 작은 규모의 건축물이다. 규모로만 따지면 수개월의 설계기간이 걸렸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건축가가 건축물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과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을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건축을 공부할 때 건축은 은유의 미학이라고 이야기를 많이 듣곤 한다. A라는 것이 B와 같다는 직접적인 비유를 하는 직유가 아니라 A를 전혀 다른 B라는 것과 은은하게 연결짓는 것을 통해 미학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윤동주 문학관 역시 전혀 윤동주와 닮았다고 느껴질 수 없는 공간을 통해 은은하게 윤동주를 느끼게 하는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낸 작품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어떻게 질좋은 건축물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좋은 재료는 무엇인가라는 물리적인 것들에만 관심을 쏟던 와중에 건축가가 궁극적으로 이뤄야할 공간의 구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해주는 소중한 답사였다. 요즘 화두인 인공지능이 절대 건축가라는 직업을 대체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감각적인 공간을 만드는 신의 한수를 둘 수 없기 떄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