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사랑을 고백한다는 Valentine Day다. 물론 기념일의 기원은 잊혀진채 상업화 되어버린 날이기는 하지만 연인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날이기도 하다. Valentine Day를 맞아(?) '사랑'이라는 Story를 품고 있는 공간에 대해 써보려고 했다. 대충 생각나는 공간은 Romeo&Juliet의 도시 Verona, Dante와 그의 첫사랑 베아뜨리체가 만났다는 Firenze의 Ponte Vecchio(1345) 그리고 Ring des Nibelungen(니벨룽의 반지)를 작곡한 독일의 작곡가 Richard Wagner와 Mathilde부인의 사랑 -엄밀하게 말하면 불륜- 이 있었던 Zurich에 있는 The Wesendonck Villa 정도 였다. 그런데 너무 즉각적인, 그래서 그 사이에 어떤 관계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문제는 '사랑'이라는 주제로 더 깊게 관계되어 있는 공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Valentine Day라는 호재(?)를 그냥 지나쳐야 되나?라는 생각을 하던 중 최근 출간된 김훈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를 읽다가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고 쓴 문구를 봤다. 김훈은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에게 사랑은 '애틋함', '아득함'인 듯 했다.
19C말에 활동했던 화가 중에 Ferdinand Hodler라는 화가가 있다. 상징주의 화가로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가 그린 그림 중에 여러 Version의 '제네바 호안'이 있다. 호수를 그린 그림일테니 당연히 Hodler의 붓은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움직였다. 그가 그린 '제네바 호안'은 수평선을 두고 위로는 하늘에, 아래로는 호수면에 수평선이 반복돼 있다. 제네바 호안 작품 중 가장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은 1915년에 그린 일몰 장면이다. 그 장면은 그의 부인 Valentine Gode-Darel이 투병생활을 했던 병실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그리고 그 그림은 Valentine이 죽던 날 '죽은 발렌틴(1915, 아래그림)'을 그리고 난 다음에 그렸다.
언뜻 보면 이 상황에서 Hodler가 제 정신인가 싶지마는 Valentine의 투병생활이 길었고 그 과정에서 병색이 짙어져가는 아내를 그는 그려나갔다. 아마도 그 과정이 Hodler에게는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을테고 그 과정에서 Hodler에게 Valentine은 닿을 수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과정의 끝 그러니까 막상 Valentine이 숨을 거둔 순간에 오히려 Hodler는 담담할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Hodler는 그렇다 치더라도 Valentine은 아름답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Hodler가 싫지 않았을까?
진중권은 자신의 책('춤추는 죽음2')에서 '제네바 호안'의 풍경이 '죽은 발렌틴'을 연상시킨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Hodler에게 수평은 죽음의 상징'이라고 설명했다.
"모든 것은 수평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한없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물처럼, 산들도 수많은 세월의 침식작용으로 낮아져 결국 호수의 표면처럼 평면이 되고 만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죽어가는 Valentine의 그림들을 연속되게 늘어놓고 유심히 살펴보라. 그녀의 머리가 수평으로 향하여 점점 낮아지고 있지 않은가. 그녀의 몸은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점차 수평으로 기울어가고, 하루를 다 산 태양도 이제는 기울어 수평선에 수렴해간다. ...(중략)... 그녀가 죽었다. 해가 졌다. 모든 것은 이렇게 수평으로 향하게 마련이다. 여기서 그녀의 죽음은 저 장엄한 자연의 Drama와 합류한다. 그녀의 죽음은 수평을 향하여 낮아지는 거대한 자연운행의 일부가 된다. 그러고 보니 저 그림 속에 하늘과 호수가 만나는 곳에 나지막이 누워 있는 산들의 silhouette이 침상에 누은 죽은 Valentine의 몸매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춤추는 죽음2, 진중권-
Hodler가 Lake of Geneva의 수평에서 죽음을 생각했던 것처럼 우리가 호수를 보면 그것을 끼고 있는 Geneva라는 도시가 활력없는 공간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Geneva는 Swiss내 그 어떤 도시도 가지고 있지 않은 활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그 활력은 도시에 있는 50여개가 넘는 국제기구와 그곳에 종사하는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Geneva에 국제기구가 밀집되게 된 계기는 1919년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의 본부가 자리잡게 되면서부터다.
무엇보다 Geneva를 활력있게 만드는 조직은 Lake of Geneva에서 서쪽으로 7.5km 가량 떨어진 France국경에 걸쳐 있는 CERN이다. CERN은 'Conseil Europeen pour la Recherche Nucleaire'의 약자로 1954년 12개 국가의 비준을 받아 설립한 조직이다. 설립할 당시에는 'Council'로 시작했는데, 이후 'The European Organization for Nuclear Research'로 명칭이 바뀌었다. 하지만 CERN이라는 이름은 어감 등의 이유로 유지되고 있다. 현재 이름인 'The European Organization for Nuclear Research'도 시설의 성격을 나타내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시설명만 보면 원자력에 대한 연구를 하는 조직 같지만 이는 초창기 때에만 그랬다. 현재 CERN의 주 연구분야는 원자 구성 입자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CERN의 Homepage에 들어가 보면 CERN을 소개하는 'About CERN'에 아래와 같이 첫 번째 문장이 적혀 있다.
"What is the universe made of?
How did it start?
Physicists at CERN are seeking answers, using some of the world's most powerful particle accelerators."
참 멋지고 낭만적인 조직이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회원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CERN에 있는 장비를 활용하여 연구를 하고자 하는 12,300여명의 초빙과학자, 기술자들이 이곳으로 온다고 한다(2013년 기준). 그 장비 중 단연 세계 최고는 입자가속기다. 현재 CERN에는 선형가속기를 비롯해 6개의 가속기와 감속기가 있다. 이 중 2008년 부터 약 100억 Dollar(2015년 9월 환율 기준 11조 8,220억원)를 투입해 만든 대형 강입자 충돌형 가속기(Large Hadron Collider; 이하 LHC)는 세계 유일의 장비다. LHC 구축 전까지 CERN은 미국의 Tevatron과 가속기 장비 및 과학 성과에서 경쟁해 왔는데 LHC를 계기로 절대 우위를 점하게 됐다. LHC는 지하 100m 깊이에 둘레 27km에 달하는 원형 입자 가속기로 2013년 10월 힉스입자(Higgs boson)를 증명하는 등 큰 성과를 냈다. 2012년 내가 숭고함을 느낀 ALICE(위 사진)는 LHC의 6개 Detector -이 외 CMS, ATLAS, LHCb, MoEDAL, TOTEM, LHC-forward- 중 하나로 중이온 충돌 연구에 최적화된 장비라고 한다. 힉스입자(Higgs boson)는 우주 대폭발(Big Bang)을 설명하는 열쇠가 된다고 한다. 작년(2015년) 7월에는 LHC실험을 통해 펜타쿼크(Pentaquark)라는 소립자도 발견했다고 한다.
Higgs boson과 Pentaquark 모두 이 글을 읽는 사람들과는 동떨어지게 느껴지는 내용이니 조금더 피부에 와 닿을 만한 CERN의 성과를 꼽으면 'www(World Wide Web)'다. 우리가 현재 없으면 못 사는 -못 살 것 같은- Internet의 기반이 되는 www를 탄생시킨 곳도 CERN이다. 1989년 Tim Berners-Lee와 1990년 Robert Caillau의 연구를 시작으로 개발된 www는 입자가속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대규모 실험 Data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오게 됐다. www는 1991년에 사용이 활성화 됐고 1993년 CERN의 공식 발표로 세상에 등장했다.
CERN은 우주탄생의 비밀, 물질 보다 더 작은 물질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나가고 있다. 닿을 수 없는 것, 품을 수 없는 것, 만져지지 않는 것, 불러지지 않는 것, 건널 수 없는 것,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들은 그 비밀에 한발 더 다가가고 있다. 그들에게 사랑은 '애틋한', '아득한' 것에 대한 진실을 알고자 하는 열정이다. 때로는 그 여정이 종교나 신을 믿는 입장에서는 그 영역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기에 그들은 어떤 의심에 대해 답하는 것 마저도 자신들의 몫이라 생각하고 있다. CERN을 외부에 알리는 이정표인 The Globe 벽면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우리가 누구(What are we?)이고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Where do we come from?),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Where are we going?)
CERN은 그 답에 접근하는 외로운 길을 당당히 걷고 있다.
'사랑'의 개념을 조금 더 넓게 보자. 그럼 Valentine Day때 주고 받는 선물이 꼭 연인간에만 주고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넓어진 사랑의 개념이 투사될 수 있는 대상을 기리는 날이 오늘일 수 있다.